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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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에서의 시간이 곧 끝나간다. 막판 스퍼트를 내서 놀러다니는 중이다.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플리트비체는 너무 멀기 때문에 패스, 근처에 크르카 국립공원이라는 비교적 작은 공원을 가기로 했다. 요정이 나올 것 같은 자연 속에서 우리는 한참 걸었다. 걸으면서 많은 것들을 털어낸 기분이다.
이렇게나 깨끗하고 날 것의 자연이라니. 우리나라에서 봤던 수목원들은 이곳에 비하면 그냥 들풀이었다. 장엄하게 쏟아지는 폭포를 중심으로 1시간 정도를 삥 돌았다. 왜 이렇게 금방 끝나는지 의문이었는데 우리가 가장 안쪽 길로 걸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래는 세네시간 정도 걸리는 코스라고 했다.
비록 우리가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안으로만 돌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갑자기 엄살을 부린 코리안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나마 표지판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길로 들어갔던 건데, 여러 갈림길 중에 가장 쉬운 길을 택했던 거였다. 가장 쉬운 길은 가장 빨리 끝나지만 가장 허무하기도 하다. 끝이 쉬워지면 과정도 어느 정도 무색해지기 마련이니까.
그치만 우리는 집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스플리트에 와서, 플릭스버스를 타고 스크라딘에 내려서, 다시 셔틀 배를 타고 이 공원에 들어왔다. 같은 경로로 다시 집에 가야한다는 소리다. 이 정도 이동은 사실 크게 보면 별 것도 아니다. 되게 편한 마음으로 편하게 보고 돌아가기로 했다. 5시반에 마지막 배를 타도 집에 가면 9시에 될 것이다. 조금은 서두를 필요가 있다.
마지막 관문인 시내버스는 퇴근길과 하굣길의 콜라보였다. 이곳은 저녁 8시가 가장 붐비는 시간대인가보다. 해가 지는 시간이 그 때여서일까. 이곳의 저녁 8시는 우리의 저녁 6시 같다. 사람들이 집을 찾고 거리가 조용해지고 밥 냄새가 조금씩 난다. 이 거리에서는 귀엽게도 계란후라이 냄새가 난다.
버스로 40분 정도 가면 집이 나온다. 이제 이 버스를 하도 자주 타서 구글맵을 자주 안 봐도 되는 경지다. 그런 편안한 와중에 어떤 아저씨가 버스를 탔다. 숨을 큭큭하고 들이마시더니 아주 큰 비웃음으로 숨을 뱉어내는 분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웃긴 일이 있는 줄 알았는데 1분에 한번 정도 반복적으로 그런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이었다.
아무래도 본인의 의지로 내는 소리는 아닌 것 같았지만 실제로 그분은 잔뜩 웃고 계셨고 그게 사람들을 생경하게 했다. 1분에 한번씩 웃는 사람이라니. 심지어 만원버스 안에서 계속 돌아다니셔서 소리로 위치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 곁으로 올 때면 어쩐지 조금 긴장이 됐다. 우리 앞에 서있던 남학생들은 그를 쳐다보다가 째려보다가 미세하게 피했다.
언제부턴가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내린 것 같았고 다들 안심하는 눈치였다. 누군가의 의지도 아닌 일로 다같이 긴장해야 한다는 게 서글펐다. 그렇게 잔뜩 웃고 있는 본인은 얼마나 긴장이 될까. 얼마나 울고 싶을까. 그에 대해 조심스럽게 생각하다가 피곤한 몸으로 버스에서 내렸다. 저녁 9시였다.
집에 당도하자마자 파스타를 끓였다. 우유에 면을 바로 끓인 원팬 파스타는 어쩐지 조금 불어있었다. 곧 이 집을 떠나기 때문에 냉장고를 잘 비워야 한다. 마지막으로 남은 파스타면과 바질페스토를 열심히 먹어가는 중이다. 늦게 먹는 저녁이 왠지 가장 여행 같은 분위기를 준다. 7시부터 준비해서 8시쯤 먹고 9시면 간식을 먹으면서 드라마를 보는 일상이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냉장고를 비워가는 중에 생필품도 똑 떨어졌다. 어쩜 동시에 샴푸, 린스, 바디워시, 치약, 토너 같은 것들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새로운 여행을 준비하면서 생필품도 잔뜩 사기로 했다. 또 낯선 곳을 향해 떠날 준비를 한다. 문화도 언어도 다른 곳에서 부딪히며 산다는 일은 매번 적응이 필요하지만, 어떻게든 해낼 것을 알기 때문에 조금만 두려워하기로 한다. 막막함의 정도가 점점 옅어지고 있다.
