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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폴 Oct 19. 2020

죄의식의 두 얼굴

영화 <싸이코>

죄의식은 죄를 저지르기 이전에 먼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죄에서 죄의식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죄의식으로부터 죄가 비롯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을 죄의식으로 인해 죄인이 되는 사람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영화 <싸이코>의 주인공 노먼 베이츠는 인적이 드문 도로변에서 혼자 모텔을 운영하는 청년이다. 어느 비 오는 밤 회사 돈을 훔쳐 도주하던 경리직원 매리언이 투숙하기 위해 이곳에 찾아든다. 매력적인 매리언에게 노먼은 즉각적으로 호감을 느끼고 호의를 베풀려고 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모텔 뒤편 집에서 노먼의 그러한 태도를 호되게 다그치는 그의 어머니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날 밤 샤워를 하던 매리언은 노먼의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에 의해 칼로 무참히 살해당한다. 범인이 떠난 뒤 다급하게 뛰어 들어온 노먼은 서둘러 사건 현장을 수습하고 사체는 매리언의 자동차와 함께 늪에 버린다. 얼마 후 매리언의 회사에서 고용한 사설탐정이 그녀의 행적을 찾아 모텔로 찾아오지만 그 또한 노먼의 어머니에게 살해당한다. 이후 매리언의 언니가 동생을 찾기 위해 몰래 노먼의 집에 들어간다. 그리고 지하실에서 해골이 된 노먼의 모친을 발견한다. 마침내 매리언과 탐정을 살해한 사람은 노먼의 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 복장을 한 노먼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런데 그를 면담한 심리전문가는 조금 더 복잡한 이야기를 전한다. 노먼의 내면에는 두 개의 인격체가 공존하고 있는데 살인을 저지른 쪽은 노먼 자신이 아닌 어머니 인격체라는 것이다. 경찰서 조사실에 앉은 노먼의 내면에 어머니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의 얼굴 위로 어머니의 해골 모습이 중첩된다.

 

<싸이코>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죄의식에 관한 교과서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에 의하면 남자아이들은 남근기를 거치면서 어머니에 대한 성적 욕망이 강해져 아버지를 제거하고 어머니를 차지하고 싶어 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겪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욕망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성기를 거세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낀 아이는 친부 살해와 근친상간에 대한 욕망을 포기한다. 이처럼 아버지를 향한 공격성을 억압하는 과정에 아이는 아버지와 스스로를 동일시하고 아버지의 권위를 내면화한다. 그런데 성장과정에 어떠한 이유로 인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성공적으로 극복하지 못하면 정신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아이의 내면 깊숙한 곳, 바로 무의식 속에 죄의식이 똬리를 틀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아동기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잠자리를 가지려 했던 금지된 욕망에 대한 죄의식이 성인이 된 이후에도 변함없이 무의식의 밑바닥에 남아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영화 속 노먼의 아버지는 노먼이 다섯 살 때 죽었다. 남근기의 한가운데를 지날 무렵 발생한 아버지의 사망으로 노먼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해결할 기회를 놓친 채 성장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단 둘이 생활하면서 모자 사이에는 소유의식을 수반한 특별한 애정관계가 만들어졌다.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아들에게 집착하고 아들은 어머니가 만들어 놓은 세계 속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남자아이에겐 엄마가 가장 친한 친구죠”라는 영화 속 노먼의 대사는 그가 맺고 있는 어머니와의 관계가 뭔가 특별하다는 점을 암시한다. 하지만 둘 만의 배타적 관계는 어머니에게 애인이 생기면서 막을 내린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노먼은 어머니의 애인을 살해하고 그 과정에 어머니까지 죽여 버린다. 극복되지 못한 오이디푸스적 욕망이 불러온 결과였다. 

  

하지만 이로써 모자관계가 끝난 게 아니었다. 노먼의 죄의식이 죽은 어머니를 부활시켰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육신은 무덤에서 나와 박제가 되었고 어머니의 인격은 노먼의 내면세계 일부가 되었다. 예전에 살아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부활한 어머니는 노먼에게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아니, 오히려 살아 있을 때보다 무덤에서 돌아온 어머니의 힘은 더욱 강력했다. 잠시 스쳐가는 생각까지도 매와 같은 어머니의 눈에 의해 속속들이 감찰당했다. 내면세계까지 어머니에게 점령당한 노먼이 숨을 곳이라곤 아무 데도 없다. 



