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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폴 Oct 19. 2020

차이는 혐오를 낳고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

우린 적이 아닌 친구야. 적이 되어서는 안 돼. 뒤틀린 열정으로 인해서 사랑의 끈이 끊겨선 안 돼.


- 데릭,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는 백인우월주의에 빠진 한 형제에 관한 얘기이다. 형 데릭은 소방관인 아버지가 마약 제조장에 발생한 화재를 진압하다가 총에 맞아 죽은 뒤 백인우월주의 단체 D.O.C. 에 가담한다. 불의의 사고로 인한 아버지의 죽음을 급격히 늘어난 이민자들의 탓으로 돌린다. 어느 날 데릭은 아버지의 차를 훔치려던 흑인들을 무참히 살해한 뒤 교도소에 수감된다. 동생 대니는 이런 형을 우상처럼 여기며 자신도 D.O.C. 에 가입한다. 3년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데릭은 백인우월주의 집단을 탈퇴하고 대니에게도 탈퇴하라고 설득한다. 혼란스러워하는 동생에게 데릭은 교도소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얘기해준다. 보호막이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어울렸던 백인 패거리들에게 오히려 성폭행을 당하고, 자신이 그토록 증오했던 흑인 수감자의 도움과 보호 덕택에 무사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데릭과 대니는 집으로 돌아와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나치 상징과 히틀러 사진을 모조리 뜯어 버린다. 다음 날 아침 형제는 D.O.C 일당이 전날 밤 유색인종 무리의 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얼마 후 대니는 학교 화장실에서 흑인 소년의 총에 맞아 쓰러진다. 

  

영화는 데릭이 유색인종들을 향해 거침없이 뿜어내는 증오와 혐오를 스크린을 통해 강렬한 톤으로 전달하고 있다. 그는 이민자들을 ‘기생충’, ‘구더기’로 부르면서 마치 벌레 같은 존재처럼 여긴다. 세스라는 이름의 백인 우월주의자 친구는 공교롭게도 해충 방역업체 직원으로 일하는데 유색인종을 향해 박멸해야 할 해충이라고 말한다. 이들에게 피부색은 사람들을 구별하는 절대적 기준이다. 검은색, 갈색, 노란색 피부를 지닌 자들은 인종적으로 저열한 존재로 분류된다. 유색인종은 도덕적으로도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이민자들이 몰려와 평화롭던 마을을 범죄 천국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성실하게 일하는 미국인들이 마땅히 누려할 혜택들을 자격 없는 이민자들이 모조리 빼앗아 가버렸다. 범죄문제, 복지문제, 심지어 에이즈 문제까지 미국 사회가 앓고 있는 병이란 병은 일차적으로 이러한 이민자들의 책임으로 여긴다. 

  

아버지가 사고로 죽기 전까지 데릭은 평범하고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갑자기 극단적 백인우월주의에 빠져든 이유가 얼핏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의 충격에서 비롯된 증오심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사고 직후 방송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라를 위해 성실하게 일해 온 아버지가 ‘사회 기생충’인 유색인종에게 죽임을 당했다며 분노를 터뜨린다. 그러나 데릭의 마음속 이민자들을 향한 혐오와 증오의 뿌리는 그보다 깊다는 사실이 나중에 동생 대니의 기억을 통해 드러난다. 영화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데릭과 아버지가 식사자리에서 나누는 대화 장면을 조명한다. 데릭이 박사학위를 두 개나 가지고 있는 흑인 역사 선생님에 대해서 칭찬을 늘어놓자 아버지는 그가 하는 말을 믿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저 ‘검둥이의 헛소리’(nigger bullshit)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미국 정부가 흑인들을 우대하기 위해 취하고 있는 정책들로 인해 오히려 백인들이 차별을 받고 있다고 아들을 가르친다. 

