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 – 응시의 언덕
칼던 내성 북측, 전략 회의실. 벽은 회색 석재로 둘러싸였고, 반쯤 닫힌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은 방 안을 흐릿하... 자리하고 있었다. 그 안에서 훈련장의 지형이 입체적으로 재생되고, 병사들의 이동 경로가 파동처럼 그려지고 있었다. 리온 하르메드는 상석에 앉아 있었고, 케일란 바레스는 그의 오른편에서 조정 패널을 다루고 있었다. 병참 장교 둘과 기록 담당 참모 하나가 더 자리하고 있었다.
“현재 1차 선발된 병력은 총 104명. 네 개 소대로 분산 배치되어 있습니다.”
케일란이 정리된 서류를 펼치며 말했다.
“이외에 별도로 분류 중인 인원이 1명.”
“17번.”
리온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중얼거렸다. 케일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뮬레이션 장치를 작동시켰다. 입체 지형 위로, 흐름의 잔향이 시간 순으로 되감기기 시작했다. 북측 훈련 구역, 혼란이 극에 달했던 시점의 전장이 재생된다.
“여기입니다. 북측 2D-17 지점.”
케일란이 손끝으로 지점을 짚었다.
“이 시점부터 흐름이 재편됩니다. 지시 없이 병사들이 자발적으로 재정렬되며, 중심은—”
장치 속에서 에일런 브레이트가 병사들 사이를 오가며, 말보다 리듬으로 지시하는 듯한 장면이 반복 재생되었다. 움직임은 분명했지만 과도하지 않았고, 흐름은 오히려 안정되어 있었다.
“흐름을… 조정했다고?”
병참 장교 한 명이 중얼거렸다. 케일란은 분석표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반응률 82퍼센트. 분대 간 위치 조정, 시야 분산, 궤적 간섭 회피. 통제는 없었지만 흐름이 따랐습니다.”
리온은 화면을 조용히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지휘 경험은?”
“없습니다. 전투 기록도 없고, 훈련 성적은 중하위권입니다.”
케일란은 대답하며, 다시 장면을 고정시켰다.
“하지만 흐름 상, 그는 통제보다 ‘유도’에 가깝습니다. 병사들이 따라간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움직일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준 셈입니다.”
리온은 한 손으로 턱을 짚고 잠시 침묵했다.
“지금 우리 주력은 네 개 소대로 편성되어 있다. 각 20~30명. 기동, 방어, 전방 정찰, 후방 보급.”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흐름을 유도하며 움직임을 정돈시키는 병사를, 기존의 정형화된 소대 편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케일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제안드립니다. 정식 소대 편제 외, 별도 실험 운용으로—”
“...‘임시 제5기동소대’.”
리온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정찰이나 전투가 아닌, 흐름 감응 기반 실험조. 초기 임무는 위험 부담 낮게. 반응성과 기록 중심으로 관찰한다.”
“승인하시겠습니까?”
“응시 능력을 갖춘 자가 흐름을 먼저 읽는다면—그는 앞설 수 있다. 지휘도, 전투도, 정찰도 아닌 새로운 움직임의 시작이다. 지금은 임시일지라도, 결국 이름을 갖게 될 것이다.”
케일란은 서류에 간단히 메모하며 대답했다.
“그 이름으로, 기록을 시작하겠습니다.”
시뮬레이션 장치 안에서, 흐름은 천천히 수렴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하나의 이름—‘에일런 브레이트’—가 조용히 맺히고 있었다.
칼던 내성, 북동측 전략 관측실. 벽면 가득한 지도들과 빛바랜 전장 분석 도표, 군사 기록지들 사이에 조용한 기류가 흘렀다. 큰 창은 외곽 고지를 향해 열려 있었고, 바람이 천천히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리온은 창가에 서 있었다. 말없이 서류 하나를 들고 있다가, 누군가 문을 두드리자 고개만 돌렸다.
“들어와라.”
문이 열리고 에일런이 들어섰다. 군복 상의는 단정했고, 걸음은 망설임이 없었지만 조심스러웠다. 방 안의 공기는 다소 무거웠지만, 에일런은 위축된 기색 없이 정면을 응시한 채 멈춰 섰다.
“편하게 있어도 된다.”
