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증오>
땅은 더욱더 소수의 손에 집중되었고,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갔다. 대지주들은 사람들을 억압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엄청난 재산을 보호하는데 필요한 무기와 독가스를 사는데 많은 돈을 썼다. 혹시 사람들 사이에서 불온한 소리들이 오가지는 않는지 감시하기 위해 첩자들도 보냈다. 폭동이 일어나면 짓밟아 버리기 위해서였다. 대지주들은 경제적 변화도 무시했고, 변화를 위한 계획도 무시했다. 폭동의 원인이 계속 존재하는데도 대지주들은 폭동을 분쇄할 방법만 생각했다.
- 소설「분노의 포도」
영화 <증오>는 프랑스 파리의 외곽에 위치한 이민자 집단거주지, 방리유를 배경으로 한다. 얼마 전 지역주민들과 경찰 사이에 무력충돌이 발생했고 그 과정에 아랍계 소년이 경찰관에게 폭행을 당해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사건으로 폭동은 더욱 격렬해졌고 파리 정부는 계엄령으로 대응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곳에 사는 빈쯔, 사이드, 위베르는 미래에 대한 아무런 희망 없이 빈둥대거나 구석에 처박혀 마약이나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소수민족 청소년들이다. 어느 날 유태인 빈쯔는 경찰이 폭동을 진압하던 중 분실한 권총을 우연히 습득한다. 그리고는 만약 혼수상태에 있는 소년이 죽으면 경찰관 한 명을 쏘아 복수하겠다고 공언한다. 이들 세 명은 파리로 나아가 밤거리를 어슬렁거린다. 그러다가 경찰의 검문에 걸려 경찰서로 끌려가 방리유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곤욕을 치른다. 파리의 어느 곳을 가던지 가난한 이민자 출신은 배척당하기 일쑤다. 늦은 밤까지 이방인처럼 거리를 떠돌다가 집으로 가는 막차를 놓치고 역 안에서 밤을 새운다. 새벽녘 혼수상태에 있던 소년이 결국 사망했다는 뉴스가 들려온다. 아침 무렵 방리유로 돌아왔을 때 복수를 포기한 빈쯔는 위베르에게 총을 건넨다. 그때 갑자기 나타난 경찰관이 실수로 빈쯔를 쏜다. 분노한 위베르와 경찰관이 서로의 얼굴에 총구를 겨눈다. 영화가 암전 되자 누구의 것인지 모를 총성이 울려 퍼진다.
영화 <증오>가 묘사하는 프랑스는 내국인과 이민자로 이원화된 사회다. 그중에서도 방리유 지역 이민자들은 폭력, 마약, 가난이라는 낙인과 함께 주류 사회로부터 철저히 고립되어 있다. 세계적인 도시 파리로부터 불과 차로 30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지만 방리유는 내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섬처럼 존재한다. 영화의 주된 소재는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경찰과 이민자 청년들이다. 경찰은 국가가 행사하는 공권력을 대표한다. 영화 속 경찰은 이민자 청년들을 향해 거침없이 폭력을 행사한다. 소란이나 말썽이 벌어지는 장소라면 어김없이 경찰이 등장해서 법집행이라는 명목으로 폭력과 폭언을 일삼는다. 방리유 청년들은 이러한 경찰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고 때론 화염병을 던져 경찰차량을 불 지른다.
하지만 이들 청년들의 증오는 궁극적으로 프랑스 주류사회를 향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자신들을 가난하고 무식한 유색인종, 언제 사고칠지 모르는 골칫거리로 여기는 파리 시민의 따가운 시선을 잘 알고 있다. 프랑스에 살지만 프랑스에 속하지 못하는 이들은 빈쯔의 표현처럼 ‘광활한 우주에서 길을 잃은 개미’와 같은 존재이다. 차별과 불평등은 이곳 청년들의 희망을 갉아먹는다. 삶의 구체적 지향점을 찾지 못한 채 계층과 출신의 벽 앞에 좌절하고 분노한다.
방리유 지역에 만연한 무질서와 폭력을 단순히 범죄 문제로만 볼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범죄는 겉으로 드러난 현상일 뿐 프랑스 사회 속에 내재된 부조리와 여기에서 파생된 갈등이 본질에 가깝다. 프랑스 정부가 범죄, 무질서, 폭력이라는 용어로 묘사한 사회현상의 본체는 바로 ‘갈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양한 이해를 둘러싼 사회 주체들 간의 갈등과 대립이라는 토양 위에서 범죄는 싹트고 성장한다. 그런데 공권력은 현상만을 다룰 뿐 본질은 외면한다. 경찰은 치안유지라는 명목으로 방리유에 주둔하며 청년들을 감시하고 통제하고 억압할 뿐이다.
