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그냥 회색으로 살 뻔했다
누군가 물었다. 가장 좋아하는 색깔이 뭐냐고.
글쎄.. 가장 좋아하는 색깔은 초록색이었고 파란색이기도 했고 빨간색인적도 있었다.
그가 또다시 물었다. 너와 가장 잘 어울리는 색깔은 뭐냐고.
고민 없이 대답했다. 회색.
사전에는 '회색지대'라는 단어를 이렇게 정의한다.
이도 저도 아닌 상태나 애매한 범위를 뜻하며,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립의 의미를 가진다.
여러 사람들과 있을 때 나는 마치 제 3자인 것처럼 말없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고, 무엇을 원하는지 물을 때는 다 괜찮다고 대답했다. 말 주변이 없어서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 속에 내가 어떤 모습을 보여줘야 되는지 몰랐고, 어떤 선택지를 선택해도 괜찮았다.
한편으로는 내 생각을 주장한다는 것이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졌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꽉 막히고 불편한 사람으로 판단되는 것이 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진리를 제외하고는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개방적이고 수용적인 태도를 지니려고 애썼다. 아마도 누구나 편하게 다가올 수 있게 튀는 색깔 없이 무난한 사람이고 싶었던 것 같다.
회색은 다른 색상과 마찬가지로 어떤 색상을 섞느냐에 따라 다양한 느낌을 줄 수 있다. 검은색과 흰색의 조합뿐만 아니라 보색과 원색이 조합으로도 회색을 만들 수 있는데, 섞는 비율의 따라 따뜻한 느낌을 주기도 하고 차가운 느낌을 줄 수도 있다. 그리고 회색은 다른 색들처럼 매력적이고 화려하진 않지만, 차분하고 안정감을 주는 색이다. 주변 색들과 함께 있을 때 돋보이진 않지만, 중심을 잡아주는 색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나는 회색과 닮아있다.
심리상담을 공부하면서 스스로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니 생각보다 가진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남들이 보기에 단조로운 회색일지라도 내면에는 다양한 색상이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나도 다양한 색깔을 지니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과 있을 때 돋보이지 않더라도 안정감을 줄 수 있었고, 선택하지 않는 선택을 함으로써 누군가의 색깔을 해치지 않을 수 있었다. 회색은 다 똑같다고 단정 짓지 않고 '지금은 이렇지만 나중에는 달라질 수 있어'라고 생각함으로써 더 다양한 색상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스스로를 회색으로 정의했더라도 다시 한번 자신을 살펴보자.
어쩌면 당신은 누구보다 빛나고 화려한 회색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