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의 아웃사이더(3) 노동자의 삶
피렌체는 13세기에 이미 상당한 부를 축적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증가했다. 피렌체뿐 아니라 이탈리아 북부의 밀라노 역시 크게 성장한다. 피렌체와 밀라노를 비롯한 이탈리아 북부(North Italy 혹은 Central-Northern Italy)는 전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곳 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피렌체의 부는 얼마나 되었을까? 피렌체 정부는 정기적인 세무조사를 벌였는데, 이를 살펴보면 당시 피렌체의 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1427년에 실시한 세무조사 결과인 카타스토 보고서(Catasto report)를 보면 600명 정도가 주요 과세 대상이었다.
금화 11만 플로린 이상의 최상위 부자는 86명, 그 아래에 1500 플로린 이상을 가진 차상위 부자들은 514명이었다. 1 플로린은 현재 가치로 약 80만원 정도로 볼 수 있다. 따라서 11만 플로린은 약 880억, 1500 플로린은 약 12억 정도가 된다. 당시 북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상업도시였던 뉘른베르크(Nuermberg)와 비교했을 때 차상위 자산가의 비중은 9배가 더 많았다.
그리고 이들의 가족을 포함하여 어느 정도 자산이 있는 사람들을 합쳤을 때 상위 고소득자는 1649명이 된다. 당시 4만여 명이었던 피렌체의 인구를 생각한다면 최대 약 4.5퍼센트가 자산가였다고 한다. 이를 보면 피렌체는 다른 도시에 비해 부가 한곳에 집중되지 않고 상대적으로 넓게 분배된 모습을 보여준다.
양정무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를 비롯해 여러 학자들은 이렇게 상대적으로 폭넓게 분배된 자본의 축적이 피렌체에서 건축업과 예술이 활발해질 수 있는 조건 중 하나라고 보았다.
특히 건축은 다른 분야와 달리 많은 인력과 시간, 그리고 자본이 필요하다. 피렌체의 건축업은 13세기부터 활기를 띠었다. 처음에는 정부 주도의 공공건축이 시작되었고 뒤이어 개인건축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런 분위기와 함께 여러 천재 건축가들이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현재에도 아름다운 여러 건축물을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건축은 한두 명의 천재 건축가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수많은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모여야 건물은 완성될 수 있다. 당시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은 여러 책과 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번에는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노동자들의 삶의 수준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유추해 보고자 한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당시 유럽 최고 수준으로 쌓아 올렸던 피렌체의 부는 과연 노동자들에게까지 넘쳐흘렀을까?
노동자들의 실질임금
당시 피렌체 노동자 중에서도 특히 건축업 종사자들에 대한 기록이 공사일지 등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를 바탕으로 여러 학자들이 연구를 진행했다. 14세기 중반 이후 건설현장의 막노동꾼은 약 8~10피치올로를 받았고, 숙련공은 최대 20피치올로까지 받았다.
피치올로(복수형은 피치올리)는 플로린과 달리 은화이며 솔디라고도 부른다. 당시 최저 생계비는 성인 1명 당 하루에 약 2피치올로 정도였다. 노동자들의 임금은 흑사병 직후 잠깐 치솟았고 그 이후 완만하게 상승했다.
뒤에 얘기하겠지만 플로린과 달리 피치올로의 가치는 시간에 따라 변동이 커서 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하기가 어렵다. 1피치올로가 가장 가치가 높을 때는 약 4만 원이었지만, 나중에는 5700원 정도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때문에 이런 노동자의 임금 액수만으로는 그들이 어느 정도 수준의 삶을 누릴 수 있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이를 위해서는 당시 노동자들의 구매력 등을 고려한 실질임금(Real Wage)을 살펴봐야 한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14세기 초부터 물가는 지속적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1450년 정점을 찍은 후 계속 하락한다.
▲ 피렌체와 밀라노의 소비자 물가지수 변동 출처 : Paolo Malanima, <Italy in the Renaissance: a leading economy in the European context, 1350-1550†>, Economic History Review(2018)
▲ 피렌체와 밀라노의 실질임금(Real wage rate) 변동(1310-1630) 흑사병(1348) 이후 1450년을 정점으로 계속하락 했다. 출처 : Paolo Malanima, <Italy in the Renaissance: a leading economy in the European context, 1350-1550>, Economic History Review(2018)
1340년대 이후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올라간 것은 왜 그랬을까? 많은 학자들이 1348년 흑사병(Black Death)을 그 원인으로 꼽는다. 흑사병은 유럽 전체에 극심한 피해를 입혔다. 그 피해란 바로 급격한 인구 감소였다. 피렌체를 비롯한 이탈리아는 인구의 절반 가량이 사망했다. 이는 노동력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한 상황을 만들어 노동자의 임금 상승을 불러왔다.