그런데 국가 통치와 사회질서의 근간인 법률과 여기에서 파생된 공권력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법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합의적 관점에 의하면 법률은 개인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국가와의 계약에 자유롭게 참여한 결과다. 국가와 국가권력 자체가 사회 구성원 전체의 일반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법률은 공공선을 추구한다. 이에 반해 갈등적 관점은 일반의지니 공공선이니 하는 것이 순진한 유토피아적 관념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법률은 상호 대립하는 집단 간의 힘겨루기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법률은 지배적 집단의 이익과 가치를 반영한다. 강한 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법률을 만들고 집행한다. 갈등적 관점에서 보면 사회는 최상위층에서 최하위층까지 철저히 계층화되어 있는 불평등한 구조로 되어 있다. 국가는 계층을 구분하는 칸막이를 잘 지켜 불평등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법률은 국가가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주요한 수단일 뿐이다.
영화 <설국열차>는 기상이변으로 인해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은 미래를 배경을 한다. 열차는 최후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을 태운 채 끝도 없이 궤도를 돌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처음에 열차에 탑승하는 순간 또는 열차 안에서 태어나는 순간 지정된 칸에만 머물러야 한다. 꼬리칸에는 헐벗고 굶주린 승객들이 바퀴벌레로 만든 단백질 조각을 먹으며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반면 앞쪽 칸에는 술과 마약에 빠진 채 호사스러운 삶을 즐기는 사람들이 탑승해 있다. 열차 칸 사이의 통행은 질서유지라는 명목으로 엄격히 통제되고 있다. 어느 날 꼬리칸을 찾은 총리가 사람들 앞에서 지정된 자리를 지키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생명의 열차에 탄 모든 사람은 정해진 자리를 벗어나면 안 된다. 각자 미리 지정된 고유의 자리를 지켜야 해... 난 모자고 너희는 신발이지. 난 머리에 있고 너희는 발에 있어야 마땅해... 발이 머리 자리를 탐하면 성스러운 질서가 흔들린다. 너희 자리를 알라! 그리고 지켜라! 신발이 되어라!
- 메이슨 총리 연설, 영화 <설국열차>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에 의하면 국가와 법률은 처음부터 소유의 불평등을 제도화하기 위해 탄생했다. 루소는 인간 불평등의 기원을 추적하기 위해 국가라는 공동체가 형성되는 과정을 분석했다. 루소가 상상한 자연 상태 속 인간은 그야말로 자유로운 존재였다.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은 채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면서 자유롭게 살았다. 그러다가 가족을 구성하게 되면서 점차 조그마한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살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공동체가 도덕률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가끔씩 발생하는 내부적 갈등이 쉽게 조정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소유 개념이 공동체에 도입되면서 상황이 급변한다. 사람들은 더 많은 걸 소유하고 싶어 했고 결국 모든 것이 토지 분배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그때 남들보다 강한 신체와 재빠른 머리를 가진 자들이 토지를 선점하고 소유권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어떤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 땅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리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말을 믿을 만큼 단순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최초의 인간이 문명사회의 실질적인 창시자이다. 말뚝을 뽑아버리고 토지의 경계로 파놓은 도랑을 메우면서 동류의 인간들을 향해 ‘저런 사기꾼의 말을 듣지 마시오. 과일은 모두의 소유이고 땅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는다면 당신들은 파멸할 것이오’라고 외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얼마나 많은 죄악과 싸움과 살인, 얼마나 많은 비참과 공포에서 인류를 구제해주었을 것인가.
- 장 자크 루소
아쉽게도 루소의 한탄처럼 소유 관념의 등장에 맞서 말뚝을 뽑아버리고 도랑을 메운 사람은 없었다. 일단 토지를 선점한 자들은 자신들의 소유를 공고히 하려고 법률이 지배하는 국가공동체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드디어 강한 권력을 가진 국가가 탄생하고 소유와 불평등은 법률을 통해 제도화되었다. 탐욕스러운 소수의 특권층이 등장하게 되고 부와 권력이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이제 그들은 법과 제도 위에 군림하면서 기득권을 유지·확대하는데 골몰했다.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유를 빼앗긴 채 소수의 특권층들을 위해 ‘노동, 예속, 비참’에 복종하고 말았다. 루소는 이러한 과정을 세 단계로 구분한다. 처음에는 단순히 소유권을 기준으로 부자와 가난한 자의 상태만 존재한다. 다음 단계에는 합법적 권력을 가진 강자와 그렇지 못한 약자로 구분된다. 그러다가 마지막 단계 이르면 독단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법과 제도 위에 군림하는 주인, 그리고 이러한 전횡 아래 지배당하는 노예가 형성된다. 이 단계가 되면 인간 불평등은 최고조에 이른다.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인간 불평등의 원인이 생산양식의 발달과 이에 따른 생산량의 증가라고 분석했다. 인류 역사는 원시공동체 사회에서 시작하여 고대 노예제 사회, 중세 봉건제 사회를 거쳐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변천해 왔다. 그 과정에 분업을 통해 생산성이 막대하게 증가하였고 필요 이상의 재화가 축적되었다. 더욱이 새로운 지식이 발견되고 기술이 도입되면서 생산력은 더욱 증가하였다. 소수의 사람들은 이렇게 남아도는 재화를 독점하고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다수의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으로 계급 분화가 점점 심화되었다.