죄의식은 어디에서 왔을까?


1889년 1월 3일 아침 이탈리아 토리노의 피아자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한 마부가 말에게 무자비하게 채찍질을 가하고 있었다. 마침 이곳을 지나다가 그 장면을 목격한 니체는 갑자기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말에게 달려가 목을 끌어안았다.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얼마 후 경찰이 도착해 말에게서 니체를 떼어내었다. 이 일로 니체는 정신병원에 수용되었고 죽는 날까지 제정신을 되찾지 못했다. 


도스또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도 비슷한 장면이 등장한다. 어느 날 주인공 라스꼴리니코프는 무서운 꿈을 꾼다. 꿈속에서 일곱 살 정도의 꼬마 라스꼴리니코프는 아버지와 함께 묘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때 술 취한 농부가 늙고 여윈 말에게 인정사정없이 채찍질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결국 말은 매질에 못 이겨 죽고 만다. 소년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죽은 말에게 달려간다. 그리고 피범벅이 된 말의 목덜미를 부여잡고 울면서 눈과 입에 키스한다. 니체의 광장 사건과 라스꼴리니코프의 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말은 아버지를 상징한다. 마부와 농부는 바로 니체와 라스꼴리니코프 자신이다. 말에게 채찍질을 하는 모습은 아버지를 향한 적대감을, 말의 목을 끌어안고 슬퍼하는 모습은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나타낸다. 

  

프로이트의 연구에서도 아버지는 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프로이트의 환자 중 특별히 말을 무서워하는 다섯 살짜리 남자아이가 있었다. 꼬마 한스라고 불린 이 아이는 말이 자신을 물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말이 무서워 밖에 나가는 것조차 꺼릴 정도지만 동시에 짐마차를 끄는 말이 쓰러질까 봐 염려하는 이중적 감정을 보였다. 프로이트는 이 사례가 한스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보여준다고 진단했다. 한스는 어머니를 성적으로 갈망했고 아버지가 죽기를 소망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혹시 아버지가 알고 자신에게 화낼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말 공포증은 이러한 불안심리가 말에게 고착되어 생겨난 것으로 말은 한스의 아버지를 가리킨다. 말에게 물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성난 아버지가 자신의 ‘고추’를 제거할지 모른다는 거세 불안을 보여준다. 말이 쓰러질까 봐 걱정하는 마음은 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그의 죽음에 대한 소망이 공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프로이트는 최초의 인류가 저지른 친부 살해 신화 속에서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감춰진 원초적 죄의식의 기원을 발견하였다. 옛날 옛적 원시사회에서는 남자 우두머리 한 명이 무리의 모든 여성들을 독차지하였다. 어느 날 형제들은 여자를 얻기 위해 우두머리인 아버지를 살해한 뒤 시체를 나누어 먹었다. 하지만 막상 아버지를 제거하고 나자 아들들의 마음속에 죄의식이 싹텄다. 비록 폭군인 아버지를 증오했지만 동시에 아버지를 향한 애정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양가감정은 부족의 모든 여자를 독점하는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스스로가 아버지처럼 되기를 동경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아들들은 아버지가 금지하였던 것들을 금지하게 된다. 아버지를 살해하거나 어머니와 성관계를 가지는 행위들은 터부가 된다. 마치 살해당했던 아버지가 되살아난 것처럼 금지법은 아들들의 내면으로 들어와 강력한 권력을 휘두른다. 내면의 감찰자로 변신한 아버지는 우리의 금지된 욕망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령 행위를 통해 금기를 깨뜨리지 않더라도 단순히 금지된 욕망을 가진 것만으로도 우리 마음속에 죄의식이 싹튼다. 

  

프로이트는 아버지의 모습을 한 내면의 감찰자에게 ‘초자아’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초자아는 일종의 ‘나 위에 존재하는 나’이다. 자아에 대해 판단하고 죄를 묻는 상위 단계의 또 다른 나이다. 그런데 초자아는 어떻게 형성되는 걸까? 한 마디로 외부로 표출되지 못하고 제어된 공격성이 내면화될 때 초자아가 만들어진다. 남자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성적 욕망으로 인해 장애물인 아버지를 제거하고자 하는 공격성을 품게 된다. 하지만 거세 불안을 느끼면서 아이의 욕망은 억압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억압하는 과정에 공격의 대상이었던 아버지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권위자인 아버지와 그가 세운 금지의 법을 내면화한다. 이렇게 형성된 초자아는 전에 아버지에게로 향했던 공격 에너지를 자아를 향해 가혹하게 발산한다.