▲ 이탈리아의 인구 변화 1348년 흑사병 이후 인구가 급감했다.(Tuscany는 피렌체가 속해있는 지역으로 피렌체의 지배를 받았다.) 출처 : Paolo Malanima, <Italy in the Renaissance: a leading economy in the European context, 1350-1550>, Economic History Review(2018)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은 인구밀도가 높은 대도시에 훨씬 더 빨리 퍼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도시 외곽 시골은 피해가 적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흑사병을 피해 시골로 갔다. (보카치오가 쓴 <데카메론>도 젊은 남녀들이 흑사병을 피해 시골로 피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시골에 흑사병의 피해가 적었다는 것은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력이 보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도시 인구가 급감하자 농산물은 수요가 줄고 공급과잉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농산물 가격은 하락한다. 거기에 주거비 역시 내려간다.
흑사병으로 인한 임금 상승과 농산물 가격 폭락으로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크게 올라갈 수 있었다. 노동자의 실질임금 상승이 부의 재분배로 인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죽음에 기인했다는 것이 조금 서글프다. 하지만 이 시기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후 흑사병의 피해가 복구되자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꾸준히 하락한다. 당시 곡식을 재는 단위는 스타이아(staia)였다. 1스타이아는 15킬로그램이다. 1310년 노동자는 자신의 일당으로 밀 0.3스타이아를 구매할 수 있었다. 실질임금이 정점을 찍던 1450년대에는 0.9~1스타이아를 살 수 있을 정도로 올랐지만, 그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한다.
흑사병 피해의 회복과 맞추어 실질임금의 하락 역시 어느 선에서 멈추거나 정체되어야 한다. 하지만 인구가 회복되는 시점에도 실질임금은 계속 떨어진다. 16세기에 들어서 노동자들이 받는 일당으로는 밀 0.1~0.2스타이아 밖에 살 수 없었다. 이는 흑사병 이전보다 낮은 것으로, 한 가정이 아니라 한 개인의 생계를 유지하는 것도 힘든 수준이었다.
낙수를 막는 화폐 시스템
피렌체는 1252년 만들어진 금화 플로린을 기본 화폐로 사용했다. 하지만 플로린은 상류층의 화폐였다. 노동자와 서민들은 피치올로라는 은화를 써야 했다. 플로린과 피치올로는 상호 교환이 불가능한 완전히 다른 화폐였다.
피치올로를 플로린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환전'을 해야 했고, 당연히 환전 수수료를 물어야 했다. 한 나라에서 이렇게 완전히 다른 두 개의 화폐 정책을 사용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특히 무역과 금융업이 중심인 피렌체에서 이런 화폐 정책은 경제적으로 매우 불합리하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렇게 화폐끼리의 상호교환성을 차단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사회 현실이 통합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략) 돈을 쓰는 데도 그런 사회적 분화와 계급성이 확연히 드러나도록 했다.
- 팀 팍스 <메디치 머니> (황소연 옮김, 청림출판, 64쪽)
노동자들은 피치올로로 임금을 받았다. 하지만 세금을 내거나 다른 중요한 일에서는 플로린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1리라(20피치올로)면 1 플로린으로 바꿀 수 있었다. 하지만 사업주들과 부유층들은 자신들의 이득을 높이기 위해 정부에 압력을 가해 피치올로에 들어가는 은 함유량을 여러 번에 걸쳐 줄여 나간다. 인위적으로 피치올로의 가치를 떨어뜨린 것이다.
이 때문에 1플로린에 대한 피치올리의 가치는 1300년대에는 3.5리라(70피치올로), 1500년대에는 7리라(140피치올로)까지 떨어졌다. 임금으로 받는 피치올로의 절대 금액은 같거나 올랐지만 그 가치는 계속 떨어진 것이다.
반면, 상류층이 쓰는 3.56그램의 금화 플로린은 그 가치를 철저하게 관리하여 전 유럽에서 가장 신뢰도가 높은 기축통화의 역할을 할 정도였다. 이런 화폐 분리 정책은 상위 계층의 부가 아래로 내려오지 못하고 계속 거기에 머물게 만들었다. 또한 신분 상승을 원천적으로 막는 시스템이면서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을 갉아먹는 원인 중 하나였다.
부유층의 탈세, 사회 복지의 축소
노동자들의 삶을 괴롭히는 또 다른 원인은 세금이었다. 당시 피렌체인들은 3년마다 자신의 재산을 신고해야 했다. 앞서 말한 카타스토 보고서에 따르면, 1만 171세대가 재산을 신고했다. 이 중 형편이 극히 어려운 2924세대를 제외하고 모든 세대가 전체 재산의 약 0.5퍼센트를 세금으로 냈다.
이 세금이 제대로 걷히고 제대로 쓰인다면 노동자와 서민들에게도 나쁠 것이 없다. 문제는 부자들의 극심한 탈세였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1458년 재산신고서에 메디치 은행 밀라노 지점의 자본금을 3000 플로린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밀라노 지점의 실제 자본금은 1만 3500 플로린이었다. 재산을 30퍼센트 아래로 축소 신고한 것이다.
코시모는 허위신고가 정당한 일이라고 확고하게 믿었다. 세금에 관해서는 그것이 피렌체의 관행이었다.
- 라우로 마르티네스 <메디치가 살인사건의 재구성> (김기협 옮김, 푸른역사, 72쪽)
이렇게 극심한 탈세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국가는 항상 재정난에 시달렸다. 그리고 전쟁이라도 나면 용병을 고용하기 위해 국채를 발행해야 했다.