개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정한 생산관계 속에 편입된다. 생산관계란 생산과정에서 맺어지는 사회적 관계다. 생산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는가에 따라 개인의 지위가 결정된다. 생산관계 속에서 개인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와 소유하지 못한 자로 나뉜다. 봉건제 사회에서는 지주와 농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로 구분된다. 결국 생산관계란 계급관계의 다른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사회는 생산력의 발전단계에 따른 생산관계를 토대로 하고 나머지 모든 제도와 이념이 그 위에 올려져 있는 구조로 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 법, 교육, 문화 등 모든 사회제도는 그 근간이 되는 경제적 구조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인간들의 의식과 행동조차도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맺고 있는 경제적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영화 <카트>에서 대형마트의 계약직 직원들은 하루아침에 부당해고를 당한다. 열심히 일하면 정규직 사원으로 전환시켜준다는 회사 측 약속만 믿고 온갖 부당한 요구와 형편없는 근무환경도 묵묵히 견뎌온 터였다. 마트라는 환경 속에서 계약직 직원들의 사회적 존재는 이들이 편입되어 있는 생산관계에 의해 정의된다. 이들은 거대 자본을 소유한 고용주로부터 임금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더욱이 계약직, 비정규직, 인턴, 파견직 등의 수식어가 붙은 고용상태가 불안정한 노동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갑질을 일삼는 손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빌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근무시간이 끝난 뒤에도 회사의 요구가 있으면 지친 몸을 이끌고 연장근무를 해야만 한다. 이 모든 것이 생계 수단의 소유권에 바탕을 둔 관계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조금 더 확장시켜 생각해보면 아파트 주민이 경비원에게 욕설을 하고, 대학교수가 대학원생을 하인처럼 부려먹고, 대기업 회장 부인이 운전기사를 발로 걷어차는 일이 발생하는 이유도 결국 이들이 맺고 있는 생산관계 때문이다.
그런데 생산관계로 맺어진 계급들 사이에는 대립과 충돌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마련이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에 내재된 착취적 속성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자본가가 이윤을 남기는 방법이 노동자가 노동력을 투입해 추가적으로 생산한 잉여가치를 통해서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노동자가 100만 원 가치의 노동력을 투입해서 생산물을 만들어도 임금으로 50만 원만 주고 나머지 50만 원을 잉여가치로 챙기는 방식이다. 그래서 이윤을 최대한 많이 남기려는 자본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임금을 줄이려고 할 것이다. 자본주의가 착취적인 이유는 이와 같이 자본가가 노동자로부터 잉여가치를 탈취하는 방식으로 자본을 확대해 나가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임금노동자는 어떻게 해서든지 더 많은 노동의 대가를 요구한다. 회사 측에서 요구를 받아주지 않으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단체행동에 나선다. 때론 파업도 불사한다. <카트>에서도 마트 측의 일방적인 계약 해지에 맞서 직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파업에 들어간다. 회사는 이를 불법점거 및 업무방해로 규정하고 경찰은 시위대를 체포한다. 파업투쟁이 길어지자 나중에는 용역깡패를 동원해 농성천막을 부수고 폭력을 행사한다.
영화 <자전거 도둑>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이탈리아 로마를 배경으로 피폐한 민중의 삶을 잘 보여준다. 주인공 리치는 직업소개소를 통해 벽에 포스터를 붙이는 일자리를 어렵사리 구한다. 그런데 문제는 일을 하려면 자전거가 필요한데 이미 오래전에 전당포에 자전거를 맡겨 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리치의 아내가 침대보를 저당 잡히고 그 돈으로 자전거를 되찾아준다. 리치는 고정적인 수입과 각종 수당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첫 출근을 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포스터를 붙이느라 한눈을 판 사이 누군가가 몰래 자전거를 훔쳐 타고 달아난다. 리치와 그의 어린 아들은 생명과 같은 자전거를 되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하지만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자전거 찾는 일을 포기할 즈음 리치의 눈에는 곳곳에 세워져 있는 무수한 자전거들이 눈에 들어온다. 리치가 자전거 한 대를 훔쳐보지만 곧바로 사람들에게 붙들리고 만다. 울며 매달리는 아들 덕분에 간신히 풀려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얼굴은 고뇌와 슬픔으로 온통 일그러져 있다.
