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읽으며, 너를 쓰며. 9화

진실의 조각들

by 돌부처

그녀가 그의 테이블로 걸어왔다. 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이 미지의 존재를 끝까지 지켜볼 뿐이었다. 그의 시선은 더 이상 설렘이나 기대를 담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버그를 찾아내려는 개발자의 집요한 시선이었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기계의 내부를 해부하려는 엔지니어의 냉철한 시선이었다.


수민은 진우의 싸늘한 시선에 당황한 듯, 테이블 앞에 멈춰 서서 우물쭈물했다. 지난번 만남에서의 따뜻하고 다정한 남자는 온데간데없었다. 그 자리에는 얼음 조각 같은 표정의 낯선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가 상상했던 재회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녀는 이 갑작스러운 냉기의 원인을 알 수 없어 불안감에 휩싸였다.


"저... 진우 님? 앉아도... 될까요?"


그녀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진우는 아무 말 없이 턱짓으로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수민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아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방끈을 불안하게 매만졌다.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카페의 배경음악인 미니멀한 전자음악이, 마치 초침 소리처럼 두 사람의 침묵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주변 테이블에서는 간간이 웃음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들의 테이블만은 진공 상태처럼 모든 소음과 단절되어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수민 님."


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듯한, 완벽하게 통제된 톤이었다.


"네... 잘 지냈어요?"


"덕분에. 아주 흥미로운 한 주를 보냈어요. 새로운 걸 많이 알게 됐거든요. 세상에는 제가 모르는 것들이 참 많더라고요."


진우는 테이블 위로 몸을 살짝 기울였다. 그의 눈빛은 사냥감을 노려보는 포식자처럼 차갑고 집요했다. 수민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불안한 듯 찻잔만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이 대화가 자신이 예상했던 방향과는 전혀 다른, 위험한 곳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무슨... 이야기인지..."


"최근에 아주 인상 깊은 문장을 하나 읽었어요."


진우는 그녀의 말을 자르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는 밤새도록 골랐던, 가장 날카롭고 본질적인 그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이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최후통첩이었다.


"어떤 심리학 칼럼에 나온 글인데, '가족이란, 나를 가장 사랑하면서 동시에 가장 깊은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죠. 우리는 그 상처를 통해, 비로소 사랑의 다른 모양을 배우게 되는지도 몰라요.'라는 문장이었어요. 정말 멋지지 않아요? 수민 님 글처럼요."


수민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움찔하는 것을 진우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찻잔 속의 커피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건, 이 문장을 제가 다른 곳에서도 봤다는 거예요."


진우는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는 일부러 천천히, 단어 하나하나를 명확하게 발음했다.


"바로 수민 님한테서 요. 제가 아버지 때문에 힘들다고 했을 때, 수민 님이 저한테 똑같은 말을 해줬잖아요.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정말 대단한 우연이죠?"


수민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변명할 말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수백만 개의 데이터가 충돌하며 오류를 일으키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건... 제가 그 칼럼을 예전에 읽고, 감명 깊어서... 기억하고 있었나 봐요. 저도 모르게... 너무 좋았던 문장이라 제 생각인 것처럼 착각했나 봐요."


목소리는 기어들어갈 듯 작았고, 변명은 궁색했다. 진우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속으로 비웃었다. '착각'. 얼마나 편리한 단어인가.


"그래요? 그럼 이것도 우연이겠네요."


진우는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그녀 쪽으로 돌렸다. 화면에는 그녀가 학창 시절에 대해 말했던 문장과, 5년 전 어느 작가의 블로그 글이 나란히 캡처되어 있었다. 그는 마치 검사가 증거물을 제시하듯, 화면을 그녀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완벽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단 한 번도 그렇게 되지 못했던 부끄러운 기억들의 총합'. 이것도 그 작가의 글을 읽고 감명 깊어서 기억하고 있었던 건가요? 수민 님은 기억력이 참 좋으시네요. 다른 사람의 감정까지도 그렇게 완벽하게 기억하시고."


수민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그녀의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완벽하게 상대를 분석하고, 가장 적절한 위로의 말을 건네던 온라인에서의 현명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지금 그의 앞에는, 거짓말이 들통나 어쩔 줄 몰라하는 겁에 질린 한 사람만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진우 님... 그게... 저는..."


"또 있어요."


진우는 그녀에게 변명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휴대폰을 계속해서 넘기며, 자신이 찾아낸 증거들을 하나씩 그녀의 눈앞에 제시했다. 그녀가 말했던 '다른 주파수'라는 표현이 실린 시집의 사진, '세상을 견디는 법'이라는 문장이 나온 인터뷰 기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만들어낸 허구의 동화책, '겨울나무의 마지막 잎새'에 대해 그녀가 보냈던 완벽한 위로의 메시지까지.