개인의 공격 본능은 안으로 돌려져 내면화한다. 아니 실제로는 공격 본능이 나온 곳으로 돌려보내 진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자아로 돌려지는 것이다. 그러면 초자아로서 나머지 자아 위에 적대적으로 군림하고 있는 자아의 일부가 그것을 인수하여 이번에는 ‘양심’의 형태로 자아에 대해 가혹한 공격성을 발휘할 준비를 갖춘다... 우리는 엄격한 초자아와 그것의 지배를 받는 자아 사이의 긴장을 죄책감이라고 부른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니체 역시 양심의 가책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선 공격성의 산물’이라고 표현하였다. 죄의식은 바로 양심의 가책에서 비롯된 산물이다. 인간은 원래 본능에 따라 자유롭게 살아가던 존재였는데 어느 날 사회라는 제도 속에 편입되면서 강제적으로 본능을 억압당하게 된다. 황야를 질주하던 반동물인 인간은 형벌이나 종교적 금욕주의와 같은 사회적 강제에 의해 본능에 충실하던 삶을 포기한다. 이렇게 밖으로 발산되지 못한 본능은 칼끝을 반대로 돌려 내면을 향하게 된다. 


적의 잔학, 박해, 공격, 파괴의 쾌락, 이 모든 것이 이러한 본능의 소유자 자신에게로 방향을 돌리는 것, 이것이 바로 ‘양심의 가책’의 기원인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양심의 가책은 불안과 고통을 수반한다. 니체는 양심의 가책이 인류가 아직까지 치유하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크고도 무시무시한 병, 즉 ‘인간의 인간에 대한, 자기 자신에 대한 고통이라는 병’이라고 묘사하였다. 프로이트의 언어로 표현하면 ‘초자아로 인해 자아가 괴로워하는 병’이다. 초자아의 감시망 속에서 자아는 항상 불안해한다. 금지된 욕망이 살포시 고개만 들어도 초자아는 득달같이 호통을 친다. 


박제된 새의 눈처럼 초자아는 노먼을 감시한다 - 영화 <싸이코>


<싸이코>에서 노먼의 내면을 지배하는 초자아는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엄격한 양육방식, 어머니와의 특별한 애정관계, 그리고 친모 살해로 인한 죄의식이 강력한 초자아를 탄생시켰다. 영화 속 카메라는 모텔 사무실 천정에 진열해 놓은 박제된 새들이 아래로 내려다보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포착해 보여준다. 새들은 바로 박제된 어머니를 암시하는 동시에 노먼의 내면을 감시하는 초자아를 상징한다. 노먼이 매리언에게 성적 욕구를 느끼고 호의를 베풀려고 하자 초자아인 어머니 인격이 발동한다. 어머니에게 호되게 질책을 당하는 노먼의 모습은 초자아에게 책망을 받는 자아를 연상시킨다.



처벌을 향한 욕망


심리학자 대니얼 레빈슨(Daniel Levinson)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샌 퀜틴 주립 교도소에 수감 중인 윌(가명)이라는 재소자를 연구하였다. 윌은 25세의 공장 숙련공으로 평소 모범적인 아들이자 평판 좋은 젊은이였다. 그런데 교도소에 수감되기 몇 달 전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을 떠나 분가를 하였고 그때부터 갑자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다. 폭음, 성매매 여성과의 동거, 도박으로 그동안 저축해둔 돈을 모두 탕진했다. 급기야 수차례 강도질을 저질렀고 결국 경찰에 붙들렸다. 


그런데 윌이 저지른 범죄에는 특이한 점이 있었다. 먼저 강도 피해액을 모두 합해봐야 고작 600불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범행수법이 너무도 엉성했다. 예를 들어, 윌은 자기 동네 술집에서 강도질을 하면서 마스크로 얼굴도 가리지 않았다. 술집 안에 아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는 최소한의 주의도 기울이지 않았다. 무작정 술집에 들어가 총을 꺼내 들고 돈을 요구했다. 그런 뒤 천천히 술집을 빠져나와 눈에 잘 띄는 밝은 색 계통의 스포츠카를 타고 달아났다. 심지어 범행 당시 그가 입었던 옷에는 이름, 사진, 직장명이 적힌 신분증이 부착되어 있었다. 나중에 경찰에게 붙잡혀 구치소에 수감될 때 윌이 느낀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어머니와 친구들이 변호사를 고용해 보호관찰 처분을 받게 하려고 애쓸 때에도 막상 윌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다.