독일의 사회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는 범죄의 원인을 자본주의로 인한 인간성 상실과 도덕적 타락에서 찾는다. 초창기 자본주의 발달과정에 노동력을 착취당한 노동자들은 빈곤에 허덕이며 비참한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20대의 청년 엥겔스는 유럽의 국가 중 가장 앞서 자본주의가 발달한 영국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 비친 노동자들은 소수의 자본가들에게 짓밟히고 약탈당한 채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면서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강자들이 대부분을 앗아간 뒤 얼마 남지 않은 재화를 둘러싸고 약자들 사이의 치열한 투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이 대도시만큼 뻔뻔스럽고 몰염치하고 자기 위주인 곳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인류가 각자의 원칙과 목적을 가진 단자들로 분해되는 원자들의 세계는 바로 이곳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그러므로 이곳에서는 사회적 전쟁, 만인 대 만인의 전쟁이 공공연하게 선포된다... 결국에는 강자가 약자를 짓밟고, 소수의 힘 있는 자본가들이 모든 것을 차지하는 반면에 다수의 힘없는 빈자들은 목숨만 겨우 부지하게 된다.
- 프리드리히 엥겔스
사람들은 자신의 비참한 삶이 잘못된 정치경제 구조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오직 살아가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대적했다. 인간관계가 원자화된 사회 속에서 고립된 개인들은 외로운 삶의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영화 <자전거 도둑>의 첫 장면은 일자리를 구하려고 몰려든 인파로 북적거리는 직업소개소 앞이다. 오랫동안 실직상태에 있던 남성들은 오직 생존하기 위해 처절한 경쟁을 벌인다. 리치에게 자전거는 자신과 가족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줄 중요한 방편이다. 잃어버린 자전거를 찾아 헤매는 그의 모습을 보면 자전거가 마치 삶의 목표이자 그의 전부인 것만 같다. 아들이 길에서 넘어지고 자동차에 두 번이나 치일 뻔해도 아버지는 무관심하다. 별 것도 아닌 말에 욱해서 아들의 뺨을 때린다. 아들이 물에 빠진 줄로 오인하고 일시적으로 놀라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잃어버린 자전거 찾기에 골몰한다. 물질적 곤궁은 인간관계를 왜곡시킨다. 생활의 절박함은 가족의 소중함마저 증발시켜 버린다.
리치는 우연히 자전거를 훔친 소년을 발견하고 그를 뒤쫓는다. 막상 도둑을 붙들기는 했지만 훔쳐간 자전거도 발견되지 않고 범죄를 입증할 증거도 없다. 더욱이 소년의 삶도 궁핍하기 그지없다. 더럽고 좁은 집에 네 식구가 모여 살고 있다. 도리어 아이의 엄마는 리치에게 아들 일자리를 구해달라고 요구한다. 자전거 도둑을 찾기 위한 주인공의 여정은 스스로 자전거 도둑이 되면서 마무리된다. 리치의 자전거를 훔쳐간 소년도 어쩌면 다른 도둑의 피해자일지도 모른다. 생존이 화두인 곳에서 도둑은 도둑을 낳고 피해자는 가해자가 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속 인간이 처한 상황을 ‘소외’라는 개념을 통해 보다 구체화시킨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생산물로부터 소외된다. 노동자가 아무리 땀 흘려가며 공들여 만들어도 생산물은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 노동자의 손을 떠난 생산물은 자본가의 것이 되고, 그 대신 노동자는 자본가로부터 임금을 지급받는다. 생산수단인 자본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노동시장에서 노동을 하나의 상품처럼 팔 수밖에 없다.
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는 노동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잘 보여 준다. 미국 오클라호마 주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톰 조드 가족은 흉년으로 은행에 땅을 빼앗긴 뒤 무작정 희망의 땅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기나긴 여정 가운데 가족 중 일부는 죽고 일부는 떠나지만 천신만고 끝에 마침내 캘리포니아에 도착한다. 하지만 그곳의 땅은 이미 자본가들의 차지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약탈적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그 땅에서 모든 것은 상품화되고 가격이 매겨진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의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헐값에 사용되고 버려지는 노동력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강에 버려진 감자를 건지려고 그물을 가지고 오면 경비들이 그들을 막는다. 사람들이 버려진 오렌지를 주우려고 덜컹거리는 자동차를 몰고 오지만, 오렌지에는 이미 휘발유가 뿌려져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만히 서서 물에 떠내려가는 감자를 바라본다. 도랑 속에서 죽임을 당해 생석회에 가려지는 돼지들의 비명에 귀를 기울인다. 산처럼 쌓인 오렌지가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지켜본다.