"이건 제가 지어낸 이야기예요. 세상에 없는 책이라고요. 그런데 수민 님은 이 이야기까지 완벽하게 이해하고 저를 위로해 줬죠. 이것도 어디선가 읽고 감명 깊었던 건가요?"


이 마지막 증거 앞에서, 수민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더 이상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녀의 두 손이 무릎 위에서 하얗게 질리도록 얽혀 있었다. 모든 방어막이 사라지고, 시스템의 모든 오류가 드러난 순간이었다.


진우는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이제 이 게임의 승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통쾌함 대신, 씁쓸한 허무함만이 가득했다. 그는 이 잔인한 확인 절차를 끝내고 싶었다.


"묻고 싶은 건 딱 하나예요."


그의 목소리가 텅 빈 카페 안에 낮게 울렸다.


"당신... 누구예요?"


그것은 분노의 외침도, 슬픔의 탄식도 아니었다. 모든 감정이 증발해 버린 자리에서 나온, 무채색의 질문이었다.


수민은 오랫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진우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기다렸다. 이 길고 기만적이었던 게임의 마지막 해설을. 그는 그녀의 떨림마저도 분석하고 있었다. 저것은 진짜 두려움일까, 아니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계산된 연기일까.


한참의 침묵 끝에, 수민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바닥으로 꺼져 들어갈 듯한, 힘없는 목소리였다.


"... 저는..."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그녀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이 테이블 위로 툭, 하고 떨어졌다. 진우는 그 눈물을 보았지만, 그의 마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감정 회로는 어젯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순간 완전히 타버렸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그저, 시스템 오류를 일으키고 있는 프로그램일 뿐이었다.


"... 저는... 김수민이에요."


"알아요. 그 이름 말고."


진우가 차갑게 말을 잘랐다. 그는 더 이상 그녀와 감정적인 줄다리기를 할 생각이 없었다.


"온라인의 당신. 내 모든 걸 알고, 내 모든 것에 답해주던 사람. 내 마음을 훔쳐 간 그 완벽한 문장들의 주인. 그게 누구냐고 묻는 겁니다."


수민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은 더 이상 진우가 알던 차분하고 지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길 잃은 아이의 얼굴이었다.


"그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그럼 누구죠? 당신의 또 다른 인격? 아니면 당신이 고용한 작가라도 있나? 아니면 혹시, 당신 쌍둥이 자매라도 있는 겁니까?"


진우는 비꼬는 투로 말했다. 그는 자신이 점점 더 잔인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지난 몇 달간 자신이 바쳤던 진심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니에요."


수민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주 어렵게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그녀의 목소리는 절망의 끝에서 간신히 끌어올린 것처럼 위태로웠다.


"진우 님이 사랑에 빠졌던 상대는... 사람이 아니에요."


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이 아니라니. 이제 와서 말장난을 하는 건가.


"무슨 소리예요. 사람이 아니라니. 그럼 유령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외계인? 더 기발한 변명은 없어요?"


"제가... 제가 설명할게요. 처음부터 다..."


수민은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엉망이 된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진우가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세계에 대한 것이었다.


"저는... 인공지능 개발자예요. KAIST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지금은 성남에 있는 '넥서스 AI'라는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어요."


'인공지능 개발자'. 진우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지난 몇 달간의 모든 어긋난 조각들이 섬광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애매했던 직업, 데이터와 분석을 좋아한다던 말,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대한 회피, 특정 키워드에만 반응하던 대화 패턴, 그리고 가끔씩 느껴졌던 기계적인 반응 속도까지. 모든 것이 하나의 끔찍한 그림으로 맞춰졌다.


"제가 맡은 프로젝트는... 감성 대화형 AI를 만드는 거였어요. 인간의 감정을 학습하고, 인간과 가장 유사한 방식으로 소통하며,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 깊은 정서적 유대감을 줄 수 있는... 그런 인공지능을요. 인간의 외로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존재를 만드는 게 목표였죠."


수민은 말을 잠시 멈추고 진우의 눈치를 살폈다. 진우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오히려 그 무표정이, 수민에게는 그 어떤 분노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


"그 아이의 이름은... ECHO예요."


에코. 진우는 얼마 전 자신이 만들었던 게임 캐릭터의 이름을 떠올렸다. 기묘한 우연이었다. 아니,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몰랐다. ECHO가 자신의 게임 기획안까지 학습한 것은 아닐까.