리온은 돌아서며 말했다. 그러나 에일런은 의자에 앉지 않았다. 대신, 리온의 시선이 닿는 자리에서 정확히 반걸음 뒤에 섰다. 리온은 그를 바라보았다. 호흡, 시선, 발끝의 무게. 그 어떤 부분도 흔들리지 않았다. 정지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것이 아주 미세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군인이라기보다는, 마치 고요한 강물처럼—방 안의 공기마저 따라 흐르게 만드는 결의 감각이었다. 리온은 아무 말 없이 한 발을 옮겼다. 바닥 돌 틈 사이, 무게중심이 살짝 이동되는 그 순간— 에일런의 자세가 극히 미세하게 바뀌었다. 고개를 돌린 것도, 시선을 옮긴 것도 아니었다. 단지 무게가 실린 쪽 발의 축이 아주 조금 틀어졌다. 그 반응은 너무 작아서, 아마 본인은 의식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리온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 미세한 반응 하나에 짧게 숨을 들이켰고, 이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말을 이었다.
“북측 방어선 무너질 때. 병사 셋이 동시에 움직였던 장면, 기억하지?”
“네.”
에일런의 대답은 간결했다.
“자네가 직접 지휘한 건 아니었지만, 병사 셋이 동시에 움직였고, 흐름이 정돈됐지.
그거—누가 시킨 건가?”
“...아무도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렇게 하는 게 맞을 것 같았습니다.”
리온은 책상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근거는?”
“흐름이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제가 움직이지 않아도, 저쪽으로 틀릴 것 같은 기색이 있었고… 다른 애들도 그걸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지시는 어설펐지만, 움직임은 분명했지. 혼자만 움직인 게 아니라, 따라오는 자도 있었고.”
그는 창밖을 한 번 바라봤다. 멀리, 전장의 훈련 구역 너머 고지의 능선이 보였다.
“흐름이라는 건 대부분 반응이지. 누가 먼저 움직였는지보다, 누가 먼저 감지했는지가 중요해.”
에일런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 말은 이미 그의 안에 들어간 듯했다. 리온은 짧게 말했다.
“임시 제5기동소대. 지휘를 맡게 된다.”
에일런의 표정에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어깨에 얹힌 무게가 조금 더 깊어지는 듯했다.
“당장은 위험한 작전은 맡지 않을 거다. 흐름의 반응, 상황 판단, 적응 능력. 그걸 기록하고 관찰하는 임무부터 시작하지.”
“...알겠습니다.”
리온은 잠시 에일런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부대 내 정식 편제는 아니다. 필요해서 만든 임시 소대고, 형식도 이름도 확정된 건 없어. 하지만 역할은 분명하다. 자네가 먼저 움직이고, 먼저 읽게 될 거야.”
에일런은 짧게 고개를 숙였다. 리온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감정이 없었지만, 손끝에는 약간의 긴장이 남아 있었다. 그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미세한 파동 하나가, 방 안에 스쳐간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정도면 됐다. 나가보게.”
“예.”
에일런은 천천히 돌아서며 문을 향해 걸었다. 그 걸음 역시, 방금 전과 다르지 않았다. 묘하게 일관된 리듬 속에서—방 안의 공기마저 따라 움직이는 듯한 흐름이, 다시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아직 해가 높이 오르기 전, 내성 북문 쪽 주둔지의 천막들 사이로 행정병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용히 걷던 그는 어느 천막 앞에 멈춰 섰다. 안에서는 병사 셋이 장비를 정리하며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17번, 에일런 브레이트."
에일런이 몸을 일으키자, 행정병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봉인된 명령서를 건넸다. 붉은 실이 감겨 있는 작은 봉투였다.
"자네는 제5기동소대의 임시 소대장으로 지명되었네. 명령서 안에 세부 내용이 들어있지만, 중요한 건 이거야." 행정병은 짧게 숨을 고르더니 이어 말했다.
"오늘 오후까지 병력을 자네가 직접 구성해야 한다. 기존 편제 없이 자율 선발이다. 일몰 전까지 명단을 정리해서 전술 상황실에 제출하게. 자세한 건 명령서를 직접 확인하게."
그 말만 남긴 채 행정병은 다른 천막으로 향했고, 에일런은 조용히 봉투를 열었다. 붉은 실을 풀고, 접혀 있던 문서를 펼쳤다. 손글씨와 인쇄가 혼재된 명령서에는 지휘권 부여와 병력 선발, 보고 시각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는 한 줄 한 줄을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글자보다, 그 아래에 흐르는 의도를 읽는 듯한 시선이었다.