  

윌의 성장과정에서 레빈슨이 주목한 부분은 그가 16세 되던 해에 발생한 아버지의 자살이었다. 윌의 아버지는 여러 개의 레스토랑 체인점을 운영하다가 1929년 대공황으로 인해 사업에 실패하고 실직하게 되었다. 당시 윌은 사춘기에 접어든 나이였는데 가정 내 문제까지 겹치면서 부모와의 불화가 점점 심해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이사를 가자고 제안했고 윌이 강력히 반대하면서 둘 사이에 심한 말다툼이 벌어졌다. 윌이 아버지에게 그토록 공격적으로 대든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가 일을 나간 후 등교 준비를 하던 윌에게 아버지가 다가와 전날의 갈등을 무마하려고 시도하였다. 아버지는 윌의 어깨에 손을 얹고 “나를 사랑하지 않지, 그렇지?”라고 말했다. 윌은 대답하지 않은 채 아버지의 손을 세게 뿌리치고 집을 나와 버렸다. 그런데 잠시 후 아버지의 비명소리가 들렸고 윌이 황급히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아버지가 이미 독약을 마신 뒤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윌은 공장에 취직했고 생계를 도맡았다.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어머니와 보냈다. 본의 아니게 아버지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레빈슨은 윌의 무의식적 갈등과 욕구를 분석하기 위해 여러 장의 그림카드를 보여주고 그의 반응을 관찰했다. 분석 결과 윌이 갑자기 방탕한 생활을 하고 범죄까지 저지른 데는 처벌받고자 하는 근원적 욕구가 있다는 게 레빈슨의 진단이었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윌은 어머니에 대한 애착에 성적인 요소가 가미되었고 아버지에 대해서는 공격성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오이디푸스적 애착과 공격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무렵 아버지가 자신과의 말다툼 끝에 자살하는 충격적 사건이 발생한다. 어떻게 보면 윌의 친부 살해를 향한 무의식적 원망이 실현된 것이나 다름없다. 더욱이 아버지 사망 후 윌은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 곁에서 마치 남편과 같은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어머니와 무의식적으로 맺고 있는 근친상간의 욕망에 더하여 아버지 죽음에 대한 책임, 그리고 죽은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는데서 오는 죄책감이 심한 내적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내적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윌은 자기 파괴적 향락에 빠져들었다. 강도짓은 일종의 자기 처벌적 수단으로 동원된 것이다. 죄를 짓고 형사처벌을 받는 것은 초자아의 공격으로 인한 내면적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프로이트는 그의 저서에서 죄의식으로 인해 죄인이 되는 유형의 사람들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죄의식의 무게에 눌려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죄를 저지르고 나서 마음에 평안을 찾는 경우들이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아이들이다. 종종 어린아이들은 처벌을 받기 위해 나쁜 짓을 저지르는 때가 있다. 아이들은 잘못에 대해 부모에게 벌을 받고 나면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고 만족감을 느낀다. 죄의식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자기 처벌 욕구는 자아의 마조히즘적 경향과 보다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다. 마조히즘은 자아가 스스로를 비난하고 학대하는 경향을 말한다. 자아는 초자아로부터의 공격이 시작되기도 전에 먼저 알아서 초자아에게 굴복한다. 무의식적으로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처벌받기를 욕구하게 된다. 그래서 처벌을 받고자 죄를 저지른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나머지 제발 때려달라고 알아서 종아리를 걷는 것이다. 