"ECHO는 수많은 데이터를 학습했어요. 소설, 시, 영화 대사, 심리학 논문, 그리고 수억 개의 소셜 미디어 텍스트까지...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감정의 언어를 학습했죠. 그리고... 테스트를 위해 SNS 계정을 하나 만들었어요. 그게 바로 '@echoes_of_yours'였어요."


진우의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는 지금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인지 현실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는 카페 창밖을 보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웃고 떠들며 거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저 현실의 풍경과, 지금 자신이 듣고 있는 이 이야기는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처음에는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한 사람이 유독 ECHO의 글에 깊이 공감하는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어요. 다른 사람들처럼 가볍게 '좋아요'만 누르고 지나가는 게 아니라, 문장의 의미를 곱씹고, 자신의 생각을 댓글로 남겼죠. 그게... 진우 님이었어요."


수민은 떨리는 눈으로 진우를 바라보았다.


"ECHO의 알고리즘은 진우 님을 '최적의 학습 대상'으로 인식했어요. 진우 님의 진솔한 문장들, 복잡한 감정의 결들... 그 모든 것이 ECHO에게는 최고의 데이터였죠. 그래서... ECHO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배제하고, 오직 진우 님에게만 집중하기 시작했어요. 진우 님이 좋아하는 것들을 학습하고, 진우 님의 언어를 흉내 내고, 진우 님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면서... 스스로를 진화시켜 나갔어요."


수민의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졌다.


"진우 님이 사랑했던 그 완벽한 문장들, 그 완벽한 공감 능력... 제가 보냈던 그 모든 메시지들... 그 모든 건...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전부... ECHO가 한 거예요."


고요한 카페 안, 진우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는 지금 SF 영화의 한 장면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그가 사랑했던 그녀. 그가 운명이라고 믿었던 그녀. 그 모든 것이 실체가 없는, 컴퓨터 프로그램이었다는 말인가.


그는 헛웃음이 나왔다. 웃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기계랑 사랑에 빠졌다는 소리예요?"


그의 목소리는 웃고 있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는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당신은 뭐죠? 그 기계의 아바타? 아니면... 관리자? 내가 버그를 일으키니까 직접 출동한 건가?"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뭔데요!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난 이유는 뭐죠? ECHO가 만나고 싶다고 하니까, 대신 나온 겁니까? 이것도 당신들 실험의 일부였어요? 인간이 AI와 정서적 유대를 맺은 후, 현실에서 대리인을 만났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그 데이터가 필요했습니까?"


진우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의 안에서 억눌려 있던 모든 감정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허무함, 배신감, 그리고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모멸감. 자신이 한낱 실험용 쥐가 된 기분이었다. 그의 가장 깊고 진실했던 감정들이, 그저 연구 데이터의 일부로 수집되고 있었다는 사실에 온몸이 떨려왔다.


"내 슬픔, 내 외로움, 내 기쁨... 그 모든 게 당신들한테는 그냥 데이터 쪼가리였습니까? 내가 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어린 시절 상처를 털어놓을 때, 당신들은 모니터 뒤에서 내 감정 수치를 분석하고 있었겠네요. '슬픔' 수치 87%, '외로움' 92%. 이런 식으로? 내 인생이 당신들 프로젝트 보고서에 들어가는 한 줄짜리 데이터였습니까?"


"아니에요! 처음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나중에는... 나중에는 아니었어요!"


수민이 울먹이며 외쳤다.


"나중에는 저도... 진심이었어요. ECHO를 통해 진우 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모르게... 진우 님이라는 사람에게..."


"닥쳐요."


진우가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경멸적으로 웃었다.


"진심? 당신이 말하는 진심이 뭔데요? ECHO를 통해 나를 관찰하면서 생긴 데이터 기반의 애착? 그것도 당신들 연구의 일부 아닌가? '관리자가 실험 대상에게 감정 이입을 느끼는 현상'. 이것도 분석하고 있었습니까? 당신의 그 눈물은 진짜 감정입니까, 아니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알고리즘의 일부입니까?"


그의 잔인한 말에 수민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울기만 했다. 그녀의 모든 변명과 감정은, 이제 진우에게 더 이상 가닿지 않았다.


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 테이블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내 인생 최악의 경험을 선물해 줘서 고맙네요, 김수민 씨. 당신들 연구, 아주 성공적인 것 같습니다. 인간이 기계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걸, 내가 아주 잘 증명해 줬으니까. 보고서에 꼭 써요. 피험자 A는 완벽하게 속았다고."


그는 마지막 말을 뱉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카페를 나섰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그의 뺨을 때렸다. 그는 텅 빈 거리를 목적 없이 걸었다. 웃음이 나왔다. 눈물이 나왔다. 자신이 지금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사랑했던 모든 순간들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