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4 플리트비체의 숲을 지나, 바다의 문턱에 닿다

숲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었다.

by 로코라헬

플리트비체의 아침, 숲이 말을 걸다

“고요함이란, 때로는 가장 깊은 대화다.”


어젯밤, 딸과 결의하듯 말했다.

“내일은 아무것도 하지 말자. 그냥 호캉스처럼 지내자.”

그렇게 든 잠이

어찌 된 일인지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눈이 떠졌다.


커튼 사이로 부드러운 빛이 스며들고,
창밖에는 파란 하늘과 짙은 초록 숲이 눈부시게 펼쳐져 있었다.


어제 10km가 넘는 숲길의 여운이
아직 몸 구석구석에 남아 있었지만,
묵직한 피로 속에서도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늦은 아침을 계획했지만
공기 속의 향이 너무 맑아서
그저 머물기엔 아까운 아침이었다.






숲이 내어준 첫 아침


호텔 식당에는 소박하지만 정갈한 아침이 준비돼 있었다.
식탁 위에는 갓 구운 빵과 과일, 치즈가 차려져 있었고
창문 밖으로는 아침 햇살이 숲의 잎사귀 사이로 부드럽게 번져들었다.


뜨거운 커피 한 잔, 그리고 다시 한 잔.
커피 수혈을 마치자,
몸이 서서히 깨어나는 게 느껴졌다.


어제의 긴 여정이 아직 남아 있었지만
따뜻한 커피 향이 피로를 덮어주듯,
묘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제 체크아웃까지 남은 두어 시간,
우리는 어제 미처 다 보지 못한 플리트비체의 풍경을
가볍게 돌아보기로 했다.


오늘만큼은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버스와 보트를 타며,
어제의 걸음에게 조금의 쉼을 주기로 했다.


편안하게, 천천히.
그렇게 이 숲과 호수를 마저 담아가는
우리의 마지막 플리트비체 아침이 시작됐다.




물 위의 길을 따라


첫 번째로 향한 곳은 Veliki Burget.
어제는 걸어서 가로질렀던 그 길을,
오늘은 물 위에서 천천히 바라보았다.




보트가 잔잔한 물살을 가르고 나아갔다.
깊고 투명한 물빛,
그 위로 흔들리는 나무의 그림자,
그리고 바람 한 줄기.


아무 말이 없어도 충분한 순간이었다.


Kozjačka Draga에 닿자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발끝을 따라왔다.
호숫가의 고요는 어제보다 더 짙었고,
빛은 한층 부드러워져 있었다.





숲을 걷는 마음


이 길은 어제의 기억과 오늘의 여유가 겹쳐지는 곳이었다.
걸음마다 전날의 긴장이 묻어나고,
물빛마다 새로이 시작되는 평온이 있었다.


Korana 강을 따라 Novakovića Brod로 향하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제의 우리는 숲을 통과했지만,

오늘의 우리는 숲 속에 머물고 있었다.




플리트비체를 떠나며


나는 문득 , 이 숲이 오래도록 그리울 것 같았다.
정말 이런 감정을 품게 되는 장소가
인생에 몇 번이나 있을까.


숲은 이상할 만큼 내 마음 가까이에 있었다.
그래서 떠나오는 게 쉽지 않았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그 숲을 그리워한다.


그날의 길,
그날의 공기,
그날의 냄새,
그리고 발끝에 달라붙던 진흙길조차도
이상하게 깊게 뜨겁게 떠오른다.


Milanovac 전망대에 올랐다.
플리트비체를 가장 넓게 내려다보며
우리의 발자국과 숨결, 이야기들이
이곳 어딘가에 남아 있기를 바래보았다.

.

셔틀버스를 타고,
우리가 처음 발을 들였던 입구로 돌아왔다.
어제는 걷고 또 걸으며 채웠던 여정을
오늘은 천천히, 조용히 마무리했다.


체크아웃을 마치고
1인당 1.33유로의 관광세를 지불하며
플리트비체를 떠났다.





마트, 여행자의 일상 속으로


플리트비체를 빠져나오자마자,
눈앞에 커다란 마트가 나타났다.
생각보다 규모가 커서 잠시 놀랄 정도였다.


