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자연과 한옥이 주는 어떤 안온함
온화한 어느 겨울날, 가족들과 함께 KTX를 타고 경주로 향했다. 이른 새벽이라 기차의 창밖으로는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일출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어느새 푸르른 아침이 찾아왔다. 기차가 터널을 지날 때마다 세상은 조금씩 밝아졌다. 커튼을 한 겹씩 걷어내는 것처럼 맑고 선명한 풍경이었다. 출발한 지 두 시간 만에 우리는 신경주역에 도착했다.
‘경주스러움’을 맛보기 위해 첨성대, 대릉원, 황리단길 일대가 위치한 황남동으로 향했다. 시내로 향하는 길, 저 멀리서부터 우뚝 솟은 고분들이 눈에 띄었다. 거대한 능과 능 사이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도 보였다. 유구한 역사가 현재와 연결된 모습은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천년이 넘은 무덤이 자아내는 신비감이 온몸에 전해지니 문득 이 풍경이 일상으로 자리한 사람들의 삶이 궁금해졌다. 경주라는 도시에 관해서도.
능을 한참 구경하다가, 근처의 '커피 플레이스'라는 카페로 향했다. 여기서 숙소의 체크인 시간까지 시간을 보낼 요량이었다. 때마침 카페에서 경주를 주제로 만든 매거진 '로플 LOPLE'을 발견했다. 드립 커피를 마시며 잡지를 흥미롭게 읽던 중, 나는 조금 놀라운 광경을 목도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카페는 동네 사람들로 부글댔고, 그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미 일상의 일부로 자리한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얼굴과 몸짓이었다. 서울의 카페에서는 보기 드문 상황이 아닌가. 말 그대로 '커피'와 '플레이스'의 기능을 톡톡이 하고 있던, 그 다정다감함이 인상 깊게 남았다.
숙소인 오소한옥(OSO HANOK)까지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픽업 서비스를 이용할 수도 있었는데, 우리는 짐을 숙소로 미리 보낼 때 그 기회를 이용했다. (친절한 호스트님께서 또 한 번 데리러 오려고 하셨으나 택시로도 20분 안팎이면 도착할 수 있어 거절했다.) 택시 기사님은 경주의 남산 자락으로 향하는 손님이 반가운 눈치셨다. 그러면서 본인이 평생 경주에 살았지만, 제일 살고 싶은 동네가 바로 남산동이라고 말씀하셨다. 남산동은 신라시대 때부터 기운이 좋기로 유명하다며, 한 국가에 '남산'이라는 지명을 잘 안 붙이기에 그만큼 경주의 남산이 훌륭한 산이라고 덧붙이기도 하셨다.
오소한옥은 경주 남산 아래의 호젓한 마을에 위치해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드넓은 중정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ㄱ자'로 길게 늘어선 한옥의 위용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지붕 너머로는 산의 등줄기가 선명히 빛나고 있었다. 사방을 둘러싼 푸른 소나무와 군데군데 놓인 화강암은 이곳의 고즈넉한 동양적 정취를 극대화했다. 총 9개의 룸타입과 카페, 수영장, 다실 등의 공용 공간이 마치 하나의 '마을'처럼 배치되어 있었다.
체크인 안내를 받기 위해 중앙 건물로 향했다. 독채형 숙소는 보통 무인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은데, 오소한옥에는 호스트를 비롯한 직원들이 오후 6시까지 로비에 상주해 있다. 깊은 환대와 친절한 안내를 해주시는 호스트님 덕분에, 비대면과는 비교할 수 없는 '휴먼터치'의 매력을 감각했다. 입실부터 주요 시설 안내를 마친 후, 차를 마시며 호스트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이곳만의 특별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오소는 경상도 방언으로 '즐기러 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바쁜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오롯이 자연에서 여유를 즐겼으면 하는 호스트의 바람이 오소한옥에 담겼다. 실로 이곳은 자연을 누리기에 더없이 훌륭한 환경이다. 남산과 인접해 있어 등산을 가기에 좋고, 숙소 주변으로 조금만 걸어 나가도 한적한 여유를 누릴 수 있다. 이 마을에는 예술가 집단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갤러리와 도자 공방 등의 예술 공간이 도처에 있기도 하다. 현재 오소한옥에서는 스테이와 결합한 여러 문화 워크숍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숙소의 내부 규모나 주변 환경을 보았을 때, '복합문화공간'으로의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해 보였다.