- 소설「분노의 포도」
노동자들은 자신이 생산한 노동의 결실로부터 철저히 분리된다. 그들이 가꾸어낸 오렌지, 키워낸 돼지는 곧장 자본가의 손에 넘어가 시장에서 상품으로 팔린다. 과잉 생산된 상품은 자본가의 이윤을 보호하기 위해 폐기된다. 굶주림에 허덕이며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절망적인 눈으로 버려지는 음식을 바라본다. 허기진 배를 붙잡고 오렌지가 불태워지고, 돼지가 땅에 산채로 묻히는 걸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
또한 노동자는 생산과정으로부터도 소외된다. 분업화된 생산과정 속에서 노동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한두 가지의 작업만 반복하도록 강요받는다. 커다란 기계 속의 부속품처럼 노동자의 행위는 기계의 통제에 예속된다. 인간이 만든 기계에 의해 도리어 인간이 지배되는 것이다. 영화 <모던 타임스>에서 공장 노동자인 주인공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나사 조이는 작업을 반복한다. 기계의 회전이 빨라지면 주인공의 손동작도 덩달아 바빠진다. 식사시간마저 아끼기 위해 공장주는 ‘밥 먹여주는 기계’를 들여오고 주인공은 기계가 떠주는 음식을 받아먹는다. 작업 속도를 감당하지 못한 주인공이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 나사 바퀴와 한 몸이 되어 돌아가는 장면은 생산과정으로부터 소외된 채 일개 기계 부속품으로 전락한 인간의 모습을 씁쓸하게 묘사한다.
생산물과 생산과정으로부터의 소외는 사람 간의 소외로 이어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에서 소외된 인간들이 하나의 상품처럼 취급된다. 가격이 매겨지고 시장에서 사고 팔린다. 인간관계도 사회적 관계라는 본연의 빛깔을 잃어버린 채 마치 사물과 사물 사이의 거래관계처럼 여겨진다.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은 존귀한 존재처럼 여겨지고 돈이 없는 사람은 무가치한 존재로 취급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의 중요성도 화폐적 가치로 환산된다. 인간관계는 나에게 돈이 되는 관계와 그렇지 않은 관계로 나뉜다. 아쉬운 측은 항상 가지지 못한 자이고 아쉬울 게 없는 측은 가진 자이다. 그래서 전자는 복종해야 하고 모욕을 견뎌내야 하며 후자는 군림하고 무시하고 얕잡아본다. 하위계층 사람들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노동을 팔아 생존해야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들은 경쟁자일 뿐이다. 노동시장은 항상 상품을 팔려는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판매기회는 제한적이다. 경쟁자들을 물리치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는 구조다. 서로가 서로를 적대하는 환경 속에서 이기주의는 확산되고 인간성은 실종된다.
범죄는 한 마디로 자본주의의 착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라는 게 마르크스주의 범죄학자들의 생각이다. 범죄학자 리처드 퀴니(Richard Quinney)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지배계급이 저지르는 범죄를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첫 번째 유형은 자본주의 사회의 착취구조에 동화되어 저지르는 범죄다. 폭력범죄나 재산범죄 등 전형적인 범죄유형이 여기에 속한다. 자본주의에 의해 억압과 착취를 당한 자들이 이러한 비인간적인 조건들을 내면화한 나머지 다른 동료 인간들의 생명과 재산을 동일한 방식으로 약탈한 결과가 바로 살인이고 강도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자체가 약탈적이기 때문에 약탈적인 행위가 유발된다는 논리다. 사람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깨닫고 이를 극복하기보다는 그저 주어진 환경에 어떻게든 적응하고 동화하려는 그릇된 인식의 결과이다.
<자전거 도둑>에서 리치와 가족의 생계는 오직 한 대의 자전거에 달려있다. 그렇기 때문에 리치는 도둑을 잡아 자전거를 되찾는데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가족을 비참과 곤궁으로 내몬 근본적인 원인이 착취적인 경제구조에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리치가 전당포 창구에서 침대보를 맡길 때 안쪽에는 다른 노동자들이 저당 잡힌 침대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마치 자본가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축적한 재화처럼 보인다. 리치는 자전거를 구하기 위해 침대보마저 뺏겨야만 하는 상황에 분노하기보다는 그렇게 해서라도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음에 기뻐한다. 그런 그가 마지막에 선택한 해결책도 다른 사람의 자전거를 약탈하는 거였다.
두 번째 범죄유형은 자본주의 사회의 착취구조에 대한 저항으로서 이러한 행위는 지배계급에 의해 범죄로 정의된다. 노동자들이 벌이는 파업이 대표적이다. 적극적 행위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항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식의 표현이다. 영화 <카트>의 주인공 선희는 정치적 의식이 형성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회사의 지시라면 무조건 순종하는 모범직원이었지만 회사가 일방적으로 약속을 깨고 해고 통보를 해오자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다. 처음엔 오직 복직에 대한 기대 때문에 마지못해 노조에 참여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동료직원들과는 연대감이 두터워지고 폭력과 협박으로 일관하는 회사에 대해서는 분노심을 갖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선희는 길어진 파업에 지쳐버린 조합원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투쟁에 앞장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비정규직들을 투명인간 보듯이 무시하지 말고 인간으로 대우해달라고 목소리 높여 외친다.