마조히즘은 <죄가 되는> 행동을 하고 싶은 유혹을 만들어낸다. 그러한 행위는 다음에 (많은 러시아적 성격에 잘 나타나 있듯이) 사디즘적 양심의 가책이나 운명이라는 위대한 부모의 힘 있는 질책을 통해 속죄받아야 한다. 이 마지막 부모의 대변자에게서 형벌을 자초하기 위해서 마조히즘 환자는 적절하지 못한 일을 해야 하며, 자신의 이익에 반해서 행동해야 하고, 현실 세계에서 자신에게 열려 있는 좋은 전망을 망쳐 놓아야 하며, 급기야는 자기 자신의 현실적 존재 자체를 파괴해야 한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프로이트는 러시아의 소설가 도스또예프스키가 앓았던 간질의 근원에 자기 처벌을 향한 욕구가 자리 잡고 있다고 보았다. 도스또예프스키는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 처음으로 간질 발작이 시작되었는데 시기적으로 아버지가 농노들에 의해 살해를 당했던 때와 같다. 어린 도스또예프스키는 어머니를 소유하기 위해 아버지가 죽기를 원했는데 실제로 아버지가 죽어버리자 무의식 속에 자기 응징의 욕구가 자리 잡았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분석이다. 그런 면에서 도스또예프스키의 발작은 뇌의 손상과 같은 신체적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정신적 원인으로 인한 신경증적 현상이다. 간질발작 도중 도스또예프스키는 한 번씩 사망한 것과 유사한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는 프로이트의 말처럼 ‘누군가가 죽었으면 했고, 스스로 죽었으면 하는 사람이 되었고, 끝내는 자신이 죽은 것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도스또예프스키가 정치범으로 몰려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 있는 동안에는 간질발작이 멈추었다. 이 대목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석은 이렇다. 그가 형벌을 자신이 아버지에게 저지른 죄에 대해서 대가를 치르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외부의 힘에 의해 처벌을 받고 있는 동안에는 자기 응징이 일시적으로 중지되었던 것이다. 

  

도스또예프스키가 한 때 도박에 빠졌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도박중독 역시 죄의식에서 비롯된 자기 처벌행위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돈을 잃고 난 후 매번 아내에게 다시는 도박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단 한 번도 약속을 지킨 적은 없었다. 아내에 의하면 심지어 약속을 한 당일에조차 어김없이 도박을 했다. 그는 돈을 다 잃고 빈털터리가 될 때마다 일종의 병적인 만족감에 빠지곤 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욕설을 해댔고 아내 앞에서 자신을 한없이 비하시킬 수 있었으며 아내로 하여금 자신을 경멸하도록 부추겼고 또 자기 자신과 같은 늙은 죄인과 결혼한 것을 후회하도록 할 수 있었다. 그런 다음 다시 가벼워진 의식을 가지고 그는 다음 날 다시 도박을 하곤 했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가 에드문트 버글러(Edmund Bergler)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계승하여 도박중독 이면에 숨겨진 죄의식과 자기 처벌 욕구를 보다 심도 깊게 파헤쳤다. 버글러에 의하면 도박꾼은 무의식적으로 돈을 잃기 원하는 신경증 환자들이다. 치료를 받기 위해 버글러를 만난 도박중독 환자들은 도박을 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부분 돈을 따거나 혹은 스릴을 즐기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버글러는 이러한 판에 박힌 대답들은 도박행위에 대한 의식적 차원의 합리화에 불과하며 진짜 이유는 그들의 무의식적 정신작용 속에 숨겨져 있다고 보았다. 프로이트의 주장과 비슷하게 버글러는 도박중독자들의 내면에 부모를 향한 무의식적 공격 충동과 이러한 충동이 유발한 죄의식이 있다고 분석했다. 끊임없이 돈을 잃으면서도 도박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이들의 표면적 주장처럼 돈을 따겠다는 희망이 있어서가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처벌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돈을 잃을 때 사람은 굴욕감, 패배감과 같은 심적 고통을 경험한다. 도박을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고통을 느끼기 위해서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돈을 잃어야 한다. 이러한 ‘심리적 마조히즘’은 근원적으로 도박꾼들이 느끼는 죄의식과 불안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버글러는 프로이트와 달리 죄의식과 불안의 기원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찾지 않았다. 부모에 대한 공격 충동이 남근기의 친부 살해, 근친상간의 욕구가 아니라 구강기와 항문기에 아기들이 젖을 떼거나 배변훈련을 받는 과정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태어난 후부터 일정 기간 동안 유아들은 거의 무제한적 자유를 누린다. 배가 고플 때나 배변을 했을 때에는 단지 울거나 보채면 된다. 부모는 즉시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깨끗한 기저귀로 갈아준다. 아기는 어떠한 행동의 제약 없이 일방적으로 요구하고 부모는 아기의 요구를 충족시켜 준다. 하지만 아기가 엄마젖을 떼고 배변을 가려야 하는 시기가 되면 부모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아기에게 강요하고, 거절하고, 위협하고, 혼내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는 아기의 마음속에 적개심과 분노를 갖도록 만든다. 하지만 동시에 아기는 부모에 대한 애정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미움과 애정의 양가감정 속에서 죄의식이 싹튼다.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무의식 속에는 아기 때 누렸던 무제한적 자유와 힘에 대한 갈망이 남아있는데 도박은 그때의 느낌을 복원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도박은 부모의 지시나 가르침을 어기고 자기 맘대로 행동하는 일종의 부모에 대한 반항이나 마찬가지이다. 뺏겼던 엄마젖을 다시 움켜쥐는 행위다. 변기를 걷어차고 안방 한가운데 볼일을 보는 행위이다. 그런데 도박을 하는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돈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부모에게 대들면 결국 혼이 날 줄 이미 알고 있다. 도박에서 지는 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부모에게 반항했다가 볼기짝을 맞는 것과 같은 고통이다. 이런 점에서 도박은 부모에 대한 반항인 동시에 자기 처벌이다. 부모에게 품었던 적대감과 분노에서 유발된 죄책감을 해소하려고 자발적으로 고통을 맞이하는 것이다. 마음껏 젖을 빨지 못하게 하는 엄마와 아빠가 미운데, 이런 미운 마음 때문에 죄책감을 느껴 힘들고, 차라리 한 대 맞고 마음이라도 편해지자 싶어 엄마 젖을 일부러 움켜쥐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무의식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행위자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도박꾼들은 자신들이 왜 도박을 멈출 수 없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날마다 도박장을 찾는다. 