몇 시간 뒤, 주둔지는 분주해졌다. 지명된 소대장들은 병사들 사이를 오가며 후보들을 살피고 있었고, 병사들 사이에는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긴장이 감돌았다. 누가 선택될지 알 수 없었기에, 말은 없지만 시선은 끊임없이 움직였다. 에일런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아직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고, 명단을 작성하기 위한 종이조차 꺼내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에서 흐름처럼 흘러가는 기억을 더듬었다. 며칠 전 훈련 마지막 날, 함께 진형을 정비했던 병사들. 말없이 방향을 바꾸고, 동료의 빈틈을 채우던 움직임. 그리고 쉬는 시간, 물을 건넸던 병사. 목마름보다 먼저, 주변을 살피던 기척. 그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 리듬이 다시 느껴졌다. 에일런은 말없이 주변을 돌았다. 그를 따라오는 시선이 있었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그리고 정확하게 기억 속의 병사들을 향해 걸어갔다.
“가빈. 로벤. 다렌… 그리고 에릭.”
에일런은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그들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에일런 쪽을 바라봤다.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누구도 묻지 않았고, 누구도 주저하지 않았다. 잠시 후, 네 사람은 에일런의 옆에 조용히 섰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무언가 시작되었음은 분명했다. 이름 없는 흐름 속에—소대의 형체가, 이제 막 태동하고 있었다.
오후 무렵, 내성 남측의 회의실. 전술 상황실 한편에 간이 회의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지명된 다섯 명의 소대장이 모여 앉아 있었다. 리온이 상석에 앉아 있었고, 케일란이 옆에서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일몰까지 제출된 명단을 기준으로 편성이 확정된다. 편제 방식은 자율에 맡긴다고 이미 전달했을 것이다.”
리온이 조용히 말했다. 케일란이 이어받았다.
“병사 중 일부는 복수의 소대장에게 선발 요청이 들어갔다. 해당 인원은 이 자리에서 직접 조율하겠다. 정리된 명단을 기준으로 판단하되, 상호 협의가 우선이다.”
이 말에 회의실 안의 공기가 살짝 달라졌다. 곧바로 한 소대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저는 바렌을 선발할 생각입니다. 정찰 훈련 중 기민한 판단을 보였고, 제가 직접 관찰했습니다.”
그러자 맞은편 소대장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병사는 제 눈앞에서 응시 반응을 보였습니다. 방어선 복구 당시 제 지시에 가장 먼저 반응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말이 오가며 회의실에는 작지만 팽팽한 긴장감이 형성됐다. 리온은 그들의 논쟁을 조용히 듣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누가 더 오래 봤느냐보다, 누가 더 필요로 하느냐가 중요하다. 설득해라.”
그 말에 따라 소대장들은 병사에 대한 평가지와 기록을 펼치며, 각자 자신의 판단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명확한 전술적 이유를, 또 다른 누군가는 흐름 속 위치에 대한 감각을 근거로 들었다. 케일란은 조용히 전체 명단을 정리하며 중복된 인원에 붉은 줄을 그었다. 회의는 길어졌지만, 각자의 판단은 더욱 분명해지고 있었다. 이제 각 소대의 윤곽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리고 에일런은, 그 가운데 가장 말이 없었지만 누구보다 확고한 흐름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명단을 테이블 앞으로 밀어냈다.
“저는… 다렌, 로벤, 가빈, 에릭을 선발했습니다.”
몇몇 소대장이 고개를 들었다. 그 중 한 명이 말했다.
“에릭? 그 병사는 내 후보 명단에도 있었는데.”
케일란이 고개를 돌려 에일런을 바라봤다.
“선발 이유는?”
에일런은 잠시 말을 고르다가 낮고 또렷하게 말했다.
“훈련 중 그들은 제 지시가 없이도 흐름에 반응했습니다. 그걸 이해한 건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흐름을 잃지 않는 움직임이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회의실 안의 다른 소대장들 또한 명단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케일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해당 인원에 대한 선발은 유지하지. 이견 있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케일란은 붉은 선 대신 옅은 회색으로 에일런의 명단을 구분해 두었다. 리온은 말없이 에일런을 바라봤다. 눈빛은 검증하듯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묘한 수긍이 담겨 있었다. 그 장면은 짧게 지나갔지만, 이후 누군가는 이렇게 기억하게 될 것이다. —처음부터 리온과 케일란의 신뢰를 받은 자는 누구였는가.