2005년 프랑스 파리 교외의 한 이민자 거주지에서 시작된 소요사태는 파리 주변 22개 소도시와 파리 중심가, 그리고 지방까지 들불처럼 확산되었다. 불과 3주 동안의 소요사태로 9천여 대의 차량이 불타고 3,000여 명이 체포됐으며, 100명이 넘는 경찰관이 부상을 당했다. 당시 시라크 정부는 3개월 동안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대응했다. 사건의 발단은 두 청소년의 죽음이었다. 경찰의 검문을 피해서 달아나던 아프리카계 십 대 청소년들이 변전소에 숨어들었다가 감전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불행한 사고는 프랑스 사회 속 해묵은 갈등의 뇌관을 건드렸고 급기야 프랑스 사회 전체를 뒤흔들 만큼 엄청난 폭발력으로 터져버리고 말았다.
프랑스어로 ‘교외’ 또는 ‘변두리’라는 의미의 방리유는 외국계 이민자들의 집단거주지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고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자 프랑스 정부는 북아프리카와 아랍지역에서 외국인 노동인력을 대거 수입했다. 그러나 1970년대 발생한 오일파동은 수많은 공장들의 부도와 대량 실업사태로 이어졌다. 이때부터 방리유는 실직한 외국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빈민 지대로 전락하고 말았다. 주거환경은 갈수록 낙후되고 범죄와 무질서의 온상이라는 낙인이 붙었다. 이 지역 청년들은 노동시장에서 방리유 출신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차별을 당해야만 했다. 높은 실업률은 이 지역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이다. 교육제도에 적응하지 못한 청소년들의 이탈도 가속화되었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이민자 2세들은 스스로를 프랑스인으로 여기지만 프랑스 주류사회는 이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민정책 및 경제정책의 실패에서 비롯된 방리유의 게토화와 이민자의 주변화 문제에 대해 프랑스 정부는 강경일변도의 치안정책으로 대응했다. 1990년대부터 치안 불안, 도시 폭력과 같은 단어들을 정부가 본격적으로 그리고 빈번하게 언급하기 시작했다. 방리유는 치안 취약지역으로, 이곳 출신 이민자들은 ‘위험 계급’으로 분류되었다. 리트머스 시험지에 액체가 스며들듯 불안과 공포가 파리지엔느의 마음 안에 점점 퍼져갔다. 도시 폭력 문제는 우파 정치인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정치 어젠다로 채택되기에 이른다. 당시 내무부장관이었던 니콜라스 사르코지는 방리유 문제에 대해 “쓰레기와 불량배들을 진공청소기로 쓸어버리자!”라는 발언으로 방리유 청년들을 자극했다. 경찰은 차별적이고 공격적인 법집행으로 집권당의 치안정책에 보조를 맞추었다. 도시 폭력에 대한 집단적 공포에 사로잡힌 대중들은 정부의 ‘똘레랑스 제로’(무관용) 정책을 지지하며 힘을 실어주었다.
공식 범죄통계는 법집행의 강도와 무관하지 않다. 경찰이 단속을 강화하면 더 많은 법 위반행위가 적발되고 결과적으로 범죄율도 상승한다. 치안 취약지역인 방리유에 경찰력이 집중되고 공격적인 법집행을 하면서 범죄율이 덩달아 높아졌다. 경찰의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태도에 대한 반발로 경찰과 방리유 청년들 사이의 긴장과 갈등이 더욱 고조되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강력한 치안정책을 정당화하는 논리에 동원되었다. 문제는 노동시장에서의 차별, 높은 실업률, 사회적·문화적 고립화지만 범죄와 무질서, 그리고 치안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결국 경제정책과 이민정책의 실패에 대한 해법을 치안정책에서 찾은 셈이다. 하지만 미봉책은 미봉책일 뿐이다. 두 소년의 죽음이 도화선이 된 2005년 파리 소요사태는 방리유 지역에 누적된 갈등의 실체를 확인시켜주었다. 갈등은 방리유라는 고립된 공간을 뛰어넘어 프랑스 전역으로까지 확산되고 말았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국가의 본질이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입법권을 장악한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구체화한 법을 폭력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부를 독점하려는 소수의 욕심쟁이들과 이들로부터 핍박을 받는 다수의 민중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국가는 소수의 강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한다. 강자가 약자들에게 자행하는 착취와 약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동원하는 존재가 바로 국가다. 그래서 불평등과 부조리가 있는 곳에는 국가폭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필요에 따라 스스로 생산한 물건은 관습이나 여론, 정의심과 상호 합의에 의해 보호된다. 폭력으로 보호할 필요가 없다. 수만 에이커의 삼림지를 한 명의 지주가 소유하고 있고, 근처에 사는 수천 명의 사람에게 땔감이 없다면, 삼림지를 보호하는 데는 폭력이 필요하다. 수 세대의 노동자들이 착취를 당했으며 현재도 여전히 착취를 당하고 있는 공장과 작업장 역시 마찬가지다.
