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메리엄-웹스터 사전은 "AI 슬롭(AI slop)"을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 저품질의 AI 생성 콘텐츠를 가리키는 이 표현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시작해 이제 공식 용어가 됐다. 미디어 분석 기업 멜트워터(Meltwater)에 따르면, 2025년 "AI 슬롭" 언급량은 전년 대비 9배 증가했고, 10월에는 부정적 감정이 54%까지 치솟았다.
플로리다 대학교의 최근 연구는 이 현상을 구조적으로 분석했다. 마케팅학과 Tianxin Zou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상대적으로 저품질인 콘텐츠가 범람하고 있다. 양이 너무 많아서 추천 시스템이 혼잡해지고, 진짜 고품질 콘텐츠를 발견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AI가 콘텐츠 생산을 대중화했지만, 그 결과는 역설적이다. 누구나 만들 수 있게 되자,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게 됐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네이버 블로그에는 AI가 작성한 것으로 의심되는 포스팅이 넘쳐난다. 쿠팡의 일부 상품 설명은 어색한 문장 구조로 AI 생성의 흔적을 남긴다. 스타트업 랜딩 페이지를 열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일러스트와 카피가 반긴다. "일단 AI로 빠르게 만들자"는 말이 "일단 비슷하게 만들자"가 되어버렸다.
닐슨노먼그룹(NNGroup)의 부사장 케이트 모란(Kate Moran)은 유로뉴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디자인 업계에는 '주주들에게 우리 제품에 AI를 넣었다'고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이 있다. 이건 기술 주도형 설계다. 도구에서 시작해서 그 도구가 풀 수 있는 문제를 역으로 찾는 것. 해결책에서 시작해 문제를 찾아가라는 압박인데, 이건 디자인이 작동하는 방식과 정반대다."
그녀가 든 사례는 인스타그램이다. 메타는 기존 검색창을 AI 검색 기능으로 대체했다가 빠르게 철회했다. "검색창이 어떤 일을 할 거라고 믿고 있는데, 갑자기 거기에 타이핑하면 AI 챗봇과 대화하게 됐다. 원하지 않았던 경험이다. 나쁜 경험이다." 사용자가 기대하는 것과 AI가 하는 것 사이의 간극. 이 간극을 무시한 채 "AI를 넣어"라는 지시만 따르면, 결과는 뻔하다.
한국 스타트업 미팅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펼쳐진다. "경쟁사가 AI 챗봇 붙였는데 우리는?" "일단 AI 기능 하나 넣어보자." 문제 정의 없이 솔루션부터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AI 슬롭을 만드는 공장이 된다.
AI를 '넣는' 것과 AI를 '푸는 문제에 맞게 쓰는' 것은 완전히 다른 행위다.
NNGroup의 2026년 UX 현황 보고서는 분명하게 예측한다. "AI 슬롭에 대한 반발이 증가할 것이다. AI를 신중하고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기업이, 아무 데나 AI를 붙이는 기업을 이길 것이다." 승자는 AI를 배경으로 물러나게 하는 회사다. AI인지 아닌지 사용자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문제를 푸는 회사.
좋은 사례가 있다. 아마존의 리뷰 요약 기능. 수십 개의 리뷰를 AI가 요약해주지만, 사용자는 "AI가 해줬네"라고 의식하지 않는다. 그냥 편하다. 핀터레스트와 유튜브는 사용자가 AI 생성 콘텐츠를 제한할 수 있는 필터 기능을 도입했다. AI 피로를 인정하고, 선택권을 돌려준 것이다.
반면 나쁜 사례도 명확하다. 원하지 않는 곳에 들어간 AI 챗봇, 맥락 없이 띄워지는 AI 추천, 기존 기능을 뜬금없이 대체한 AI 검색. 케이트 모란의 말처럼, "이 기술이 정말 유용하게 쓰이는 부분은 섹시하지 않은 것들이다." 리뷰 요약처럼 지루하지만 실용적인 것. 사용자가 의식하지 못하는 곳에서 마찰을 줄여주는 것.
NNGroup은 역설적인 결론을 내린다. "AI 피로가 증가하면서, 오히려 인간적인 디테일이 경험을 차별화할 것이다." 모든 것이 AI로 만들어지는 시대에, 인간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이 희소해진다.
AI가 생산을 대중화했다. 누구나 그럴듯한 화면을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남는 건 뭘까? 무엇을 만들지 선택하는 능력. 뭘 빼야 하는지 아는 감각. AI가 뱉어낸 결과물을 보고 "이건 아닌데"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 결국 판단력이다.
판단력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런 것들이다. AI가 생성한 다섯 개의 시안 중 어떤 것이 이 맥락에 맞는지 고르는 능력. "AI가 이렇게 해줬는데, 우리 사용자에게는 이게 더 낫겠다"고 결정하는 근거. 무엇보다, "이 기능은 AI 없이도 된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토스의 설계 철학을 보자. "Less is More." 기능을 빼는 것이 더 어렵다는 걸 아는 팀이다. 당근의 동네 감성은 AI로 복제할 수 없다. 그건 "따뜻한 느낌의 일러스트 만들어줘"라는 프롬프트로 나오는 게 아니다. 지역 커뮤니티를 이해하고, 사용자의 언어를 알고, 무엇이 어색한지 감지하는 판단에서 나온다.
다음 스프린트에서 AI 기능을 추가하기 전에, 이 질문을 먼저 던져보자. "이 기능이 없으면 사용자가 진짜 불편한가?" 대답이 "별로"라면, 그건 AI 슬롭이 될 확률이 높다.
모든 것이 AI로 만들어지는 시대에, 결국 차이를 만드는 건 AI가 못 만드는 것이다. 그건 고민의 흔적이고, 선택의 이유이고, 빼는 용기다. 디자이너의 무기는 피그마 실력이 아니다. 판단력이다.
Sources:
Euronews - 2025 was the year AI slop went mainstream
University of Florida - AI slop hurts consumers and creators
Meltwater - What the Rise of AI Slop Means for Marke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