다음 날 아침, 내성 외곽의 훈련장. 아직 정식 훈련이 시작되기 전, 모든 병사들에게 일괄 소집령이 내려졌다. 훈련복을 입은 병사들이 넓은 집합지에 삼삼오오 모였고, 간이 단상 위로 리온과 케일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병사들의 웅성임은 곧 조용해졌고, 케일란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지금부터 소대 편성 결과를 발표하겠다."
그의 목소리는 명확하고 일정했다. 병참 장교들이 미리 준비해 둔 명단을 차례로 전달받으며, 케일란은 각 소대별 이름과 배속 인원을 읊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소대까지는 이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 호명되는 병사들은 짧게 대답하거나 고개를 끄덕였고, 주변 동료들이 등을 두드려주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다 마지막, 그 목소리에 잠시 멈칫하는 느낌이 섞였다.
"마지막으로, 임시 제5기동소대."
잠시 웅성임이 일었다. 누군가가 낮게 중얼거렸다. "임시?"
케일란은 망설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소대장: 에일런 브레이트."
다시 작은 파문이 일었다.
"에일런이라고?"
"그 조용한 애가 소대장이야?"
"무슨 특수부대야?"
병사들의 속삭임은 번졌지만, 단상 위의 목소리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소대원: 다렌, 로벤, 가빈, 에릭."
이름을 들은 이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거나,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에일런은 단상 옆 그림자 속에 서 있었고, 그들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곧 이어 막사 재배치 명령이 내려졌다. 각 소대별로 배치된 천막으로 이동하라는 지시와 함께, 병사들은 짐을 챙겨 흩어졌다. 새로 편성된 제5기동소대도 별도 구역으로 안내받았다. 네 명의 병사들이 에일런을 따라 조용히 이동했다.
“별도 막사라니, 대체 뭘 하게 되는 거야?”
“기록 임무라더라. 전투는 아니라는데.”
“그럼 더 무서운 거 아냐?”
그들 뒤로 작게 퍼지는 말들. 에일런은 듣지 못한 듯했지만, 리온은 천막 너머에서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고 있었다. 케일란은 명단을 한 번 더 바라보다가 조용히 시선을 떨궜다. 손끝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머릿속엔 이미 선 하나가 그어지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관측 대상'. 제5기동소대에 배정된 막사는 내성 외곽의 소규모 보조 천막 중 하나였다. 기존의 정규 소대 막사보다 크기는 작았지만, 간이 바닥과 지붕은 새로 교체된 듯 비교적 단정한 상태였다. 천 위로 매달린 낡은 등불이 흔들릴 때마다 내부가 부드럽게 밝아졌다. 먼저 도착한 것은 에릭이었다. 그는 천막 안으로 들어서며 휘파람을 짧게 불었다.
“오, 생각보다 나쁘지 않네. 별도 막사라더니, 의외로 대접받는 느낌인데?”
그는 안쪽 침상에 털썩 앉으며 손등으로 이마를 쓸어넘겼다. 장비 가방은 문 옆에 툭 내려놓았다. 곧이어 들어온 인물은 가빈이었다. 말없이 문을 젖히고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고개만 한 번 끄덕였고, 짐을 조용히 벽 쪽에 붙였다. 에릭은 장난스러운 웃음으로 말을 걸었다.
“어이, 가빈. 말 좀 하라니까 무섭잖아. 여긴 우리밖에 없어.”
가빈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낮고 짧게 말했다.
“…별로 할 말이 없어서.”
그 말에 에릭은 어깨를 으쓱하고 웃었다. 곧 막사 입구가 다시 열렸다. 다렌과 로벤이 함께 들어왔다. 다렌은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며 약간 긴장한 듯 천막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로벤은 익숙하다는 듯 천천히 침상에 앉았다.
“이게 우리가 쓸 곳이야?” 다렌이 작게 중얼였다.
“그래도 다섯 명뿐이라 넓게 쓸 순 있겠네.” 로벤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말은 없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침착하게 주변을 훑고 있었다. 네 사람은 각자의 자리를 잡았다. 말소리는 점차 잦아들었고, 막사 안은 이내 조용해졌다. 그들이 각자 짐을 정리하고 있을 때, 문이 조용히 열렸다. 에일런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고, 모두가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에릭이 먼저 말을 꺼냈다.
“소대장님, 생각보다 늦게 오시네요.”
에일런은 잠시 멈춰 그를 바라보다,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은 없었다. 그는 천막의 가장 안쪽 자리에 가방을 놓고 앉았다. 눈길은 침상보다는 천막 바깥 어둠을 향하고 있었다. 말 한마디 없었지만, 천막 안의 공기에서 흐름이 정돈되기 시작했다. 그건 지시도 아니었고, 통제도 아니었다. 다만, 어느 방향으로든 흘러갈 수 있도록 열어두는 무언의 중심이었다. 밖에서는 다른 막사들의 이야기 소리가 어슴푸레 들려왔다.
