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공백'과 '관계적 '공백'에 대한 기회 비용
파리 생활자가 되고 난 이후, 좀처럼 신지 않던 하이힐을 신고 나섰다.
하이힐을 신고도 몸의 중심을 잘 잡는 편이었는데 오랫동안 신지 않아 불안하고 불편해 집어던지고 싶었던..
요즘, '공백'이라는 것에 대해 자주 생각을 하게 된다.
내 자리를 비우고 다시 돌아와도 예전과 같기를 바라는 건 당사자의 마음일 뿐,
주변과 세상은 결코 기다려 주지 않으며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
나 또한 누군가를 기다려 주지 못한 채 나의 길을 가야만 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기다림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어도 실질적인 삶에서 느끼게 될 때면 생각했던 것보다 강도가 깊어 마음이 쓰리기도 하다.
대체로 그랬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세상보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알게 되는 실질적인 세상의 모습들이 흥미로왔었고
영화 속의 삶이나 캐릭터들보다 내 주변에서 실존하는 인물들의 모습과 삶의 흐름을 지켜보는 게, 훨씬 더 드라마틱했으며 공감이 갔다.
어릴 적에 보았던 비현실적인 영화 속의 세상이 점점 현실과 가까워지고 이십여 년 후엔
내 가장 가까운 지인들을 밀어 내고 인조인간과 가장 가까운 관계가 형성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허무맹랑한 공상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점점 현실 위로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하지만은
않다.
세상이 점점 단단한 시멘트와 플라스틱처럼 변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사랑만 갈구하며 살 수 없다는 걸 알게 되고 누군가의 연인인 것 못지않게,
세상의 구성원으로서의 역할과 내가 선 자리의 소중함을 알게 된 이후부터 였겠지만
드라마나 영화 작가들이 지어낸 사랑 이야기가 늘 지루하고 오글거리는 장면 이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면 지금 연인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려나? 싶겠지만 그건 결코 아니며
누구와 교제를 하든 그리 생각해 왔던 생각을 다시 꺼내어 놓을 뿐이라는 것도 함께 말해야겠다.
여전히 나에겐 지금 옆에 있는 내 연인이 최고일 뿐이라는 것과.
외국에서 생활하며 체득하고 감지하게 되는 '역할과 자리'라는 것, 요즘 더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폐쇄적인 분위기를 오랜 시간 버리지 못하는 한국에서 태어나 세상에 두루 관심을 갖고 있는 나의 지금 신분은
정체성 모호한 프랑스 거주자.
10년을 이곳에 살아도 나의 국적은 한국이며 앞으로도 '한국인'이겠지만
한국에서 나를 바라보는 나의 사회적 위치는 '국외거주자'라는 느낌이 콱 막혀 있는 현실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짧지 않은 시간들을 프랑스에서 살았어도 '이방인'이라는 외부적 시선에서 더 나아가질 않았다는 것을
새삼 인지를 하면서.
제대로 인식하고 한 단계 올라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