2
마지막 여행은 스플리트의 정점인 섬 투어였다. 크로아티아에는 16개의 섬이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 투어로 묶인 곳은 3개에서 5개 섬이었다. 우리는 5개의 섬과 블루 케이브라는 유명 관광지를 다녀올 계획이다. 보통 투어는 비싸기 때문에 알아서 다니는 편이지만, 섬들 사이를 도보로 오갈 수는 없기 때문에 스피드 보트에 몸을 맡기기로 한다.
투어들 중에서도 가장 가성비가 좋은 녀석으로 골랐다. 가성비가 좋아서인지 아침 댓바람부터 가이드를 열심히 기다렸다. 조금 큰 투어로 보이는 사람들은 하나둘 보트를 타고 떠났고, 가성비 좋은 우리들만 남았다. 커플 둘에 우리 둘, 혼자 온 여성분까지 총 7명이었다. 호주에서 신혼여행을 왔다는 커플이 우리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들은 허니문을 3개월이나 한다고 했다. 돈도 돈이지만 그만한 시간을 낼 수 있다는 게 더 멋졌다.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돈보다 시간일까. 돌릴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고 미룰 수도 없는 게 시간인데. 지각 중인 가이드 덕분에 물도 사왔다. 멀미약을 삼키는 동시에 그가 도착했다.
크로아티아식 영어는 생각보다 더 알아듣기 어려웠다. 우리는 설명의 절반 정도만 이해하면서 대충 눈으로 풍경을 담았다. 듣는 것보다 보는 게 더 중요한 시간이었다. 스피드 보트를 타고 여행한다고 들었는데, 스피드가 어마어마해서 핸드폰을 들면 날아갈 것 같은 정도였다. 바나나 보트를 두개 정도 붙인 것 같은 크기로 아드리아 해를 전력질주했다.
처음 보트가 속력을 내자마자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디지게 추웠기 때문이다. 아침아라서 그런 줄 알았는데 집에 올 때까지 추웠다. 대자연의 바람과 파도 앞에서 내가 걸친 레이스 블라우스는 그저 실오라기에 불과했다. 거칠 곳 없는 바람 앞에서 열심히 옷의 틈새를 가렸다. 이를 너무 앙 깨물고 있어서 턱이 아파왔다.
허니문 커플은 맨 뒷자리에 소파석을 찜해놓고 앉았다. 처음에는 부러웠으나 매번 가방을 두고 내려서 아무도 못 앉게 하는 건 좀 신기할 정도였다. 한국인이었다면 한번쯤 앉고 비워뒀을 텐데. 그들은 정말 무해하게 그 자리를 즐기고 있었다.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는 건 한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서양인의 특권일까. 무엇보다 그들이 유교 사상에 물들지 않았다는 게 부러웠다.
사람이 살고 있는 섬, 살고 있지 않은 섬은 온도 차이가 컸다. 오직 관광을 위해 세워진 건물들은 온기가 없어보였다. 카페 하나만 달랑 있는 섬도 있었다. 아마도 성수기가 되면 그 해변에 누워있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카페로 몰릴 터였다. 오직 성수기를 바라보고 나머지 계절을 보내는 걸까. 성수기만 일하고 그 외에는 잘 쉴 수 있다면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
보트에 앉아있는 동안은 가랑이가 아프다는 생각과 춥다는 생각을 잠시도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주 작은 육지라도 내릴 때마다 내 다리로 서있다는 게 기적처럼 느껴졌다. 호주인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듯 기지개를 켰다. 아침에 출발했던 곳에 저녁쯤 다시 도착하고 나니까 감개무량했다. 하루를 함께했던 일행들에게 조금은 아쉽지만 조금은 반가운 인사를 주고받았다.
내리고보니 목에 소금이 맺혀 있었다. 바닷물 스플래쉬를 몇번 맞고 나니 소금으로 굳은 것 같았다. 생각보다 더 고생스러웠지만 그래서 아주 기억에 남을 투어였다. 조금 허술하고 헐렁해보였던 가이드도, 무해한 호주 커플도, 연륜이 가득해보이는 중년 부부도, 조금 외로워보이지만 귀여웠던 여성분도.
아마도 다시 볼일이 없을 그들을 생각하면 조금 아득해지는 기분이다. 살면서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왠지 최선을 다하고 싶어진다. 그들이 만난 첫 한국인일 수도 있는 우리, 생각보다 오래 여행을 하는 우리, 조금은 조용한 우리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이 집에서의 마지막 날이 와버렸다. 내일 아침이면 친절한 호스트의 차를 타고 떠날 것이다. 한달을 보내버린 이 집에서 많은 말들과 생각과 음식들이 오갔다. 아마도 여기서의 마지막이 될 글을 쓰면서 또 파스타를 끓이고 있다. 영상 편집과 여행 계획과 짐싸기 같은 일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아마도 오늘 이 집에서 가장 긴 하루를 보내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