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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누 Oct 29. 2020

소년들

그 시절 우리는 친구였다

바다가 들린다(1993), 고등시절 타쿠와 마츠노


 고등학교에 처음 입학하던 날이 아직도 기억난다. 붉은색 벽돌을 쌓아서 만든 정문을 지나자 붐비는 인파가 눈에 들어왔다. 저 사이를 어떻게 지나가나 싶었지만 다행히도 1학년 남자 기숙사는 정문에서 가까워 별로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었다. 방문마다 붙어있던 낯선 이름들을 지나치면서 나는 복도 가장 안쪽에 위치한 방 앞에 다다랐다. 109라고 적혀있는 숫자 아래에 명조체로 프린트된 내 이름과 다른 이름들이 같이 있었다. 햇빛은 잘 들어오지 않아 벽지는 누렇게 번져있었고 이층 침대는 올라가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구석지에 놓인 책상은 잘못 사용했다가는 튀어나온 나뭇조각에 찔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을 살펴보면서 그런 생각들을 하던 중에 중 다른 학생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구릿빛 피부에 해리포터가 쓸법한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L'이었다. 그는 내가 고등학교에서 가장 처음으로 만난 동급생이었고 학교생활을 하면서 가장 가까이 지내게 될 친구였다. 


  L은 언제나 영어 원서를 손에 들고 다녔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J.K 롤링의 해리포터였는데 그래서 그가 동그란 안경을 쓰는 걸까 싶기도 했다. L은 나처럼 미국에 살다 온 경험이 있었는데 우린 둘 다 비교적으로 시골인 남부지역에 머물다가 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학교에서 나도 영어를 잘하는 편에 속했지만 L은 우리 학년에서 가장 손꼽히는 학생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L의 제일 큰 장점은 그의 말주변이었다. 특히 학기 초부터 여자아이들과 스스럼없이 지낼 정도로 친화력이 좋아 다른 남자아이들의 부러움을 받기도 했다. 그런 L과는 다르게 나는 말보다는 오히려 듣는 쪽이었다. 하지만 취향이나 생각하는 부분에서 비슷한 점이 많아 우리는 나날이 갈수록 가까워져만 갔다.


 하루는 비가 많이 쏟아지던 날이었다. 학교에서 기숙사까지 걸어가야 했지만 사춘기 소년 둘이 쓰기에는 우산은 터무니없이 작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앞에 서서 고민을 하던 중 나는 들고 있던 우산을 L한테 건네주고 망설임 없이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고개를 뒤로 돌리자 멀쩡한 우산을 손에 쥐고 나를 쫓아오는 L이 보였다. 내가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건 어느 정도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먼저 달려 나가면 L이 반드시 쫓아올 거라는 확신이 말이다. 


 비록 1분도 안 걸리는 거리였지만 내가 느낀 시간은 정말로 길었다. 몸에 닿는 빗방울이 전부 느껴질 정도였고 창문에서 멀쩡한 우산을 들고 달리는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물웅덩이를 밟으면서 나는 소리. 나는 그 짧은 거리 동안에 많은 것을 보았고 들었고 그리고 느꼈다.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바보들처럼 웃어댔다.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이제 서로를 정말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다고 말이다. 그랬던 L과 멀어지기 시작한 건 3학년에 올라가고 나서였다.


 L과 다투게 됐다. 누구의 잘못인지는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L은 묻지 않았다. L은 나한테 화를 냈고 나는 그걸 묵묵히 듣기만 했다. 충분히 풀 수 있는 오해였다. 하지만 여러 감정들이 부딪히고 엉키면서 나는 이내 그러기를 포기했다. 흔들리지 않을 것만 같던 우정이었다. 하지만 너무 높아져 버린 탑은 예전에는 버텼던 바람도 이제는 이겨내지 못하게 됐다. 나와 L은 우리가 그동안 같이 쌓아 올린 ‘관계’라는 탑이 무너져가는 걸 지켜보기만 했고 서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나는 L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려고 했지만 비를 같이 맞았던 날 느꼈던 그 기류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입시가 다가오고 있었고 두 소년들은 서로 해야 할 일이 생겼다. 관계를 회복시키는 일은 자연스럽게 우선순위에서 내려가게 됐다.    


바다가 들린다(1993), 대학생이 된 둘은 그 시절을 되돌아본다


 마지막 겨울이 지나고 학교에 쌓인 눈이 녹아내릴 즈음에 우린 졸업을 했다. L은 평소에 우수했던 영어실력을 잘 활용해 수도권에 있는 대학 진학에 성공했다. 반면 나는 입시에 실패해 광주에 남아 재수를 하게 됐다. 3년이라는 시간을 같이 보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내 삶에서 떨어져 나갔다. 반대로 나 역시 그들한테서 선반 꽂아두고는 잊힌 책처럼 먼지가 쌓여가게 됐다. 그렇게 서로의 기억 속에서 각자를 놔줄 무렵 계절은 다시 돌아 가을이 왔고 나는 혼자서 수능을 다시 치렀다. 시험을 마무리 짓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가던 중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그게 곧바로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내가 L을 만난 건 훨씬 시간이 지난 후였다. L과 함께 있으면 확실히 고등학교가 떠올랐지만 우리는 이제 각자 다른 모습으로 각기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L과는 점점 연락이 뜸해지면서 이제 서로를 찾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나는 L을 떠올린다. 그리고 L 또한 마찬가지일 거라고 믿는다. 비록 예전처럼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우리는 서로한테 소중한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리고 언젠가 다시 마주하는 날에도 우리는 그때를 기억하며 여전히 친구로 남아있을 거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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