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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운 Dec 31. 2022

인생 처음 애쉬블루

  '인생 첫 강남 미용실'이라는 문구와 함께 카톡으로 보내온 사진 속 딸아이의 표정이 가히 살인적입니다. 평소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신부급 화장'을 한 데다 애교 넘치는 미소와 눈웃음까지 장착했으니까요. 연예인인가, 다시 보고 또 들여다봐도 딸이 맞습니다. 지금 막 탈색에 염색까지 마쳤다는 보고입니다. 미용사는 몇 번이고 정성스레 머리를 감기고 에센스를 바르고 드라이를 해주었을 테지요. 서비스로 눈썹 정리도 해준 것 같습니다. 그러니 얼굴에서, 머리에서 번쩍번쩍 광채가 날밖에요.


  딸아이는 기특하게도 감사하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처음으로 하는 염색에 '강남 미용실'이라는 프리미엄을 감안해 남편이 기꺼이 '아카(아빠 카드)'를 내밀었던 때문이지요. 선뜻 내준 것은 아니었지만 딸의 길고 긴 설득과 아양을 피할 방법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올해 재수를 한 친구의 대학정시수험표로 동반 1인까지 50% 할인해 준다는 말이 결정타였습니다. '그래, 50% 할인이면 아무리 강남이라도 크게 비싸지는 않을 거야.' 나름 셈을 했겠지요. 게다가 인생 반평생 정도 살았으니 '처음 해보는 것'에 대한 딸아이의 풋내 나는 설렘의 의미를 알아챘을 겁니다. 안 해주려면 모를까 해주려면 최대한 대범한 척, 쿨한 척, 멋있는 척, '3척' 정도는 해주어야죠. "옛다, 아빠 카드로 결제해. 아빠가 쏜다. 내일 머리 잘하고 와라."  

 여기까지였으면 좋을 뻔했습니다.


  다음 날, 미용실 계산은 아빠 카드로 했으니 당연히 결제 알람도 아빠에게로 갔겠죠. 저녁 8시 정도가 되었을까요? 남편이 전화를 했습니다. 오늘 회식이라  시간에 전화할 리 만무한데 무슨 일이 생겼나 서둘러 전화를 받았지요.

 "미용실 카드 결제 금액이 30만 5천 원인데, 이게 맞는 건가? 50% 할인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머리 하는데 60만 원이라는 얘긴데 강남은 그렇게 받는 거야? 요즘 탈색하고 염색하는데 얼마나 하지? 당신 머리 하면 10만 원, 12만 원 정도 했던 것 같은데? 금액 확인 안 한 거 아냐? 얘는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온통 물음표 투성이었습니다. 목소리톤도 살짝 높았고 말도 빨랐죠. 회식 중 화장실 다녀오면서 하는 전화랍니다. 이쯤 되면 머리꼭대기에서 허연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는 전조입니다.


  저 역시 가격에 놀라긴 했지만 성난 사람 옆에서 같이 성을 내봐야 불타는 집에 화염방사기를 쏴대는 격이니 이번에는 제가 3척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요. 말이 50% 할인이지 제 값 다 받는 거 모르냐, 원래는 한 가지 메뉴에 10만 원 정도 하는데 탈색에 염색 두 가지 메뉴를 하지 않았느냐, 염색 샴푸도 권해서 산 모양인데 비싼 제품은 10만 원 넘는다, 게다가 머리카락 길이가 길다고 추가요금도 을 거다, 나이가 몇인데 잘못 계산했을 리 없다, 이왕 내주기로 한 거 가타부타 말하지 마시라... 열심히 설명을 했습니다. 건조한 목소리에 아양끼 없는 말이라 그런가, 남편은 일언지하에 "나는 10만 원까지다. 그 이상은 못줘. 각자 N분의 1을 하든지, 난 몰라." 하면서 전화를 끊어 버렸습니다.


  이런 황당한 시추에이션을 보았나. 날벼락을 제가 맞을 일이 무엇입니까. 염색을 가 한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최저 시급으로 하루 3~4시간 일하는 저와 이제 갓 성년이 된, 한 달 아르바이트비 40만 원 정도에 불과한 딸아이의 소득 수준은 차치하고 N분의 1이라니요? 소득비율에 따라 차등 부담하자고 하면  모를 일입니다. 생각해볼 여지 정도는 있겠습니다만 과감하게 아빠쏜다며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아놓고선 이제 와서 N분의 1이라니 남아일언중천금의 경구도 무시한 무슨 망발인지요. 강남 소재 회사를 다니면서 강남의 미용실을 물로 본 겁니다. 소위 강남인데요, 미용사 아니고 무려 헤어 디자이너한테 머리를 했는데 말이지요.


애쉬블루 머리를 한 아이유, 방탄소년단 지민, 다현(좌로부터)


  N분의 1이라는 초유의 협박을 받은 사실을 알리 없는 딸아이는 파랑머리를 찰랑찰랑 휘날리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역시 강남이야, 머리 색깔 죽이지 않아요? 머릿결도 보들보들 너무 좋아." 남편은 물음표 일색이더니 딸아이는 감탄사 연발입니다.

"야, 그런데 너는 참 겁도 없다. 30만 원이 누구 집 애 이름이야? 샴푸까지 사고. 이 정도 가격인데 써도 되느냐 물어볼 생각은 안 들디?" 저는 모양 빠지게 타박을 해댔죠. 딸아이는 뭔 소리냐는 표정이었어요. '강남인데, 다들 그 돈 주고 머리 하는데, 이왕 처음 하는 거 제대로 기깔나게 하라고 카드까지 준거 아니었어?' 말하는 듯했죠.

'그래, 그 신나는 기분, 어깨 으쓱 폼내고 싶은 마음, 내가 알지. 네 기분에 지금 돈이 눈에 들어오겠냐, 됐다. 처음이니까 그냥 기분 좋게 넘어가주마.' 마음을 비우고 나니 그제야 딸아이의 머리색깔이 보이더군요. 제주 밤바다의 오묘하고도 신비로운 푸른빛을 닮았달까요... 푸른 바다를 헤엄치던 인어공주가 환생해 내 눈앞에 나타난 것도 같았지요.


  30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예쁜 머리카락을 갖게 되었고 기쁨과 만족이라는 감정을 얻어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꽤 괜찮은 일 같았습니다. 올 한 해 수고했다는 보상이라 해도 멋있을 것 같고요. 그래서 아랫입술 한 번 꽉 깨물고 참을 인 자를 새기며 남편에게 15만 원을 입금했습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입막음용 기름칠인 셈이죠. 그제야 남편은 입을 열더군요.

 "머리 예쁘게 잘됐네!"


  딸아이가 아르바이트하는 키즈카페에서  꼬맹이 손님들이 '엘사 공주'라 부른 답니다. 머리 한 번 만져봐도 돼요? 하면서요. 인어공주도 좋고 겨울왕국의 엘사공주도 좋지만 무엇보다 딸아이가 바라던 대로의 머리카락을 갖게 되어 좋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요? 애쉬블루 머리카락도 얻지 못했고 돈만 잃었는걸요. 가정의 평화요? 저에겐 강 같은 평화가 흐르지 않습니다만. 이렇게 얻은 것 하나 없이 한 해를 마무리하게 되었네요. 역시나 삶은 의도한 대로 되어주지 않나 봐요. 남편과 딸아이 중간에 끼어서 새우등이나 터지고 말이지요.

 "연말인데, 이게 뭐람?..."





덧.

올 한 해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년에는 좋은 일 더 많이 생기시길 바라며 작가님, 구독자분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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