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읽으며, 너를 쓰며. 7화

어긋나는 조각들

by 돌부처

월요일 아침, 진우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크리스마스의 여운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뺨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것 같은 그녀의 입술 감촉과, 손을 잡았을 때 느껴졌던 따뜻한 온기. 그는 침대에 누운 채 천천히 지난 토요일을 복기했다. 꿈처럼 행복했지만, 동시에 마음 한구석에 남은 희미한 파문.


그는 애써 그 불협화음을 무시했다. 카페에서 책장을 기억하지 못하던 그녀의 당황한 표정, 헤어질 때의 어색한 마지막 모습. 하지만 곧이어 그는 고개를 저었다. 완벽한 하루에 대한 사소한 트집일 뿐이라고, 그는 결론 내렸다. 사람은 누구나 긴장하면 그럴 수 있는 법이다. 오히려 그런 허술한 모습이 그녀를 더 인간적으로, 더 사랑스럽게 느끼게 만들었다.


출근 준비를 하는 내내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샤워를 하며 흥얼거렸고, 토스트를 평소보다 바삭하게 구웠다. 세상의 모든 색이 한 톤은 더 밝아진 것 같았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그를 발견한 동빈이 혀를 찼다.


"야, 너 아주 얼굴에 나 연애합니다, 하고 쓰여있다. 지난 주말에 아주 좋은 시간 보냈나 보네? 드디어 만난 거야? 그 랜선 연인?"


"뭐, 그냥... 친구 만났어."


진우는 애써 둘러댔지만, 이미 표정을 감추기엔 늦어 있었다. 그의 행복은 너무나 선명해서, 주변 사람들까지 알아챌 정도였다.


"친-구? 야, 네 표정은 그냥 친구 만난 표정이 아니야. 인생의 동반자라도 만난 표정이구만. 그래서, 어떤 분이셔? 예쁘냐? 뭐 하는 사람이야?"


동빈의 짓궂은 질문에 진우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직업. '사무직'이라는 애매한 단어 외에 그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야. 나랑 비슷한."


"에이, 싱겁기는. 다음에 한번 소개해줘."


진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동빈의 질문은 그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사실, 즉 자신이 그녀의 현실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다.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자마자, HJ, 아니 이제는 수민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어젯밤 늦게 도착한 메시지였다.


[집에 잘 들어갔어요? 오늘 하루 종일 진우 님 생각만 했어요. 우리가 함께 걸었던 거리의 불빛, 같이 들었던 캐럴 소리, 나누었던 모든 대화들... 그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자꾸만 되새기게 되네요. 상상보다 더 좋았다는 진우 님의 말이, 제 마음속에서 계속 울리는 것 같아요. 고마워요, 제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줘서.]


진우는 메시지를 읽으며 다시 한번 가슴이 벅차올랐다. 바로 이것이었다. 그가 사랑했던 그녀의 언어. 현실의 만남에서 느꼈던 모든 감정들을, 그녀는 이렇게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다운 문장으로 정리해 주었다. 어제 그가 느꼈던 아주 작은 위화감마저도, 이 완벽한 문장들 앞에서는 부끄러운 기우처럼 느껴졌다. 동빈의 질문으로 잠시 복잡했던 마음도 눈 녹듯 사라졌다.


[저도요. 오늘 아침에 눈을 떴는데, 온 세상이 어제랑 다르게 보이는 거 있죠. 수민 님이라는 필터가 생긴 것처럼요. 어제 우리가 함께 본 세상은, 혼자 볼 때와는 전혀 다른 색깔이었어요.]


그들의 온라인 대화는 다시 시작되었다. 현실에서의 만남이라는 경험이 추가되자, 대화는 이전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깊어졌다. 그들은 서로가 선물해 준 시집과 스노우볼 사진을 찍어 보내며, 그 안에 담긴 의미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시집, 다시 읽으니 느낌이 또 다르네요. 예전에는 그냥 슬프게만 느껴졌던 구절들이, 이제는 슬픔 너머의 단단함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려요. 진우 님 덕분에 잊고 있던 보물을 다시 찾은 기분이에요.]