- 톨스토이
서로 다른 계급 간에 이해관계로 인한 충돌이 발생할 때 법은 중립적인 중재자의 스탠스를 취하지 않는다. 법은 지배계급의 편에 서서 그들의 이익을 대변한다. 플라톤의 「국가」에 등장하는 소피스트 트라시마코스의 말처럼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 비슷한 의미로 미국 사회학자 도날드 블랙(Donald Black)은 적용되는 법의 규모가 당사자들의 상대적 지위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한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계층일수록 그들의 이익에 침해가 되는 행위는 보다 중대한 범죄로 다루어진다. 또한 높은 계층일수록 동원할 수 있는 법적 자원이 풍부하다. 특히 당사자 사이의 계층적 거리가 클수록 높은 계층이 낮은 계층에 대해 적용하는 법의 규모가 증가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보자. 미국에서는 음주운전을 DWI(Driving While Intoxicated)라고 줄여서 부른다. 그런데 여기에서 파생된 DWB(Driving While Black)라는 말도 있는데 번역하자면 ‘흑인 운전’ 정도가 된다. 음주상태에서 운전하는 것이 불법인 것처럼 흑인인 상태로 운전하는 것도 불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 조사에 의하면 미국 뉴저지 주에 거주하는 흑인의 비율이 15%인데 반해 경찰의 차량 검문을 받은 전체 운전자의 73%가 흑인이었다. 매사추세츠 주에서는 흑인 운전자가 경찰 검문 중 차량 내부 수색을 당할 가능성이 백인 운전자에 비해 무려 13배 이상 높았다.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젊은 흑인 남성으로 살아간다는 건 경찰, 법원, 교도소로부터 훨씬 더 많은 통제를 받고 살아가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경찰의 불심검문과 체포, 검사의 기소, 법원의 유죄판결 등 각 법집행 단계에서 인종 간 차이가 발생되고, 이러한 차이가 누적되어 교도소는 젊은 흑인 남성으로 채워진다. 평생 동안 흑인 남성 3명 중 1명은 교도소에 수감된다. 백인 남성보다 6배 이상 높은 수치이다. 이런 인종 간의 불균형을 단순히 기질의 차이나 실제 범행 빈도의 차이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젊은 흑인 남성은 ‘위험집단’, 그들의 주거지역은 ‘우범지역’라는 사법당국의 인식과 무관하지 않다.
2014년 미주리 주 퍼거슨 시에서 발생한 소요사태는 그동안 미국 주류사회와 경찰이 흑인 남성을 범죄자로 낙인찍어온데 대한 누적된 불만이 폭발한 사건이었다. 소요사태는 18세의 흑인 청소년 마이클 브라운의 죽음에서 촉발되었다. 경찰은 담배를 훔친 혐의로 브라운을 검거하는 과정에 6발의 총을 발사해 그를 숨지게 했다. 사망 당시 브라운은 비무장 상태였다. 최근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 시에서 발생한 조지 플로이드 사망사건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체포 과정에 백인 경찰이 “숨을 쉴 수가 없다”라고 호소하는 플로이드의 목을 무릎으로 찍어 누르는 영상이 인터넷을 타고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곳곳에서 대규모 항의시위가 이어졌고 ‘Black Lives Matter’(흑인 생명도 소중하다)의 구호가 미국 전역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런데 미국 사법시스템의 문제를 단순히 인종차별적 법집행의 차원에서만 바라본다면 근시안적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의 실질적 지배자이자 권력자는 바로 자본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은 일차적으로 자본가들의 이익과 의지를 대변한다. <카트>에서 계약직 직원과 회사 간의 대립은 마치 성경 속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을 보는 듯하다. 회사는 실력 있는 변호사로 구성된 법무팀을 가동해 노조를 압박한다. 파업 주동자에게는 엄청난 규모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진행한다. 경찰도 시위대의 편은 아니다. 마트에서 농성하는 직원들을 업무방해죄 현행범으로 체포하기에 급급하다. 맨 몸으로 저항하는 이들에게 경찰은 물대포로 응수한다.
범죄를 통제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정책 자체가 자본가들의 이익과 직접적으로 맞물려 있다는 견해가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 로익 바캉(Loïc Wacquant)은 자본주의 사회의 형벌제도가 두 가지 차원에서 자본가들의 이익에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교도소의 재화와 용역 공급을 통해 자본가들이 이익을 얻는다. 대표적인 사례가 정부를 대신해 민간 기업에 의해 운영되는 민영교도소다. 2017년 말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가 발표되자마자 최대 민영교도소 업체인 CoreCivic의 주가가 43%나 폭등했다. 2위 업체인 GEO그룹의 주가도 21% 상승했다. 범죄와 불법 이민자 문제에 대한 당선자 도널드 트럼프의 강경정책이 기대감을 높였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선거기간 동안 도시에 만연한 폭력이 불법 이민자들에 의해 저질러지며 이러한 문제가 통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음을 수차례 강조한 바 있었다. 그동안 민영교도소 업체들은 정부의 강경일변도 형사정책을 바탕으로 급성장해왔다. 특히 미국 공화당 정부가 주도해 온 ‘범죄와의 전쟁,’ ‘마약과의 전쟁’ 속에서 법정 형량이 증가하고 수감기간이 늘어나자 교도소 수감 인구가 급증했다. 일차적 수혜자는 바로 민영교도소 업체였다. 2014년 양대 민영교도소 업체가 벌어들인 매출액이 무려 3조 7천억 원(33억 달러)으로 2006년에 비해 거의 두 배 이상 증가했다.
