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개월 잡고 나온 세계 여행.
한 달 전인가 통화를 하는데 돌아올 계획이 없냐고 친구처럼 묻는 엄마.
전쟁이라도 하는 중인지 '절대'오지 말라고 한다.
요즘은 너무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어서 그런지, 가끔 한국 돌아 갈 상상을 하곤 했다.
한국 사회가 참 신기한 게 경력이나 능력을 나이와 비교한다. 30살에 뭐뭐 25살에 뭐뭐 20살에 벌써 뭐뭐 그런 게 참 웃기다.
왜 "뭘 해야 하는 나이"가 존제하냔 말이다. 나는 졸업도 못했는데 “회사 대리 정도 될 나이”가 되고 있는 건가. 암튼 그런 이유로 나는 돌아가서는 안될 것 같다. 점점 여행이 길어질수록 사회적으로 점점 무능력해지는 기분이다.
사회경험도 없고, 자격증도 없고, 이제 학위도 없으므로, 고졸에 그냥 29살 남자가 됐다. 앞으로 뭘 먹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잘 먹고 있으니. 걱정 없다.
약 25번째 비행기 타는 날.
2년 전 오늘 즈음 막연히 부품 기대감과 가득 찬 배낭을 메고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그 당시 여행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나고 긴장됐으면 그 날 출발도 하기 전에 공항에서 여권과 신용카드를 한 번씩 잃어버렸었다.
탑승 전, 마지막으로 몇몇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고 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 안에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었는지, 말똥 말똥 눈을 뜨고 앞으로 여행할 내 모습을 상상했다.
최근에는 일주일이 하루처럼 느껴졌다. 슬럼프를 느낄 여유도 없이, 벌써 아일랜드 정착 생활이 6달이 다 되어가고 있다.
아일랜드에서 보내는 하루하루는 지루함의 연속이었다. 영어 학원을 가고 오후에는 레스토랑에서 일을 했다. 초심을 찾고, 지루함을 떨치기 위해 여행했던 곳을 다시 가보기로 했다.
<2015년 3월 28일>
2년 전 일기장
여행을 준비하며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간직하고 싶은 추억, 두고 가기 아쉬운 것들이 너무 많다. 아무튼 오늘은 짐을 싸느라 너무 정신이 없다.
하루 종일 유영이와 쇼핑을 했다. 이걸 사고 저 걸사고, 투덜대고 장난치면서 하루 종일 돌아다녔다. 가방 무게가 20kg, 내 몸무게 총합이 80kg가 넘었다.
엄마가 해준 마지막 아침밥을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 집을 걸어 나오며 뱉은 ‘엄마나 걱정해’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았던 것 같다.
<2017년 3월 26일>
다시 오늘
어제와 크게 다를 게 없는 오늘이지만, 설레는 마음에 아침 7시에 눈이 똑 떠졌다.
낮 시간 비행기를 타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숙박비를 아끼고자 항상 밤에 이동하는 비행기만 탔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바깥 풍경을 한참이나 보고 있었다.
비행기 아래로 구름이 지나간다. 여기서 보니 세상이 아기자기하다. 나무가 모여 숲이 되고, 강이 모여 바다가 되는 풍경이 예쁘다.
개미나 메뚜기가 보는 세상은 어떠할지 궁금하다. 땅위에 좁쌀만 한 사람들을 보며 하루 종일 헤매고 다니던 개미 같은 내 모습을 상상했다.
오랜만에 여행이다 보니 감을 잃었는지 당연히 폴란드에서 유로를 쓰는지 알고 있었다. 전에 폴란드 여행을 했을 때도 무전여행을 했기 때문에 폴란드 돈을 본 적이 없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환전을 하지 않았고, 강제로 무전여행을 했다.
카드 결제가 가능한 곳에서는 괜찮았지만, 버스를 타서는 같이 탄 사람에게 구걸을 했고, 무전 승차도 서슴지 않았다. 근데 심지어 기차를 잘 못 타서 엉뚱한 곳에 가고 있었다.
당시 여행하던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주변이 어둑어둑 해졌을 때는 정말 막막했다. 그때까지도 헤매며,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로 목적지만 반복하며 물어물어 집을 찾아갔다.
결국 6시간이면 갈 거리를 13시간이나 걸려 도착했다.
약 500일 만에
다시 찾아온 곳
은 무전여행을 할 때, 3일 동안이나 재워주고 먹여주고 했던 폴란드 todz에 있는 한 가족의 집이다.
동년배 친구와 그의 형, 부모님 그리고 엄마의 쌍둥이 자매가 있던 집이다. 여기 오는 내내 혹시 아무도 없지 않을까? 이사 가지 않았을까? 나를 불편해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가득 안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반겨주는 아버지와 조금은 어색해하는 어머니에게 선물을 건넸다. 아버지는 나를 보고 ‘파파, 파파’를 반복했다. 그 당시에 내가 파파 마마라고 아버지 어머니를 불렀던 게 떠올랐다.
말이 전혀 한마디도 통하지 않았지만, 폴란드어로 써온 편지로 내 근황을 전했다. 너무 늦은 시간에 도착해서 인지 두 아들은 집에 없었고, 다음날 볼 수 있을 거라 했다.
그간 형은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았고, 동생은 여자 친구와 약혼을 하고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여행 초반이었던 나는 일 년 반 동안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서로 사는 모습은 달라졌지만, 그 간에 공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에 머무는 3일 동안 당시 갔던 모든 곳을 돌아봤다.
바나나를 먹으며 앉아서 쉬던 슈퍼마켓, 텐트 좀 치자는 나를 퇴짜 놓았던 집들, 초등학교, 버스정류장 등 모든 것이 그대로 있었다. 심지어 집 주변에 있던 한쪽 눈이 다친 고양이도 그대로 있었다. 마치 정든 옛 동네에 놀러 온 기분이 들었다.
엄마와 쌍둥이 아주머니는 끝까지 내가 준 선물을 열어보지 않았다. 포장되어 있는 것을 샀기 때문에, 나조차도 초콜릿이 어떻게 얼마나 들어 있을지 몰랐다. 그 초콜릿을 감싼 포장지가 민망하게 느껴졌다.
신기하게도 아버지도 그랬고, 세바스찬(형)의 딸 첫 번째 생일이라길래 건넨 선물도 열어 보지 않았다.
이게 폴란드라는 나라의 문화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엇이든지 마음으로 고맙게 받겠다는 의미로 내 멋대로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