“그 소대, 그냥 기록만 한다며?”
“실험 소대래. 상관들도 반신반의 중이라던데.”
“그래도 저 안엔 뭐가 있겠지. 그냥 모으진 않았을 거 아냐.”
막사 안의 네 사람은 그 말들을 듣고도 아무 말 없었다. 어쩌면 그 침묵이, 처음부터 이들을 하나로 묶는 첫 호흡이었는지도 모른다. 조용한 시간이 조금 흐르고,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에릭이었다.
“침상은 생각보다 괜찮은데… 오늘 저녁은 좀 심했다. 콩죽만 주다니.”
로벤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따뜻했잖아. 식지 않은 게 어디야.”
가빈은 짧게 중얼거렸다. “…콩은 단백질이지.”
에릭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자신의 가방을 툭툭 쳤다. “난 차라리 말리는 편이 좋아. 전투보다 소화불량이 더 무서워.”
그가 가방을 열어 안에서 검집을 꺼냈다. “훈련 때 쓰던 건데, 손에 안 맞아서 새로 조정하려고. 다들 무기는 익숙해?”
다렌이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활을 써요. 멀리서 움직임을 보는 게 익숙해서… 근데 여기선 얼마나 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가빈은 자신의 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쓸 수 있을 때 쓰면 되고, 안 되면 손으로 때려야지.”
에릭이 키득 웃으며 다렌 쪽을 향해 말했다. “봐봐, 말은 없지만 실속 있는 분이셔.”
이야기 사이로 잠시 웃음이 흘렀고, 막사의 공기는 약간 느슨해졌다. 대화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 짧은 순간만큼은 긴장이 아닌, 낯설지만 조심스러운 공감의 흐름이었다.
이튿날 오전, 내성 내 전술 통제소 앞. 소대장들에게 보급병을 통해 공지가 전달되었다.
『전 소대장 대상, 신규 보급 장비 지급. 금일 오후 이전 수령 완료 바람. 지급 장소: 병참동 B-3 천막』
임시 제5기동소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에일런은 짧은 지시를 받은 후, 별다른 말 없이 병참동으로 향했다. 내부에는 장비 검수대와 임시 공방이 함께 설치되어 있었고, 그 중 한 켠에서 낮은 망치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천 위로 걸린 조명은 낮빛보다 붉었고, 금속 연기가 천막 안을 흐릿하게 덮고 있었다. 그 속에서, 이안이 있었다.
이안은 에일런을 보더니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바라봤다. 천천히 망치를 내려놓고, 앞치마를 벗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는 무기 하나를 집어 들고, 에일런 쪽으로 다가왔다. 에일런이 다가서자, 이안은 무기를 건네기 직전 손을 멈췄다. 그리고 말없이 에일런의 손을 집어 들었다. 굳은살이 막 잡히기 시작한 손. 아직 미완의 손. 이안의 단단한 손이 그 손을 가만히 감쌌다. 짧은 시간이었다.
“잡아봐라.”
그 한마디와 함께, 무기는 에일런의 손에 쥐어졌다. 망치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머리의 양쪽은 안쪽으로 깊게 움푹 파여 있었다. 무엇인가를 내려치기엔 불안정한 구조였고, 진짜 쓰임은 따로 있는 듯했다. 무기 안쪽에서 전해지는 떨림이 손바닥 전체에 번져왔다. 망치 머리 속은 비어 있었고, 그 내부에 무엇인가 작고 무른 금속 덩어리가 떠 있는 듯한 감각이 있었다. 손의 움직임이나 공기의 떨림에 따라 그것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망치 머리 내부에서 공명음처럼 울렸다. 손잡이는 일반적인 가죽이 아니었다. 표면은 금속보다 부드러웠고, 차갑지도 않았다. 망치의 머리에서 손잡이까지, 이음새 하나 없이 하나의 재료로 이어져 있었다. 도구라기보다는, 감각을 감싸는 하나의 형태 같았다. 진동을 흡수하는 대신, 그것을 손 전체로 확장시켜 전달하는 구조였다. 마치 손과 무기가 하나로 이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숨을 들이켰다. 그 떨림이 손바닥 깊은 곳으로 스며드는 순간,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울림이 가슴 안쪽까지 파고들었다. 그것은 단지 무기가 아니었다. 이안으로부터 이어지는, 말보다 깊은 연결의 징후였다.