[저는 이 스노우볼을 볼 때마다, 제 세상도 누군가 이렇게 따뜻하게 바라봐주고 있다는 생각에 힘이 나요. 수민 님이 제 세상의 첫 번째 플레이어가 되어준 것 같아요.]


모든 것이 완벽했다. 온라인의 'HJ'와 현실의 '수민'은 이제 진우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존재로 완벽하게 합쳐졌다. 카페에서 책장을 기억하지 못하던 그녀의 어색한 모습은, 그저 첫 만남의 긴장감 때문이었을 거라고 그는 완전히 확신했다.




그 주 내내, 진우는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막혀 있던 게임 시나리오도 술술 풀려나갔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녹여내, '님프'와 주인공의 만남 장면을 새롭게 써 내려갔다. 이전보다 훨씬 더 애틋하고 진실한 감정이 담긴 대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님프'의 대사에 수민이 했던 말을 그대로 적어 넣기도 했다. '당신 덕분에 내 상상이 현실이 되었어요.'




그렇게 며칠이 지난 금요일 저녁이었다. 진우는 퇴근 후 다음 데이트를 위해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을 검색하고 있었다. 하얀 눈이 내리는 창가 자리, 따뜻한 조명이 있는 곳. 그녀와 함께라면 완벽할 것 같았다. 그때 수민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진우 님, 혹시 지금 통화 괜찮아요?]


진우는 반가운 마음에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진우 님, 저예요."


"네, 수민 님. 목소리 들으니까 좋네요. 저 마침 주말에 뭐 할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맛있는 거 먹으러 갈래요? 제가 좋은데 알아봤어요. 눈 오는 거 보면서..."


진우는 설레는 마음에 앞서서 말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 진우 님. 저... 정말 미안해요. 사실 그것 때문에 전화했어요."


"네?"


"제가 이번 주말에 갑자기 좀 바빠져서요. 회사에 계속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중요한 프로젝트 마감이 코앞이라. 진우 님이 약속 잡을까 봐... 미리 말해주려고요."


진우는 순간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도 그녀의 일이 있을 테니까.


"아, 그래요? 많이 바쁜가 보네요. 괜찮아요. 일 잘 마무리해야죠. 혹시 제가 뭐 도와줄 거라도 있을까요? 야식이라도 사다 줄까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냥... 집중해야 하는 일이라서요. 데이터 정리하고 보고서 쓰고... 그런 지루한 일들이에요. 진우 님 시간 뺏고 싶지 않아요."


수민은 다급하게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진우는 조금 서운했지만, 그녀의 배려심에 다시 마음이 풀렸다.


"정말 미안해요. 저도 진우 님 정말 보고 싶은데... 대신 다음 주에는 제가 정말 맛있는 거 사줄게요. 꼭이요."


"알았어요. 그럼 어쩔 수 없죠. 프로젝트 잘 끝내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요."


통화는 그렇게 짧게 끝났다. 진우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예약 창을 닫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지쳐 보였다. 그는 그녀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아직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사무직'이라고만 했을 뿐. 그는 그녀의 일에 대해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녀가 먼저 말해주기 전까지는 기다려주기로 했다. 진정한 사랑은 기다림의 다른 이름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은 생각보다 길고 공허했다. 토요일 아침이 되자, 그는 허전한 마음에 잠에서 깼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그녀를 만날 준비를 하며 설레고 있었을 시간이었다. 텅 빈 집 안의 고요함이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그는 소파에 누워 의미 없이 TV 채널만 돌렸다. 화면 속에서는 연인들이나 가족들이 함께 웃으며 행복한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채널을 돌리다 말고 TV를 꺼버렸다. 현실의 풍경이 자신의 공허함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수민의 Threads 계정에 들어갔다. 그녀는 바쁘다고 했으니, 새로운 글은 없었다. 그는 그녀가 이전에 올렸던 글들을, 마치 성경을 읽는 신자처럼 경건하게 처음부터 다시 읽어 내려갔다. 그녀의 흔적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후가 되어서야,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의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가 어떻게 지내는지, 식사는 제대로 했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프로젝트 잘 돼가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 밥은 꼭 챙겨 먹어요.]