둘째, 형벌제도는 고용시장에서 저임금 노동자 수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자본주의 시스템과 조응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정한 규모의 잉여노동력은 자본가의 이윤 보장을 위해 필수적이다. 쉽게 말해 잉여노동력이란 일할 의사와 능력이 있지만 아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구직활동 중에 있는 사람들인데, 실업률은 한 사회의 잉여노동력 규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표다. 그런데 자본가의 입장에서 실업률은 양날의 칼과 같다. 먼저 고용주가 더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일정한 수준의 실업률이 유지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저임금에도 불평하지 않고 노동력을 제공할 사람들이 충분히 확보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업률이 너무 높아지면 도리어 자본가의 이익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약탈적 자본주의에 대한 하위계층의 불만과 반발이 폭증해 사회가 전체적으로 불안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소비심리가 위축되어 시장경제가 후퇴할 수도 있다.
사실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사회보장 확대, 고용증대 및 안정성 보장, 소득 양극화 해소 등의 정책을 통해서 해결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자본권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자본가의 이익에 반하지 않으면서 보다 손쉬운 방법인 형벌제도를 활용한다. 위반행위에 대한 단속과 처벌을 강화하여 더 많은 구직인구를 교도소로 보내면 실업률은 떨어진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가 내포한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된 사회적 불안이 마치 범죄와 무질서로 인해 발생한 문제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이러한 착시현상으로 인해 불평등과 착취의 주범인 자본권력을 겨누어야 할 칼날이 소수의 하위계층 범죄자에게로 향하게 된다.
교도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자들은 전과자라는 딱지 때문에 노동시장에서 설 자리를 잃는다. 하지만 이들조차도 잉여노동력으로서 자본가의 노동비용을 낮춰주는데 일정 부분 기여한다. 일정한 수준의 실업률을 유지하는데 보탬이 되기도 하고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기여하기도 한다. 이들은 노동계층 피라미드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 채로 열악한 노동조건과 최저임금에 만족하며 노동력을 제공할지 아니면 또다시 불법에 몸담을지 선택을 강요받는다.
미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형벌 제도의 재편은 노동시장의 재편을 보완하고 지탱하는 식으로 동시 진행되고 있다. 형무소는 이 새로운 노동시장에서 완전 가장자리로 밀려난 자들을 ‘쓸어다 담는’ 동시에 ‘쓸어다 버리는’ 두 역할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 로익 바캉
로익 바캉은 교도소가 노동시장의 필요에 따라 잉여노동력의 규모를 늘리고 줄이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방리유와 같은 게토는 잉여노동력을 ‘쓸어다 담고’, ‘쓸어다 버리는’ 공간이다. 이곳의 외국계 청년들은 사회적으로 또한 공간적으로 고립되고 노동시장에서도 주변화된 존재들이다. 노동시장에서 버림받은 채 위험집단으로 분류되어 게토와 교도소를 왕복하면서 살아간다. 어떤 의미에서 게토와 교도소라는 두 개의 고립된 공간은 기능적으로 연결된 듯 보인다. 잉여노동력 관리를 위해 게토와 교도소는 협업하고 있다. 그리고 협업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본주의 시스템을 유지하고 자본가의 이익을 보장하는 데에 있다.
참고문헌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국가는 폭력이다: 평화와 비폭력에 대한 성찰」, 조윤정 옮김(달팽이, 2008)
로익 바캉, 「가난을 엄벌하다」, 류재화 옮김(시사IN북, 2010)
이기라·양창렬 외, 「공존의 기술」 (그린비, 2007)
장 자크 루소, 「인간불평등 기원론」, 주경복·고봉만 옮김(책세상, 2003)
존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 2권, 김승욱 옮김(민음사, 2008)
칼 마르크스, 「자본」, 강신준 옮김(길, 2008)
프리드리히 엥겔스,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 이재만 옮김(라티오, 2014)
Donald Black, The Behavior of Law (Emerald Publishing, 2010)
Richard Quinney, Class, State and Crime (David McKay Company, Inc, 1977)
Sunghoon Roh & Matthew Robinson, “A Geographic Approach to Racial Profiling: The Microanalysis and Macroanalysis of Racial Disparity in Traffic Stops,” Police Quarterly, Vol.12, Issue 2(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