  

차별과 혐오에는 역사성이 간직되어 있다. 질긴 생명력으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그리고 그다음 세대로 전수된다. 교도소 경험을 통해 과거 자신의 그릇된 생각을 깨닫게 된 데릭은 더 이상 혐오가 대물림되지 않도록 동생 대니를 백인우월주의 집단에서 건져낸다. 형제는 그들의 의식을 뒤덮고 있던 인종차별이라는 허위의 장막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하지만 대니는 증오심에 가득 찬 흑인 소년의 총에 살해당하고 만다. 죽은 동생을 끌어안고 울부짖는 데릭의 모습에서 혐오와 증오로 점철된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추기에 너무도 무기력한 한 인간을 발견한다. 


증오의 흔적을 지울 수 있을까? -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

 

 데릭이 자신의 방을 가득 채웠던 나치 상징물들을 제거한 뒤 샤워하는 장면이 있다. 마치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전 과거의 잘못을 깨끗이 씻어버리려고 행하는 성스러운 의식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샤워를 마치고 거울 앞에 섰을 때 그의 가슴에는 선명하게 새겨진 하켄크로이츠 문신이 여전히 그대로다. 쉽게 지워지지 않는 문신과 같은 차별과 혐오, 그리고 폭력의 악순환을 도대체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가장 일반적인 인종의 분류방식은 피부색 등 신체적 특징을 기준으로 흑인종(니그로이드 계), 백인종(코카소이드 계), 황인종(몽골로이드 계)으로 나누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인종의 구분이 생물학적 차이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자연적이고 불변적이라고 이해한다. 그런데 과학적 분석을 통해 인종 집단들 사이의 유전적 차이가 매우 미미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신체적 특징의 94%는 같은 인종에 속한 개인 간의 유전적 차이이고 불과 6%만이 서로 다른 인종 집단 간의 차이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백인과 흑인이 유전적으로 다른 정도보다 백인들끼리 또는 흑인들끼리 다른 정도가 더 크다. 또한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는 인종집단일수록 유전적 유사성이 더 높게 나타난다. 활발한 접촉을 통해 사람들 사이에 유전적 교류가 일어나고 이러한 방식으로 인류는 단일 종으로서의 동질성을 유지해왔다. 

  

1998년 미국 인류학회는 인종에 대한 학회의 공식 입장을 채택하면서 그동안의 과학적 연구결과들을 토대로 인류를 생물학적 특징에 따라 구분하는 전통적 ‘인종’(race)의 개념을 거부했다. 현재 통용되는 인종의 분류는 생물학적 차원에서 결정된 것이 아닌 역사적, 사회적으로 형성된 관념에 불과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과거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정복하여 식민지로 만들고 그곳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는 과정에서 채택된 불평등의 이데올로기가 바로 인종의 분류다. 유럽인, 아프리카인, 인도인 간의 차이를 확대 해석하여 상호 배타적인 인종적 범주화를 창조한 것이다. 더 나아가 인종집단들을 엄격하게 서열화할 뿐만 아니라 인종 간 불평등과 차별을 신이 부여한 자연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정당화했다. 

  

인류학적 관점에서 볼 때 피부색에 부여되는 의미는 특정 사회가 처한 환경과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Marvin Harris)는 중앙 아프리카인들은 특히 검은 피부를, 북유럽인들은 특히 하얀 피부를 가지게 된 이유가 지역의 기후환경에서 비롯된 적응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피부색을 결정하는 멜라닌 색소는 태양의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 년 내내 강한 햇볕이 내리쬐는 아프리카에서는 피부암의 위험이 높기 때문에 충분한 양의 멜라닌 분비가 생존에 유리하다. 반면에 북유럽에서는 부족한 일조량 탓에 비타민 D 결핍으로 구루병이나 골종의 발생 위험이 높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는 하얀 피부가 비타민 D의 생산에 유리하기 때문에 생존에 유리한 신체적 조건이 된다. 일만 년쯤 거슬러 올라가면 두 지역 모두 조상들의 피부색이 갈색이었겠지만 이러한 자연선택의 과정을 거쳐 우월한 피부색 유전자가 살아남은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진화과정에서 자연선택뿐만 아니라 사회적 선택도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게 마빈 해리스의 설명이다. 아프리카의 부모들은 검은 피부의 아이들이 병에도 잘 안 걸리고 건강하게 자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북유럽의 부모들은 하얀 피부의 자녀들일수록 골격이 우람하고 힘이 세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아프리카에서는 검은 피부의 아이를, 북유럽에서는 하얀 피부의 아이를 선호하게 되었고 선호하는 자식에게 부모의 보살핌과 음식이 우선적으로 제공되었다. 아프리카에서는 검은색이 건강과 아름다움을 의미하게 되었고 흰색은 북유럽에서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었다.        