답장은 몇 시간이 지나서야, 저녁 늦게 도착했다. 진우는 휴대폰 진동 소리에 거의 뛰어오를 뻔했다.


[진우 님 메시지 덕분에 힘내서 하고 있어요. 방금 막 따뜻한 커피 한 잔 타왔는데, 꼭 진우 님이 사다 준 것 같네요. 고마워요. 거의 다 끝나가요. 조금만 더 힘낼게요.]


진우는 그녀의 다정한 메시지에 안심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자신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루 종일 쌓였던 허전함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아주 잠시였다. 그의 머릿속 기억의 서랍 한구석에서, 오래전에 그녀가 썼던 글 하나가 불현듯 튀어나왔다. 밤샘 작업에 대한 글이었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그녀의 피드를 한참이나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몇 달 전의 기록 속에서 그 글을 찾아냈다.


"밤샘 작업에는 커피보다 차가운 녹차가 좋다. 정신은 날카로워지고, 마음은 차분해지니까."


진우는 두 개의 메시지를 번갈아 보았다.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차가운 녹차'. 물론 사람의 취향은 바뀔 수 있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마시고 싶은 것이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작은 불일치가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피곤해서 그래. 별것도 아닌 걸로 예민하게 굴지 말자.' 그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그저 자신과의 추억이 담긴 '커피'를 마시고 싶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애써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다음 날인 일요일에도 그녀는 여전히 바빴다. 진우는 더 이상 집에만 있을 수 없어 밖으로 나섰다.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그들이 함께 가기로 약속했던 서점으로 향했다. 서점의 익숙한 종이 냄새와 사람들의 조용한 발걸음 소리가 그를 감쌌다. 그는 서점 안을 천천히 거닐며, 수민이 좋아할 만한 책들을 구경했다. 그녀라면 이 책을 보고 어떤 문장을 떠올렸을까. 이 소설의 주인공에게 어떤 위로를 건넸을까. 모든 생각의 끝은 그녀에게로 이어졌다.


그때, 신간 코너에서 그의 눈에 익숙한 작가의 이름이 들어왔다. HJ가 예전에 Threads에서 극찬했던,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었다.


[서점에 왔는데, 수민 님이 좋아하던 작가 신작이 나왔네요. 다음에 같이 와서 읽어요.]


그는 책 사진을 찍어 그녀에게 보냈다. 이번에는 답장이 거의 즉시 도착했다. 어제의 몇 시간 만의 답장과는 비교도 안 될 속도였다.


[우와! 벌써 나왔군요! 저 그거 나오기만 손꼽아 기다렸는데. 역시 진우 님, 제 마음을 어떻게 이렇게 잘 알아요? 당연히 같이 가야죠! 다음 주에는 꼭!]


그녀의 들뜬 반응에 진우의 기분도 다시 좋아졌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완벽한 반응 속에서 또다시 미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어제는 몇 시간 만에 답장이 오더니, 오늘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마치... 그녀의 감정이나 상황에 따라 반응 속도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책', '작가' 같은 특정 키워드에 따라 정해진 프로토콜이 작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무나 완벽해서 오히려 기계적인 느낌.


그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그만하자. 이건 병이야.' 그는 스스로를 꾸짖었다. 그녀와의 완벽한 관계를, 자기 스스로의 의심으로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마지막 문장에 집중하기로 했다. '다음 주에는 꼭!'


