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 다니는 시한폭탄

by 돌부처

"오늘 팀장님 출근하실 때 표정 어땠어요? 저 지금 결재판 들고 들어가야 하는데 괜찮을까요?"


오전 8시 50분, 사내 메신저 창에 조심스레 올라온 막내 사원의 이 한 줄은 하루의 운명을 결정짓는 일기예보와 같습니다. 탕비실 커피 머신 앞에서 마주친 팀장님의 미간에 주름이 얼마나 깊게 패어 있는지,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치는 동작이 얼마나 신경질적이었는지, 심지어 모니터를 바라보며 내뱉는 한숨의 길이에 따라 부서 전체의 공기가 얼어붙거나 녹아내립니다.


어제는 분명 똑같은 보고서를 보고 "역시 이 대리가 감각이 있어"라며 호탕하게 웃어넘겼던 상사가, 오늘은 아침부터 어딘가에서 기분이 상해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회사는 놀이터가 아니야! 이딴 걸 기획안이라고 가져왔어?"라며 서류를 집어 던집니다. 업무의 방향성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상사의 '현재 심기'만이 모든 결재와 피드백의 유일한 기준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감정 폭군'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자신의 변덕스러운 감정선을 통제하지 못하고, 그 거친 감정의 파도를 고스란히 팀원들에게 쏟아냅니다. 이 공간에서 '기분'은 곧 '태도'가 되고, 태도는 어느새 절대적인 '오피스의 헌법'으로 군림하게 됩니다.




이 끝을 알 수 없는 감정 폭군들의 횡포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중문화의 은유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편집장 '미란다 프리슬리(Miranda Priestly)'를 떠올리게 합니다.


미란다가 출근한다는 전갈이 사무실에 떨어지는 순간, 런웨이라는 패션 잡지사의 모든 직원들은 무시무시한 허리케인을 대비하는 사람들처럼 패닉에 빠집니다. 납작한 플랫 슈즈를 신고 있던 직원들은 다급히 하이힐로 갈아 신고, 책상 위를 치우며, 그녀의 눈에 거슬리지 않기 위해 숨죽입니다. 그녀의 신경질적인 미소 한 번, 싸늘한 눈빛 한 번에 수십 명의 생가지가 꺾이고 새로운 트렌드가 뒤집힙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감정 폭군들은 미란다 프리슬리처럼 압도적인 천재성이나 날카로운 심미안으로 패션계의 판도를 바꾸는 업계의 1인자가 치르는 '결함'이 아닙니다. 현실의 그들은 그저 자신의 스트레스와 불쾌감을 세련되게 다루는 법을 배우지 못한, 지극히 평범하고 미성숙한 성인일 뿐입니다.


오히려 현실의 감정 폭군들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에 가깝습니다. 기분이 좋을 때는 팀원들에게 커피를 돌리고 농담을 던지며 한없이 관대한 '좋은 선배' 코스프레를 하다가도, 외부 회의에서 까이거나 개인적인 기분이 틀어지는 순간 이성을 잃고 폭주하는 '하이드'로 돌변합니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웃고 농담을 던지며 팀원들의 정신을 산산조각 냅니다. 이 끔찍한 온도 차이는 폭언 그 자체보다 훨씬 더 큰 후유증을 조직에 남깁니다.




인간의 두뇌는 예측 가능한 고통보다 '예측 불가능한 스트레스'에 노출되었을 때 가장 빠르고 심각하게 파괴됩니다. 감정 폭군이 지배하는 부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뢰밭이 됩니다. 실무자들은 업무 본연의 목표나 성과를 고민하는 대신, '어떻게 하면 오늘 팀장님의 기분을 건드리지 않을까?'라는 소모적인 방어 기제에 뇌의 리소스를 90% 이상 낭비하게 됩니다.


더욱 기만적인 사실은, 이 감정 폭군들이 아무 데서나 분노를 터뜨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본부장이나 임원들 앞에서는 꼬리 치는 강아지처럼 온화하고 이성적인 사람인 양 행동하다가, 자기의 통제력 안에 있는 부하 직원들에게만 사나운 맹수처럼 돌변합니다. 이를 '치환된 공격성'이라고 부릅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듯, 상위 권력자나 외부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저항할 수 없는 약자인 부하 직원이라는 '안전한 감정 쓰레기통'에 쏟아버리는 비겁한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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