늦잠을 잤다. 어젯밤 집으로 돌아와 빨래통에 던져둔 옷을 도로 꺼내 입으면서 세수를 할 수 있나 고민을 하는데, 문득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인 이영은 생각이 났다. 이영은이 어느 날 문득 나에게 비밀이라며 "오늘 세수 안 했다"라고 이야기했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세수를 안 하고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세수를 한 얼굴과 안 한 얼굴이 그리 차이가 없었다는 게 더 놀라웠다. 어쩌면 우리 모두 세수를 안 해도 되는 게 아닐까, 비누회사에서 세수를 발명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해봤다. 아무튼 세수를 한 나는 집을 급하게 나서면서 계속해서 이영은을 떠올렸는데, 일단 이영은의 이름이 진짜 이영은이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고-영은은 확실한데 성이 흐릿하다-뒤이어 이영은의 입가에 항상 걸려있던 애매한 웃음도 떠올랐다. 미소라고는 할 수 없고, 뭔가를 참는 듯한 느낌이 드는 웃음이었다. 버스정류장을 향해 바삐 뛰면서 이영은만의 느릿한 바이브도 기억났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영은은 세수를 하지는 않겠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세수를 할 수 있나 하는 고민 따위 하지도 않고 세수를 안 하겠지만, 버스정류장을 향해 뛰는 법 없이 특유의 나른한 바이브로 천천히 걸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이영은은 숙제도, 시험공부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선생님에게 툭하면 혼이 났지만 그래도 쫓기는 법 없이 언제나 느-긋해서, 어릴 때부터 매사에 쫓기고 꿈에서도 쫓기던 나는 이영은을 남몰래 부러워했다. 그래서 이영은을 따라 세수를 하지 않고 학교에 가본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쨌거나 오늘은 세수했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