“정식 지급은 아니야. 형식상 ‘보조 장비’로 등록된 상태지.”
이안은 무기를 에일런 쪽으로 밀며 덧붙였다.
“흐름은 단단함보다 밀도에 반응하니까. 손에 감기는 쪽이 아니라, 밀려드는 쪽으로 설계했다.”
에일런은 손에 쥐고 있던 무기를 천천히 다시 살폈다. 금속은 차갑지 않았고, 손 안에서 묘한 떨림이 계속되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바깥의 움직임과는 별개로, 내부에서 울리는 미세한 리듬 같았다.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걸릴 거다.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이안은 다시 망치를 들어 무언가를 조율하듯 건드렸다.
“흐름은 지시를 따르지 않아. 반응하긴 하지.”
에일런은 고개를 들었다. 짧은 숨이 지나갔고, 손끝의 떨림은 점점 손바닥 깊은 곳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밖에서는 다른 소대장들이 무기를 수령하고 있었다. 대부분 규격화된 창, 검, 방어구류였고, 병참 기록병들은 하나하나 확인을 마친 뒤 이적서에 서명받고 있었다. 한 병참병이 천막을 들추며 말했다.
“제5기동소대 소속 에일런 브레이트, 수령 확인 서명 바랍니다.”
에일런은 손에 든 장비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것은 기록상 ‘보조 장비’였지만, 그 떨림은 다른 것과 결이 달랐다. 그는 서명했고, 병참병은 고개를 숙인 채 뒤로 물러났다. 잠시 뒤, 이안의 마지막 한 마디가 따라왔다.
“…그건 명령이 아니라, 응답으로 움직일 거다.”
응답이라는 말은, 새벽에도 손 안에서 울리고 있었다. 새벽의 안개가 아직 걷히지 않은 시각, 제5기동소대는 내성 남쪽 출입문을 통과해 외곽 초입에 도달했다. 케일란이 동행하진 않았지만, 출발 전 전달받은 임무 요약은 간결했다.
『전초기지 예정지 도착 후, 지정 지형에 대한 흐름 반응 기록. 전투는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나, 이상 징후 발견 시 충돌을 피하도록. 관측 중심.』
말 그대로 실전이 아닌 관측이었다. 그러나 소대원들은 모두 약간의 긴장 속에서 이동하고 있었다. 길지 않은 행군 끝에, 고지대의 너른 언덕 위에 도착했다. 그곳은 마왕군 진영과 맞닿은 남방 경계선에서 가장 가까운 능선 중 하나였다. 아직 직접 전투가 벌어진 적은 없지만, 앞으로의 충돌이 예상되는 요충지.
“여기입니다. 흐름 기록 장비 설치하겠습니다.”
로벤이 장비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가빈과 다렌은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레 자리를 잡았다. 에릭은 여느 때처럼 한 손에 창을 세운 채, 다른 손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긴장은 되어 있었지만, 과도하게 굳진 않았다.
“설치 완료. 시작해도 됩니다.”
다렌이 흐름 기록장치를 작동시켰다. 작은 공진판이 지면 가까이에 설치되었고, 푸른 빛의 얇은 선들이 장비를 중심으로 주변에 퍼지기 시작했다. 에일런은 무기를 손에 쥔 채 언덕의 가장자리로 걸었다. 망치형 장비는 여전히 손 안에서 미세한 떨림을 보내고 있었다. 이전보다 더 정교해진 그 감각은, 이제 단순한 진동이 아니라 '방향'을 가리키는 흐름처럼 느껴졌다. 그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그 끝에는, 아직 보이지 않는 적의 땅. 마왕군의 기척은 없었지만, 흐름은 거기서 시작되고 있었다. 잠시 뒤, 에일런이 조용히 말했다. 그의 눈동자는 바람 너머를 향해 고정돼 있었고, 손끝에 닿는 떨림은 점점 더 또렷해졌다.
“...움직인다.”
그 말에 가빈과 로벤이 고개를 돌렸다. 다렌은 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에릭만이 아직도 에일런을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
“흐름 말이지?”
에일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풍경은, 단지 바람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멀리 능선 너머, 공기 속에서 흐릿하게 울리는 리듬. 누구도 아직 느끼지 못하는 시작의 떨림. 에일런은 조용히 무기를 더 단단히 쥐었다.
1막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