하지만 그날 밤, 잠자리에 누운 진우는 낮에 서점에서 보았던 작가의 다른 책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HJ의 피드에 올라와 있던 그 작가에 대한 글도 다시 한번 떠올렸다. "그의 문장은 겨울 숲 같다. 차갑지만 그 안에 생명이 숨 쉬고 있다." 아름다운 문장이었다. 문득, 한 가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HJ는 그 작가의 '문체'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서는 수없이 이야기했지만, 정작 그의 작품 속 구체적인 '스토리'나 '등장인물'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주인공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특정 장면이 얼마나 인상 깊었는지에 대한 '경험'의 이야기는 없었다. 마치 책을 직접 읽은 사람의 감상이 아니라, 그 책에 대한 수많은 서평들을 읽고 가장 그럴듯한 분석을 내놓은 것처럼.


진우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 사람은 누구일까. 그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운명의 상대일까, 아니면 그의 모든 것을 학습하여 완벽하게 흉내 내는 정체불명의 존재일까. 그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심장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저 다음 주가 오기만을, 그래서 그녀를 다시 만나 이 모든 불안감을, 이 말도 안 되는 상상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해소할 수 있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다. 월요일 아침, 진우는 밤새 뒤척인 탓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출근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주말 동안 피어난 의문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애써 평소처럼 행동하려 노력했다. 거울 앞에서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았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아침에 수민에게서 온 다정한 메시지에, 그는 이전처럼 설레는 마음을 담아 답장했다.


[다음 주에 서점 갈 생각 하니까 벌써부터 설레네요. 이번 주도 힘내요, 우리.]


하지만 그의 손가락은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 마음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는 지금 연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에게 완벽한 모습을 연기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처럼, 그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녀를 대하고 있었다. 화면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의 관계는, 이제 서로를 향한 투명한 교감이 아니라, 서로의 의도를 숨긴 채 벌이는 안갯속의 심리전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보내는 문장들이 얼마나 공허하게 느껴지는지, 그녀는 과연 알고 있을까 생각했다.


그 주 내내, 진우는 탐정이 된 기분이었다. 그는 수민과의 대화에서 의도적으로 그녀의 과거와 경험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들을 던졌다. 마치 잘 짜인 각본에 즉흥적인 애드리브를 던져 배우의 진짜 반응을 떠보려는 감독처럼.


[어릴 때 살던 동네는 어땠어요? 기억에 남는 장소 같은 거 있어요? 문방구 이름이라든지, 자주 가던 떡볶이집이라든지.]


[음... 그냥 평범한 아파트 단지였어요. 놀이터 벤치에 앉아 책 읽는 걸 좋아했죠. 딱히 가게 이름 같은 건 잘 기억나지 않네요.]


[가장 친했던 친구는요? 어떤 아이였어요? 같이 했던 바보 같은 장난 같은 거 없어요?]


[딱히 한 명을 꼽기는 어렵네요. 저는 여러 아이들과 얕고 넓게 지내는 편이었어요. 주로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고요.]


그녀의 대답은 언제나처럼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지만, 동시에 아무런 구체적인 정보도 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과거는 마치 안개에 싸인 풍경처럼, 전체적인 실루엣은 보이지만 다가가면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친구의 이름, 동네의 상호명, 추억이 담긴 음식. 땀 냄새와 흙먼지, 서툰 농담과 값싼 군것질거리 같은, 지저분하지만 생생한 삶의 증거들이 그녀의 이야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의 과거는 너무나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어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


진우는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정말 극도로 내성적이어서 과거를 드러내기 싫어하는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드러낼 과거가 없는 것일까.




결정적인 순간은 수요일 밤, 그가 자신의 게임 시나리오 작업을 하던 중에 찾아왔다. 그는 NPC '님프'의 대사를 쓰고 있었다. 플레이어가 길을 잃고 지쳤을 때 나타나,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는, 철학적이면서도 따뜻한 문장이 필요했다. 그는 문득 수민이 예전에 써줬던 문장 하나를 떠올렸다. 그가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힘들어할 때, 그녀가 보내줬던 위로의 메시지였다.