국채의 이자는 5퍼센트였다. 누군가 국채를 사면 국가가 액면가의 5퍼센트를 이자로 지급하는 것이다. 당시 은행의 정기예금 이자가 8퍼센트였다. 개인으로서는 국채보다는 은행에 넣어두는 것이 더 이득이었다.
국채는 개인뿐 아니라 은행과 같은 기관 투자자들에게도 인기가 없었다. 은행이 누군가에게 대출을 해주고 받던 이자는 12~30퍼센트였다. 국채의 5퍼센트 이자가 성에 찰 리 없었다.
이러다 보니 채권을 팔기 위한 편법이 등장된다. 예를 들어 누군가 100 플로린을 내고 국채를 구입하면 정부는 300 플로린의 국채를 산 것으로 기록해줬다. 실질적으로 채권을 대폭 할인해 준 것이다. 이렇게 되면 채권 구매자는 국채 300 플로린의 5퍼센트인 15 플로린을 이자로 받는다. 하지만 구매자가 채권 구입을 위해 실제 지불한 금액은 100 플로린이었기 때문에 사실상의 이자율은 15퍼센트가 된다.
이런 국채를 살 수 있는 이들은 결국 플로린을 가지고 있는 부자들밖에 없었다. 메디치 가문을 비롯한 부자들에게는 탈세와 더불어 국가 자체가 아주 확실하고 매력적인 수익모델이 되었다.
이렇게 국가가 재정적으로 힘들 때 메디치 가문이 나서서 공공의 이익을 위한다며 거액을 기부한다. 이 덕분에 가문의 이름은 드높아지고 큰 존경을 받게 된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것은 약탈해간 국가의 재산일 수 있다. 탈세와 불법을 저지른 이들에게 국가가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메디치 가문이 정부를 손아귀에 쥐고 흔들 수 있었던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이니 부족한 재정은 결국 세금을 늘려야 했다. 소득에 따른 직접세를 늘리려고 했으나 부자들의 반발이 심했다. 그래서 15세기에 들면서 간접세를 대폭 늘리게 된다.
식료품을 포함해 모든 거래에 세금이 붙었다. 심지어 어부가 잡은 물고기를 팔기 위해 도시로 가져올 때도 세금을 내야 했다. 빵을 만들기 위한 밀을 도시 안에 있는 방앗간으로 옮길 때도 세리가 성문 앞에서 세금을 받았다. 세리들은 성문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을 철저히 조사해 이동하는 모든 물건에 세금을 매겼다. 철저히 조사한다는 것은 몸수색을 포함하는 것이다.
반면에 팔거나 가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인이 직접 먹기 위해 들여오는 것에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재산 규모가 되는 부자들은 대부분 외곽에 자신의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농장에는 각종 가축과 채소, 과일을 키웠다. 주인이 직접 먹는 것이니 이것들을 도시로 들여올 때는 세금이 없었다. 식품을 구입해야 하는 이들은 가난한 도시의 노동자들과 서민들이었다. 결국 이런 노동자들의 주머니는 더 가벼워질 수밖에 없었다.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는 재정 지출을 줄였고, 이는 각종 사회 복지 비용의 축소로 이어졌다. 빈민을 위한 각종 구제 사업을 비롯해 공공 의료와 치안 서비스 등이 줄었고 서민들의 삶은 더 힘들어졌다.
▲ 서유럽 주요 도시의 사회 복지 비용 비율 변동 전체적으로 복지 비용 비율이 줄었지만, 피렌체의 하락폭이 가장 크다. 출처 : Paolo Malanima, <Italy in the Renaissance: a leading economy in the European context, 1350-1550>, Economic History Review(2018)
여기에 15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지중해 무역의 쇠퇴, 1532년 메디치에 의한 피렌체 공화정의 몰락 등도 노동자의 실질임금을 줄이는 데 한몫을 한다.
이렇게 노동자들의 삶은 어려워졌지만 피렌체의 부는 계속 성장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개의 그래프 중에서 오른쪽으로 갈수록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노동자의 실질임금과 사회 복지 비용뿐이다. 그 많은 부는 어디로 갔을까? 피렌체는 과연 그 외적인 아름다움 만큼이나 건강하게 부유한 도시였을까? 현대의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 북부 이탈리아의 GDP 변동 흑사병 이후 떨어졌다가 지속적으로 올라간다. 노동자의 실질임금 변동과 비교해보면 조금 씁쓸해진다. 출처 : Paolo Malanima, <Italy in the Renaissance: a leading economy in the European context, 1350-1550>, Economic History Review(2018)
[참고문헌]
팀 팍스 <메디치 머니> (황소연 옮김, 청림출판)
라우로 마르티네스 <메디치가 살인사건의 재구성> (김기협 옮김, 푸른역사)
양정무 <시간이 정지된 박물관, 피렌체> (프로네시스)
Paolo Malanima <Italy in the Renaissance: a leading economy in the European context, 1350-1550> (Economic History Review(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