형형색색의 물건들이 진열된 진입로를 따라 걸으니
막 숲을 벗어난 눈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 물비린내와 흙냄새가 가득했던 감각이
순식간에 생활의 냄새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유리병에 담긴 오일과 향신료,
빵 냄새, 세제 향,
현지 사람들의 장바구니가 오가는 소리까지—
이 나라의 주방 살림을 엿보는 듯한 시간이었다.


가끔씩 여행지 안에서도
이곳 사람들의 ‘살아가는 일상’을 들여다보는 일은
나에게 정말 소중한 일정 중 하나다.
그들의 식탁과 생활을 들여다보는 일,

그건 낯선 풍경 속에서 ‘삶의 결’을 배우는 방법이기도 하다.


나는 언제나 이런 마트 구경이 좋다.
낯선 도시의 일상이
살짝 열리는 그 틈이 여행의 온도를 바꿔놓는다.


식재료와 음료, 간식까지 이것저것 모두 담고 나니
총 37.82유로.
꽤 알차게 장을 본 셈이었다.


오늘 저녁은 어디서든,
우리만의 방식으로 채워갈 생각이었다.


여행 중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낯선 도시의 주방에서 요리를 해 먹는 일은
언제나 가장 소박하면서도 특별한 즐거움이다.


크로아티아의 해 질 녘을 배경 삼아
우리의 식탁울 채워갈 생각에
괜히 마음이 들떴다.



레드 스톤(Red Stone)



자다르를 목표로 가는 길,

우리는 중간에 잠시 레드 스톤(Red Stone)에

들르기로 했다.


닌(Nin), 소박한 옛 도시를 가로질러,

그다음은 비르(Vir) 섬으로 이어지는 다리를 건넜다.


그렇게 플리트비체에서 2시간을 달려 도착한 레드 스톤.


붉은 절벽과 바위가 펼쳐진 해안으로,

흙빛과 바다색이 극명하게 맞닿는 독특한

풍경으로 유명하다.


붉게 물든 땅과 푸른 바다가 만들어내는 강렬한 대비,

이곳은 크로아티아의 가장 끝,


육지의 마지막, 바다로 스며들 듯 사라지는 경계라는 사실이 마음을 더 깊게 울렸다.

세상의 끝 같은 이 풍경 앞에서,

한 걸음 더 내디디면 더는 땅이 없는 이곳에서,

여행자의 마음도 잠시 멈추었다.




자다르, 바다의 도시


레드스톤에서 40분을 달려 자다르에 도착했다.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 냄새로 맞아주었다.


미리 찾아둔 무료 주차장

(Free Parking, Ul. Marka Marulića)에 차를 세우고

10분 정도 걸어 올드시티로 향했다.

낮은 건물들 사이로 부서지는 햇빛,
회색 돌담 위에 걸린 국기,
그리고 골목마다 흐르는 바다의 기운.


랜드 게이트(Land Gate)를 통과하는 순간,

시간이 조금 느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문 너머가 자다르의 시작이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노천카페, 기념품 가게, 그리고
‘I ❤️ ZD’라고 적힌 벽면이 자연스레 눈에 들어온다.



자다르의 중심, 성 도나토 교회(St. Donatus Church).
회색빛 돌로 쌓은 원형의 건물과
그 옆으로 솟은 종탑이 푸른 하늘과 나란히 서 있었다.
도시는 오래된 리듬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광장 근처 카페에 앉아
레몬에이드를 한 모금 마셨다.

모든 것이 급하지 않고,

낯선 이방인조차도 잠시 이 도시에 섞여 드는 기분이다.
사람들의 웃음소리, 아이의 자전거 바퀴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소리까지 —


자다르 특유의 고요하고도 평화로운 분위기가

몸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던 순간이다.




바다 피아노, 그 끝의 울림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과 낮게 깔린 구름, 잔잔한 파도.
그리고 그 파도가 닿을 때마다

바다 속에서 울려 퍼지는 깊고 신비로운 소리.


음악이라고 하기엔 너무 자연스럽고,
자연의 소리라고 하기엔 너무 정교했다.


자다르의 바다 피아노는 건축가 니콜라 바실리치(Nikola Bašić)가
전쟁으로 상처 입은 도시의 해안을

새롭게 되살리기 위해 만든 작품이다.