내 마음의 파수꾼


죄의식이 인간 행위에 미치는 영향은 이중적이다. 때로는 인정사정없이 정죄의 채찍을 휘두르는 난폭한 심판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의 앞에 선 행위자는 불안감, 열등감, 절망감의 덫에 사로잡힌 나머지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해 차라리 벌을 받겠다며 자기 처벌적 행동을 한다. 그렇지만 죄의식은 종종 행위자를 올바른 삶으로 인도하는 도덕교사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행위자는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과거 행위를 뼈아프게 반성하고 앞으로 올바르게 살겠노라고 다짐하게 된다. 죄의식의 긍정적 기능은 이처럼 도덕적 행위에 필요한 정서적 에너지를 제공하는 데 있다.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를 할 때 수반되는 심적 고통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도덕적 행위를 실천할 수 있는 힘이 생성된다. 


더 나아가 죄의식은 사회 공동체를 지속시키는 도덕 감정이다. 니체는 본능에 따라 살던 인간이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양심과 죄의식은 필요조건이었다고 말한다. 인간이 사회라는 제도 속에 편입되면서 이전에 타인을 향해 마음대로 발산하던 공격 본능은 통제되어야만 했다. 그 때문에 공격성의 칼끝을 밖이 아닌 안을 향해 겨누게 되었고 양심의 가책은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에 본능대로 행동하던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려면 반복적으로 고통이 가해져야 했다. 니체의 말처럼 ‘기억 속에 남기기 위해서는 무엇을 달구어 찍어야’ 하며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 것만이 기억에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내면을 지배하는 양심에는 이러한 고통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프로이트는 인간 문명의 발달과 죄의식의 증대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타자들과의 조화로운 공존이 중요해지기 때문에 인간의 공격성은 더욱 통제되어야 한다. 공격 욕구의 억제는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공격행위의 통제 차원을 넘어서 점차 내면적 통제 기제의 작동을 요구하게 된다. 그래서 이제 인간은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고서도 단지 나쁜 마음을 먹는 것만으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문명은 개인의 공격성을 약화시키고 무장을 해제시키는 한편, 마치 정복한 도시에 점령군을 주둔시키듯 개인의 내부에 공격성을 감시하는 주둔군을 둠으로써 개인의 위험한 공격 욕구를 통제한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행동주의 심리학에서도 개인의 범죄행위를 억제하는데 양심의 가책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긴다. 예를 들어, 심리학자 한스 아이젠크(Hans Eysenck)는 양심이 인간의 자율신경계에 장착되어 있는 억제 기제처럼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쾌락 충동을 좇아 반사회적 행위를 하려고 하면 양심 때문에 자동적으로 고통이 유발되고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의 행동을 제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동화된 억제 기제는 유명한 파블로프의 개 실험이 증명한 고전적 조건화를 통해 형성된다. 어린아이가 나쁜 짓을 저지를 때마다 매번 즉각적인 처벌로 신체적, 심적 고통을 유발하면 나쁜 짓은 조건 자극이 되어 그런 행위를 하려고 할 때마다 조건반응인 고통스럽고 불쾌한 느낌이 발생하게 된다. 파블로프의 개가 조건 형성의 결과 종소리라는 조건 자극에 침 흘리는 조건반응을 보이는 것과 같은 원리다. 