  

어쩌면 인종은 사회적으로 형성된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 중요한 점은 사회가 특정 인종집단에게 부여한 의미가 된다. 브라질에는 40개의 다른 인종 유형이 존재하는데 피부색 톤이 어두울수록 낮은 계층에 속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어떤 개인이 어떤 인종에 속하는지는 그의 피부색보다 그의 부와 사회적 지위에 의해 정해지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돈이 사람을 희게 만든다’(Money whitens)는 표현이 있다. 실제로 검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이라도 아주 돈이 많거나 교육 수준이 매우 높으면 실제보다 ‘덜 검은’ 인종에 속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반대로 가난하고 사회적 지위가 낮으면 실제로는 상대적으로 밝은 피부 톤을 가진 사람이라도 검은 인종집단에 속한 것으로 여겨진다. 

  

피부색이 검거나 희거나 하는 문제는 인종집단 간의 힘의 차이와 관련이 있다. 주인과 노예, 고용주와 고용인, 지배자와 피지배자, 다수자와 소수자 등의 관계 속에서 피부색의 의미가 결정된다. 즉 지배와 종속, 통제와 복종을 둘러싼 상대적 힘의 차이가 흑과 백 속에 담겨 있다. 백인이 주류인 미국 사회에서 흰색은 지배와 통제를, 검은색은 종속과 복종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가 불변적이거나 고정적이지 않다. 만약 권력관계가 바뀌면 색의 의미도 함께 변할 수 있다. <아메리칸 히스토리 X>에서 데릭은 교도소 세탁 작업장에서 노역을 하게 된다. 그곳에서 만난 흑인 재소자가 백인우월주의에 쪄든 데릭에게 경고의 의미로 말한다. “이곳에서는 네가 흑인이야.” 교도소 안에서는 다수를 점하고 있는 유색인종이 지배계층이고 소수인 백인이 피지배계층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려 한 것이다. 교도소라는 환경 속에서 흑인은 백인이 되고 백인은 흑인이 된다. 피부색으로 구분된 인종집단에게 부여된 의미는 권력관계에 따라 가변적이고 유동적이다.

  

역사적으로 서구 사회가 비서구 사회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인종적 차이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생산되고, 확산되고, 소비되었었다. 예를 들어, 세계적인 문화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는 식민지화 과정에 서구 열강들이 동양에 대해 상상하고 날조해 낸 관념이 바로 ‘오리엔탈리즘’이라고 주장한다.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한 서양의 부정확한 지식과 편견이 낳은 담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서양인에게 동양이란 존재는 구체적인 영토나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이데올로기와 동격이다. 하나의 허상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데올로기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은 서양과 동양이라는 이분화를 통해 서양의 상대적 우월성을 입증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일반적으로 스스로를 긍정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열등해 보이는 타자를 정해놓고 자신과 비교하는 것이다. 동양과 대조되는 이미지, 특성, 관념으로 서양은 스스로를 정의했다. 한 마디로 동양을 지렛대 삼아 서양의 우수함을 확인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이 동양에 관계하는 방식’이며 그 속에는 동양을 낮춰 보는 서양인들의 시선이 깔려있다.


오리엔탈리즘에 대하여 지금까지 설명해 온 지속성과 힘을 준 것이 바로 헤게모니이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문화적 헤게모니가 작용한 결과이다... 이러한 집단적 관념은 ‘우리’ 유럽인을 ‘그들’ 비유럽인 모두에 대치되는 것으로 인식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유럽 문화의 중요한 구성요소야말로 바로 유럽 문화를 유럽 안팎에서 헤게모니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곧 유럽이 아닌 모든 민족과 문화를 능가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유럽인의 유럽관이 바로 그것이다.