오소한옥의 모든 방은 전통 한옥 양식과 서양식 인테리어를 결합해 설계되었다. 한옥의 건축 방식으로 전체적인 골격을 만들고, 오늘날의 주거를 내부 구조에 녹여낸 것이다. 객실 수용 인원(2인실부터 최대 12인실)에 따라 구분된 방은 저마다의 콘셉트로 꾸며졌다. 우리 가족의 선택은 7번 방인 '해 질 녘 남산자락'방. 앞서 1번 방 '동서양의 조화', 6번 방 '과거의 재해석', 10번 방 '사색과 풍류를 즐기는 편안한 휴식'방도 둘러보았다. 기와지붕, 서까래, 대청마루 등의 한옥 양식과 현대의 실용적인 가구가 조화를 이룬 모습이 독특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해 질 녘 남산자락'방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일몰 무렵이 되자 집안 전체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통유리창 안으로 희미한 햇살과 함께 바깥의 풍경이 그대로 스며든다. 모든 창이 여닫이 형식의 전통 창호 대신 통유리로 되어 있어, 주변의 경치를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특히 남산의 굽이진 산등성이를 바라보고 있을 때면, 자연이 선사하는 안온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빠와 언니가 저녁거리를 사러 경주 중앙시장에 다녀오기로 했다. 그전까지, 엄마와 나는 침대에 누워 나른한 오후를 즐기기로. 내 옆에 누운 엄마의 얼굴을 아주 오랜만에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한집에 사는 식구라는 이유로 되려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소홀히 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스쳤다. 그저 이 순간을 깊고 넓게 누려야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했다. 서로 눈을 감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데, 엄마는 이곳의 이불이 매우 좋다고 하셨다. 얇은 이불이지만 덮었을 때 전해지는 포근함이 대단하다고. 침구의 안락함과 더불어 나는 천장을 가득 메운 서까래가 마음에 들었다. 눈을 편안하게 하면서, 소나무 특유의 냄새가 전해졌다. 자연적 재료로 지어진 집이 주는 특별함이었다.
경주 중앙시장에서 사 온 회와 치킨, 튀김 그리고 교리김밥과 황남빵까지! 한상 가득 차려 놓고 샴페인과 와인을 곁들인 저녁을 즐겼다. 경주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을 먹으니, 여행을 하는 기분이 제대로 났다. 가족들과 내일의 일정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아빠는 불국사와 석굴암에, 엄마와 언니는 감포 해변에 가고 싶다고 했다. 나는 황리단길의 능을 좀 더 보고 싶었다. 오늘 둘러보았던 대릉원, 동궁과 월지 등에서 이미 경주의 멋을 느꼈지만, 앞으로 어떤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게 될지 기대가 되었다. 다가올 내일을 상상하며 이렇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오소한옥에서 맞이한 첫 아침. 알람 없이 눈을 떴는데, 침대로 들어온 볕이 반가웠다. 오늘도 날씨가 맑구나. 산뜻한 기분으로 조식을 받아 왔다. 샌드위치와 커피 그리고 약간의 과일들. 부드럽게 쏟아지는 햇살 아래, 툇마루에 앉아 아침을 먹고 책을 읽으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언니와 좋아하는 노래를 서로 소개하며 그간 나눈 적 없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비일상적인 공간은 이렇게 새로운 생각과 행동을 불러오기도 한다.
누군가 왜 여행을 하는지 묻는다면, 그 자리에서 나는 어렵지 않게 만담꾼이 될 수 있다. '여행의 이유'를 은유하는 다채로운 이야기가 있겠으나, 그중에서도 나는 여행이 주는 '회복적인 힘'을 강조해 말하고 싶다. 일상의 제자리로 돌아갈 힘을 얻는 과정이 곧 여행이라고. 그러니까 여행에는 놀라운 회복성이 있다고. 반복적인 일상에서 한걸음 물러나 낯선 공기를 들이마시는 시간, 비일상적인 시도로부터 새로운 감각이 열리는 경험, 눈길을 사로잡는 풍경 앞에서 부유하는 생각들은 모두 여행 안에서 이루어진다.
경주로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때에도 나는 '떠남'이 가져다 줄 새로운 힘을 기대했다. 일상에 산적한 복잡한 문제를 뒤로하고 잠시 비움의 시간이 필요했다. 느리게 보고, 듣고, 생각하는 시간 안에서 새로운 몸과 마음이 되고 싶었다. 온전한 쉼을 누리기 위해 선택한 경주는, 내게 아주 특별한 휴식 그 자체였다. 경주의 멋과 자연을 품은 오소한옥에서 머무르는 내내 떠올랐던 감정과 생각들이 매우 소중하게 남았다.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도 마음은 들떠 있던 아름다운 순간들. 나는 여전히 삶을 고민하고 헤매고 부유할 것이지만, 두렵지는 않다. 다시 한번 삶을 기운차게 살아갈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