바다 피아노는 단순한 예술 작품이 아니었다.
전쟁으로 상처 입은 도시의 해안이,

다시 사람과 바다를 잇는 길로 되살아난 자리였다.


파도의 울림 속에서,

이 도시는 조용히 회복의 숨을 쉬고 있었다.


계단 아래 숨은 35개의 파이프가
파도의 움직임에 따라 서로 다른 음을 내고,
그 소리가 바다의 호흡처럼 천천히 울려 퍼진다.


바다는 이곳에서 하나의 악기가 되고,
사람은 그 위를 걷는 청취자가 된다.


그 순간, 사람들은 누구 하나 말없이 바다를 바라본다.
바람도, 파도도, 그리고 바다 피아노의 울림도
이 도시의 일부가 되어 흘러간다.





자다르에서 가장 유명한 건 일몰이었다.
바다 피아노 너머로 해가 천천히 내려앉는 풍경,
그걸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그 순간을 남기지 못했다.


크로아티아의 해는 생각보다 늦게 지는 법.
여름의 자다르는 오후 6시가 되어도
여전히 강렬한 햇빛과 한낮의 열기를 머금고 있었다.


뜨거운 돌길과 뙤약볕 아래에서 몇 시간을 더 기다리기엔
체력도, 일정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약 두 시간 반 남짓의 자다르 일정을 마치고
우리는 다음 목적지, 쉐베닉(Šibenik)으로 향했다.



쉐베닉으로 가는 길



쉐베닉까지는 차로 약 한 시간 거리.
창밖으로 바다가 점점 멀어지고,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크로아티아 특유의 풍경이 흘러갔다.


붉은 지붕의 마을, 언덕 위의 초목,
그리고 바다의 잔향이 섞인 공기.
풍경은 단조로웠지만, 그 단조로움이 이상하게 평화로웠다.


도시의 끝을 벗어나자
길은 점점 조용해지고,
햇빛은 차창 너머로 길게 드리워졌다.


우리의 숙소는 쉐베닉에서도 조금 외진 곳에 있었다.

우리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기에
도심에서 약간 떨어진 숙소를 선택하는 편이었다.


대신, 이동의 자유가 있었다.
덕분에 쉐베닉의 골목과 도심 곳곳을
차로 천천히 가로지르며 지나갈 수 있었다.


길을 따라 이어지는 작은 거리들,
잠시 스쳐가는 항구,
그리고 바다 도시 특유의 정취와 오래된 건물들.


도시는 소박했고, 조용했다.
햇빛이 건물 벽을 타고 흘러내리며
어스름한 색으로 변해가는 오후,
그 속에서 쉐베닉은
조용히 하루의 끝으로 향하고 있었다.






쉐베닉의 밤


숙소에 도착하니,

낮 동안의 열기가 막 가라앉은 저녁이었다.


도착한 숙소는 크로아티아의 노부부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1층에서는 전통음식을 파는 작은 레스토랑을 하고,
우리가 묵은 곳은 바로 붙은 3층짜리의 꼭대기층, 별채 같은 공간이었다.


3층이라 했지만 층고가 높아
창문을 열면 도시 위로 시야가 훤히 트였다.

주방 창으로 고개를 내밀자

층고가 높아서인지 마치 라푼젤이 머리를 늘어뜨릴 것 같은 창 같았다.

딸과 눈이 마주치자, 괜히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좀 낡고 현대적이거나 세련된 숙소는 아니었지만,
쉐베닉에서 하루 묵어가기엔 더없이 포근하고 경제적이었다.


무심한 듯 다정한 안주인의 인사와
햇살이 쏟아져 들어올 것 같은 주방 창,
그 모든 것이 여행의 피로를 천천히 풀어주었다.



플리트비체를 떠나며 들렀던 마트에서 사온 재료들을
하나씩 꺼내 주방 위에 올려두었다.
형형색색의 포장지와 낯선 브랜드 이름들,
그 사이로 느껴지는 이 나라의 생활 냄새.


생각보다 근사한 저녁이 완성됐다.
괜히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더 그리워졌다.


여행을 떠난 지 어느덧 다섯째 날.
낯선 도시의 밤은 때때로 마음의 여백을 건드린다.