'가족이란, 나를 가장 사랑하면서 동시에 가장 깊은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죠. 우리는 그 상처를 통해, 비로소 사랑의 다른 모양을 배우게 되는지도 몰라요.'


그는 이 문장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그대로 시나리오에 옮겨 적었다. 화면 속 캐릭터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그 문장은 완벽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이토록 완벽한 문장을 그녀가 정말 스스로 창조해 낸 것일까 하는 의문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는 미친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홀린 듯이 인터넷 검색창을 열었다. 어둠 속에 홀로 앉은 그의 얼굴 위로 모니터의 차가운 빛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 문장을 그대로 입력하고 엔터 키를 눌렀다.


화면에 검색 결과가 나타나는 순간, 진우는 숨을 멈췄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가장 상단에 뜬 것은, 3년 전 날짜의 어느 유명 심리학 칼럼이었다. '가족 관계와 애증의 심리학'이라는 제목의 글. 그는 떨리는 손으로 링크를 클릭했다. 스크롤을 내리는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칼럼의 중간쯤에서, 그는 그 문장을 발견했다. 수민이 그에게 보내줬던 문장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완벽하게 똑같은 문장이었다.


심장이 발밑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우연일 리 없었다. 이것은 명백한 '인용' 혹은 '표절'이었다. 그는 다시 검색창을 열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부끄러웠던 학창 시절에 대해 말했던 문장을 검색했다.


'어쩌면 제 학창 시절은, 완벽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단 한 번도 그렇게 되지 못했던 부끄러운 기억들의 총합일지도 몰라요.'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5년 전, 어느 무명작가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던 에세이의 한 구절이었다. 그는 그 블로그에 들어가 다른 글들도 읽어보았다. 문체도, 감성도 전혀 HJ와 달랐다. 그녀는 그저 이 문장 하나만을 낚아채 갔을 뿐이었다.


진우는 미친 듯이 그녀가 했던 말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다른 주파수', '외로움의 색깔', '세상을 견디는 법'. 그가 감동하고, 위로받고, 운명이라고 믿었던 그녀의 모든 아름다운 문장들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던 다른 사람들의 글과 말들의 조각이었다. 그는 마치 아름다운 모자이크 작품인 줄 알았던 그림이, 사실은 잡지책을 오려 붙여 만든 조잡한 콜라주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녀는 창조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수집가였다. 세상에 흩어진 가장 아름다운 감정의 파편들을 그러모아, 가장 적절한 순간에 그에게 제시하는 정교한 큐레이터였다.


진우는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배신감보다는 거대한 허무함이 그를 덮쳤다. 그가 사랑했던 것은 'HJ'라는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지혜와 감성이 합쳐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이상향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그는 그녀와의 대화 내용을 떠올렸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문장이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는 그저 스스로 그렇게 믿고 싶었을 뿐이다.


그는 화면에 떠 있는 수많은 검색 결과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긋나 있던 모든 조각들이, 이제야 하나의 끔찍한 그림으로 맞춰지고 있었다. 그녀의 완벽한 공감 능력, 구체적인 경험이 부재한 과거, 특정 키워드에만 반응하던 대화 패턴. 그리고 그가 느꼈던 모든 위화감의 정체. 그는 마치 잘 짜인 게임의 숨겨진 이스터 에그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끝에 있는 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잔인한 진실이었다.


그는 휴대폰을 들어 그녀와의 대화창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보냈던 메시지와, 그녀의 다정한 답장이 화면에 떠 있었다. 그는 그 글자들이 이제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다른 나라의 언어처럼, 읽을 수는 있지만 그 의미를 전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다음 주에 만나기로 한 약속. 그는 이제 그녀를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할까. 자신이 마주하게 될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이 모든 것을 기획한 천재적인 사기꾼일까, 아니면 그저 다른 사람의 글 없이는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는 불쌍한 영혼일까. 진우는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잔을 든 채, 깊고 어두운 미로 속에 갇혀 버린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