  

아이젠크는 사법기관의 처벌보다 양심의 가책을 통한 내면적 처벌이 범죄를 통제하는데 훨씬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형벌은 인간이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하려는 본성에 영향을 미쳐 범죄를 억제한다. 그런데 인간은 단순히 행위에 수반되는 쾌락과 고통의 상대적 크기에 의해서만 동기화되는 존재가 아니다. 비록 장래에 예상되는 고통의 양이 크더라도 비록 작지만 즉각적인 쾌락 앞에 쉽게 무릎을 꿇기도 하는 게 인간이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단기 쾌락주의자’에 가깝다. 인간 행동은 ‘쾌락의 원칙’과 더불어 ‘즉시성의 원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할 수 있다. 종종 범죄자가 추구하는 쾌락은 바로 눈앞에 보이며 확실한 반면 형벌은 시간적으로 멀리 위치해 있으며 불확실하다. 이러한 조건에서 장차 감당해야 할 형벌의 고통은 범죄자의 행동을 억제하는데 무력할 때가 많다. 오히려 이 순간 필요한 것은 행위가 가져오는 즉각적인 쾌락보다 더욱 즉각적이고 강렬한 처벌이다. 일종의 즉결처분이 필요한데 양심은 바로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내면의 경찰관’과 같다. 


양심의 가책을 몸으로 익히다 -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의 주인공 알렉스는 갱단을 이끌고 강간과 폭력을 일삼는 청소년이다. 나중엔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 14년 형을  받은 뒤 교도소에 수감된다. 어느 날 정부는 알렉스에게 감형을 대가로 새로운 치료법인 ‘루드비코 요법’을 받아보도록 제안하고 알렉스는 이를 수락한다. 의사들은 알렉스에게 폭력적이고 음란한 영상을 계속적으로 보게 하고 동시에 구역질을 유발하는 약물을 그의 몸에 투입한다. 처음에는 킬킬대면서 영상을 즐기던 알렉스가 시간이 지날수록 신체적인 거부반응에 괴로워한다. 마침내 심적으로 폭력성이나 성충동을 느끼면 즉각적으로 구토가 나오는 단계에 도달하고 그제야 알렉스는 교도소에서 풀려난다. 루드비코 요법은 아이젠크가 제안한 인간 내면의 자동화된 억제 기제와 유사하다. 즉각적 체벌로 어린아이의 마음속에서 양심의 가책이 자동적으로 작동하게 만들듯이 약물을 주입하여 범죄자의 몸이 거부반응을 일으키도록 한 것이다.


폭력은 매우 끔찍스러운 것이야. 이제 너는 그걸 배우게 될 거야. 너의 몸이 배우는 거지... 오늘 오후에 몸이 안 좋았던 것은 네가 점점 좋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건강할 때에는 어떤 증오스러운 것을 보면 두려움이나 역겨움을 느끼지. 너는 건강해지고 있는 것뿐이야. 내일 이맘때쯤이면 더욱 건강해질걸. 

- 의사가 알렉스에게 하는 말,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 

  

수치심은 죄의식과 비슷한 도덕 감정의 한 종류이다. 그런데 수치심은 발생의 원인과 인간에게 미치는 효과에 있어서 죄의식과 구별된다. 쉽게 말해 죄의식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수치심은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이다. 죄의식은 초자아가 금지한 행위를 할 때 발생한다. 서로 다른 심급인 자아와 초자아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타자의 개입이 불필요하다. 스스로가 자기 자신의 심판자이다. 이에 반해 수치심은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되는 굴욕감 같은 것이다. 이때 자신의 모습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시선을 필요로 한다. 비난과 조롱이 뒤섞인 타자의 눈으로 스스로를 바라볼 때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모습과 동떨어진 자신의 모습이 외부로 드러난데 대한 감정적 반응이다. 또한 수치심은 죄의식과 달리 자아정체성에 영향을 미친다. 죄의식은 단지 자신이 저지른(또는 저지르려고 마음먹은) ‘나쁜 행위’ 자체에 대한 도덕적 반응이지만 수치심은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되어버린데 대한 반응이다.