길 위의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가끔은 이유 없이 마음이 내려앉기도 한다.


그건 아마도 ‘비워짐’이 주는 또 다른 형태의 충만일지도 모른다.


익숙한 공간과 사람들로 채워졌던 일상이 비워지면,

그 빈자리를 낯선 풍경과 새로운 감정이 천천히 채워간다.
그래서 때때로 쓸쓸함이 찾아와도,
그 안에는 묘한 평온이 깃든다.


칵테일 한 잔을 곁들이고,
못다 한 이야기들을 이어갔다.
음악을 틀고, 작게나마 우리만의 파티를 준비했다.


그렇게 쉐베닉의 밤은 천천히 깊어갔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늘 마음 한편을 채우는 가족들이 생각났다.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익숙한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 구석이 조금씩 차올랐다.


그렇게 우리는 오늘을 천천히,
그러나 따뜻하게 마무리했다.







여행 노트


플리트비체에서 쉐베닉까지

숲의 여운을 품고, 바다로 향한 하루

1. 플리트비체 → 레드 스톤 (Red Stone)

거리: 약 150km
소요: 약 2시간
도로: 국도 + 해안도로

Tip
플리트비체에서 남쪽으로 향하면 산악 지형을 벗어나며 도로의 시야가 트인다.
길이 굽이치지만, 풍경이 바뀌는 리듬이 느껴진다.
중간에 닌(Nin)과 비르(Vir) 섬을 연결하는 다리를 지나며, 바다가 서서히 시야에 들어온다.

숲의 냄새가 사라지고, 대신 짠내가 코끝을 스친다.
붉은 대지와 푸른 바다가 맞닿는 레드 스톤의 풍경은
육지의 끝, 바다의 시작처럼 다가왔다.


2. 레드 스톤 → 자다르 (Zadar)

거리: 약 30km

소요: 약 40분
도로: 해안 국도

Tip
자다르 올드타운 진입 전, 외곽 무료주차존

(예: Ul. Marka Marulića)을 이용하면 도심 접근이 편리하다.
구시가지 내부는 차량 진입이 제한되어 있으니 도보 이동을 염두에 두자.

좁은 골목과 회색빛 돌담, 오래된 창틀,
그 위로 펄럭이는 크로아티아 국기.
바다 피아노(Sea Organ) 앞에서,
파도의 울림 속에 숨은 도시의 회복력을 들었다.
전쟁으로 상처 입은 해안이,
이제는 바다와 사람을 잇는 음악의 자리로 다시 숨 쉬고 있었다.


3. 자다르 → 쉐베닉 (Šibenik)

거리: 약 90km
소요: 약 1시간
도로: 해안도로, 중간 구간 고도차 있음

Tip
석양 무렵 출발하면 달마티아 해안의 붉은 지붕이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
도로를 따라 펼쳐지는 마을 풍경이 창가에 흐르듯 지나간다.

바다가 점점 멀어지고,
언덕 위로 초목이 번지며 또 다른 도시의 결이 나타난다.
쉐베닉의 도심을 천천히 가로지르며,
오늘 하루의 끝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하루의 결


플리트비체의 숲을 떠나
붉은 땅과 푸른 바다가 맞닿은 해안을 지나
바다 도시 쉐베닉에 닿은 하루.

숲의 고요는 여전히 마음에 남았고,

바다의 바람은 새로운 결을 더했다.


걷고, 달리고, 멈추었던 그 모든 시간의 끝에서

우리는 한층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음 날의 바다를 향해 잠들었다.



여행 시기: 2025년 5월

기록: 여행하는 로코라헬






다음 이야기


EP.05 해안선을 따라 흐르는 하루, 쉐베닉에서 트로기르로

쉐베닉 → 프리모슈텐 → 스플리트 → 트로기르


아침 창문을 두드린 건 햇살이 아니라 폭우였다.
흐린 하늘 아래, 우리는 잠시 멈칫했지만
결국 도로 위로 나섰다.


예상과 달리 바다는 더 가까웠고,
프리모슈텐의 돌길 위로 빗방울이 반짝였다.
그리고 오후, 비가 걷힌 하늘 아래
트로기르의 골목을 걷던 그 시간 —


숲에서 바다로 이어진 여정,
다섯 번째 하루가 그렇게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