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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군 Dec 12. 2020

바이러스 앞에 드러난 종교의 민낯

위기 상황에서 보인 성직자의 도피, 탐욕, 일탈

1347년 10월,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시작된 흑사병은 1348년 3월에 피렌체를 덮쳤다. 흑사병은 순식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정치, 종교, 경제, 문화 등 사회 전 분야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는 르네상스 촉발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의 역사학자이자 작가인 에곤 파리델(Egon Friedell, 1878-1938)은 저서 ‘근대 문화사’에서 흑사병이 터진 1348년을 ‘근대 인간을 수태한 해’로 평가했다고 한다.


사실 흑사병은 1348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348년 이후에도 1495년까지 피렌체에만 여러 번 크고 작은 규모의 흑사병이 발생했다. 이렇게 역병이 터지면 예나 지금이나 사회 전반에 걸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이들의 노력이 이어진다. 당시 영향력이 컸던 종교 역시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교회의 대응은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다.


하느님의 천벌, 마귀의 시험


여러 연구를 살펴보면 교회는 흑사병을 인간들을 회심하게 하려는 신의 회초리로 보았다. 그래서 금욕적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신의 분노를 풀기 위해 각종 종교 행위가 늘어난다. 


흑사병이 위세를 떨치자 교황청을 비롯해 각 지역의 종교기관들은 총력을 기울인 종교집회들을 통해 하느님의 도움과 구원을 간절히 호소했다.(박흥식, <흑사병과 성인 공경: 성 로쿠스 현상을 중심으로> 서양사연구 제61집)


교회는 종교 집회와 함께 고해성사도 적극 권장하며 죄를 뉘우치라고 했다. 하지만 중세였던 점을 고려하더라도 이런 대규모 집회와 일대일 고해성사로 인해 전염병이 더 확산된 것은 분명했다. 


이런 시대가 되면 종말론을 주장하는 집단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중에는 현재의 세상이 멸망하고 천년왕국이 세워질 거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신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스스로 채찍질을 했다. 그래서 이들을 ‘채찍질 고행단(Flagellants)’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들의 포교 활동은 무리 지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이루어졌다. 이 역시 흑사병 전파에 일조한다. 이후 채찍질 고행단이 점점 혁명성을 띄게 되자 교황청은 이들의 활동을 금지한다.

피렌체 오르산미켈레 교회의 성모 마리아.  병을 고쳐준다는 전설이 있어 역병이 돌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도피, 고삐 풀린 탐욕, 일탈 행위와 범죄


흑사병은 성직자라고 해서 피해 가지 않았다. 수많은 성직자들이 목숨을 잃었고 교회 시스템 여기저기 공백이 생긴다. 교회는 부족한 성직자들을 조기에 채워야 했다.


아우구스티누스회는 신입 수사의 기준을 14세에서 11세로 낮추었다가 1385년에 다시 10세로 낮추었다. 다른 수도회는 5세 어린아이도 받아들인다. 그리고 원래 성직자가 되려면 철저하고 엄격한 검증과 시험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흑사병 이후 이런 시스템들은 무너진다. 시험 절차는 지나치게 완화되었고 속임수까지 만연하며 요식행위로 전락한다. 이렇게 충원된 성직자들의 자질 부족은 다시 교회의 타락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불러왔다.


서울대 서양사학과 박흥식 교수는 잉글랜드를 예로 들며 당시 성직자들의 처신을 ‘도피, 고삐 풀린 탐욕, 일탈 행위와 범죄’로 정리했다.


성직자들 중에서도 특히 고위 성직자들은 전염병을 피해 도피하기 급급했다. 슈루즈베리라는 주교는 종교집회를 계속 이어가야 한다면서도 정작 본인은 교구 외곽에 있는 장원에 머물렀다. 그리고 윌리엄 베이트먼 주교는 자신의 교구인 노리치에 흑사병 피해가 극심했던 9개월 동안 일주일도 채 머물지 않았다. 다른 임무를 때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런 시기에 보여줄 행동으로는 적절치 않았다. 물론 고통받는 서민들 곁에서 힘이 되어주던 하위 성직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고위 성직자들의 도피 사례는 많지만 고위 성직자가 이런 하위 성직자들을 찾아가 격려했던 사례는 거의 확인할 수 없다.


게다가 교황 클레멘스 6세는 흑사병을 막기 위한 예배를 핑계로 많은 헌금을 거두어 재산을 축적했다. 이런 금전적 탐욕은 일반 성직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흑사병으로 교구민들이 대거 사망한 곳에서는 더 이상 성직록을 받을 수 없었다. 반면에 성직자가 사망한 교구는 대체 성직자가 절박했다. 성직자들은 이를 이용해 예전보다 몇 배나 비싼 성직록을 요구하며 여기저기 옮겨 다녔다. 캔터베리의 사이먼 이슬 대주교는 흑사병 이후 ‘인류의 고삐 풀린 탐욕’이 성직자의 마음을 타락시켰다며 한탄한다.


성직자들의 일탈과 범죄도 이어졌다. 이 시기 많은 성직자들이 도박, 무기 휴대, 독신 의무 위반 등의 일탈행위를 저질렀다. 무자격 성직자도 판을 쳤다. 독일 쾰른 대주교구에는 14세기 전반 약 50년 동안 사제 서임도 받지 않고 교구를 담당한 사례가 94건에 이르렀다. 성직자의 범죄 역시 후추 절도에서 성범죄까지 다양했다. 한 재판 기록에 의하면 1397년 한 해에만 성직자 43명이 성추행이나 음란 행위로 고소되었다고 나온다.


흑사병 이후


흑사병으로 인해 노동력은 감소했고 임금은 올라갔다. 하지만 교회는 수도원 소유의 토지를 경작하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흑사병 이전으로 되돌리는 법을 제정한다. 게다가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노동자들은 맨발로 쓰레기가 가득 찬 자루를 메고 다른 교인들 앞을 걸어가며 참회하게 했다.


노동 수요가 늘어나다 보니 노동자들은 일요일에도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예배 참석자 감소는 교회의 위신 추락과 수입 감소로 이어졌다. 그래서 교회는 일요일에 일을 하면 처벌하는 교회법을 만든다. 실제로 처벌이 이루어졌고 심지어 파문까지 당하기도 했다.


흑사병 이후 종교의 영향력 약화는 일정 부분 교회 스스로 초래한 것이다. 물론 당시 시대적 특성을 현대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불합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현대에 다시 재현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까지 불합리한 생각은 아닐 것이다.


[참고자료]

박흥식(2016) <흑사병은 도시 피렌체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서양사론 제130호)

박흥식(2011) <흑사병이 잉글랜드의 성직자와 교회에 미친 영향> (서양사연구 44호, 41-82)

박흥식(2008) <흑사병 논고> (역사교육 106, 183-210)

박흥식(2017) <흑사병과 성인 공경: 성 로쿠스 현상을 중심으로> (서양사연구 제 61집)

이필은(2013) <흑사병이 미사 참여에 미친 영향과 교회의 처신> (중앙사론 37, 313-336)

김병용(2007) <중세 말엽 유럽의 흑사병과 사회적 변화> (대구사학 88, 159-182)

서울대학교 중세르네상스 연구소 <중세의 죽음> (산처럼)

에르스트 블로흐 <서양 중세 르네상스 철학 강의> (박설호 옮김, 열린책들)

조반니 보카치오 <데카메론> (장지연 옮김, 서해문집)

스티븐 그린블랫 <1417년, 근대의 탄생> (이혜원 옮김, 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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