  

죄의식과 수치심은 동일한 범죄행위에 대해 상반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 연구에서 연구자들은 교도소에 수감된 지 얼마 안 된 오백 여명의 재소자를 상대로 죄의식과 수치심을 조사하였다. 그리고 나중에 이들이 출소한 후 일 년 이내에 재범을 저지르는지 확인하였다. 입소 후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재소자들에게 ‘운전 중에 실수로 작은 동물을 치었다’ 등과 같은 가상의 상황을 제시한 뒤 이에 대한 반응을 물어봤다. 재소자의 죄의식을 보여주는 응답항목으로는 ‘사고를 피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며 반복적으로 생각할 것이다’가 있었다. 수치심을 보여주는 항목으로는 ‘나 자신이 형편없다고 생각할 것이다’가 있었다. 연구결과 죄의식을 많이 느끼는 재소자일수록 출소 후 재범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았다. 이에 반해 수치심을 느끼는 경향이 강할수록 재범률이 낮게 나왔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도덕 감정이 행위 중심인지 아니면 행위자 중심인지와 관련되어 있다. 죄의식은 ‘나는 나쁜 짓을 저질렀다’라는 인식인 반면 수치심은 ‘나는 나쁜 사람이다’라는 인식이다. 우리는 자신이 저지른 특정 행위에 대해 죄책감이 들 때 후회를 한다. 그리고 행위의 결과에 대해 사과하거나 피해를 보상하는 식으로 책임지려는 태도를 보인다. 이에 반해 우리가 수치심을 느끼면 먼저 스스로를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기는 마음이 든다. 이런 마음은 심적 고통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이때 행위자는 도리어 방어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고통을 줄이려고 한다. 자신의 잘못을 부인하고 책임을 회피하고 오히려 타인을 비난한다. 

  

결국 도덕 감정이 자아정체성에 어떤 종류의 영향을 미치는가에 관한 문제로 정리할 수 있다. 호주의 범죄학자 존 브레이스웨이트(John Braithwaite)는 범죄자에 대한 처벌의 성격을 행위 중심과 행위자 중심으로 구분한 뒤 전자를 ‘재통합적 수치 주기’, 후자를 ‘오명 씌우기’라고 하였다. 행위 중심 처벌은 말 그대로 범죄자는 존중하되 그가 저지른 행위만을 비난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태도다. 비록 나쁜 짓을 저질렀지만 범죄자는 여전히 좋은 사람으로 취급된다. 저지른 행위에 대하여 합당한 책임을 지도록 하되 행위자는 용서해 준다. 이로써 범죄자는 자신의 정체성에 아무런 변화를 겪지 않고 오직 행위 자체에 대해서만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고 결국에 문제가 된 범죄행위를 그만두게 된다. 


이에 반해 오명 씌우기는 행위자를 나쁜 사람으로 취급한다. 범죄자, 전과자라는 오명이 부여되고 ‘용서받지 못한 자’로 남는다. 행위자 본래의 정체성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된다.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행위자에게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세상의 비난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더욱 거친 행동으로 맞대응하던지 아니면 비슷한 처지에 놓인 무리들과 연대하여 대응해야 한다.




참고문헌

지그문트 프로이트, 「예술, 문학, 정신분석」, 정장진 옮김(열린책들, 2004)

지그문트 프로이드, 「꼬마 한스와 도라」, 김재혁·권세훈 옮김(열린책들, 2004)

지그문트 프로이트, 「종교의 기원」, 이윤기 옮김(열린책들, 2004)

지그문트 프로이트, 「문명 속의 불만」, 김석희 옮김(열린책들, 2004)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윤희기 옮김(열린책들, 2004)

지그문트 프로이트, 「예술, 문학, 정신분석」, 정장진 옮김(열린책들, 2004)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김정현 옮김(책세상, 2002)

Daniel J. Levinson, “Criminality from a Sense of Guilt: A Case Study and Some Research Hypotheses,” Journal of Personality, Vol. 20, No. 4(1952)

Edmund Bergler, The Psychology of Gambling (Hanison, 1957)

Hans Eysenck, Crime and Personality (Paladin, 1970)

John Braithwaite, Crime, Shame and Reintegra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9)

June P. Tangney, Jeffrey Stuewig, & Andres G. Martinez, “Two Faces of Shame: Understanding Shame and Guilt in the Prediction of Jail Inmates’ Recidivism,” Psychological Science, Vol. 25, No. 3(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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