- 에드워드 사이드

  

동양에 대한 상대적 우월감은 서양에게 동양에 대한 헤게모니를 부여했다. 또한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지배논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양인의 시각으로 동양을 재구성하고 재정의해야 했다. 동양인은 미개하고 미숙하고 열등한 존재여야만 했다. 동양은 어두운 세계이자 야만의 세계여야만 했다. 그럼으로써 유럽인들은 암흑의 대륙에 문명의 횃불을 밝힌 자들로 격상될 수 있었다. 오리엔탈리즘은 ‘지배의 담론’이자 ‘지배를 위한 담론’이었던 것이다. 



고정관념이라는 이름의 폭력


1989년 4월 19일 밤, 미국 뉴욕시의 센트럴파크에서 조깅하던 28세의 백인 여성이 강간과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부상 정도가 워낙 심각해서 12일 동안이나 혼수상태에 있다가 깨어났는데 불행히도 피해자는 범인의 인상착의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경찰은 용의자로 사건 당일 밤 공원 근처를 배회했던 흑인과 히스패닉 소년 5명을 체포했다. 그런데 부모나 변호인의 입회도 없이 진행된 경찰의 강압수사와 회유에 못 이겨 소년들은 서로에 대해 거짓진술을 하고 말았다. 범행 현장에서 채취한 DNA 증거가 소년들 중 누구와도 일치하지 않았고 아무런 물증도 없었지만 인종적 편견에 사로잡힌 경찰과 검사는 오직 강압수사를 통해 받아낸 진술만으로 이들을 기소했다. 

  

뉴욕타임스가 이 사건을 1980년대에 발생한 범죄사건 중 가장 많이 보도된 사건이라고 할 만큼 당시 일반 대중으로부터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언론들은 유색인종 남성이 백인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며 보도에 열을 올렸다. 특히 당시 부동산 사업가로 유명세를 탔던 도널드 트럼프가 CNN방송에 출연해 언론에 의해 ‘센트럴파크 파이브’로 불리던 이 소년들을 증오한다고 말하며 미국 사회도 이들을 증오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더 나아가 그는 모든 일간지에 전면광고를 싣고 사형제도의 부활과 경찰인력의 증원을 요구하기도 했다. 결국 소년들은 유죄가 확정되고 5년에서 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2001년 진범이 나타나면서 소년들의 무고함이 세상에 밝혀지게 되었다. 살인과 연쇄 강간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한 남자가 과거 범행을 자백을 했고 DNA 검사를 통해 그가 진범임이 확인되었다. 마침내 소년들은 누명을 벗고 풀려났다. 하지만 이미 길게는 13년이라는 시간을 교도소에서 보낸 후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센트럴파크 성폭행 사건이 발생하던 바로 그날 뉴욕시에서는 적어도 10건의 강간사건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중 두 사건에서는 피해자가 살해되기까지 했다. 한 살인범은 피해자를 강간한 후 10층 건물에서 밀어 떨어뜨려버리기까지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러한 사건들은 언론이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그 대신 언론과 대중의 관심은 오로지 센트럴파크 성폭행 사건에만 쏠렸다.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일까? 아마도 피해자와 가해자의 인종 때문이었을 것이다. 센트럴파크 사건은 흑인과 히스패닉 남성이 백인 여성을 상대로 저지른 범죄였다. 더구나 피해 여성은 예일대 대학원을 졸업한 젊은 금융인이었다. 이에 반해 다른 사건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흑인이거나 히스패닉이었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 남성에게 부여된 범죄자의 이미지, 특히 잠재적 강간범이라는 고정관념은 뿌리가 깊다. 노예로 끌려온 아프리카 흑인들에게는 저능과 부도덕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졌고, 이 때문에 흑인 노예에 대한 백인들의 폭력은 정당화되었다. 1915년에 제작된 무성영화 <국가의 탄생>은 흑인들의 야만성과 사악함을 강조하면서 인종차별정책을 정당화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흑인들을 마치 야수 같은 본성을 지닌 존재처럼 묘사함으로써 흑인에 대한 왜곡된 고정관념을 만들어냈다. 노예 출신 흑인이 백인 주인의 딸에게 강압적으로 구애하다가 딸이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는 장면은 마치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을 강간하려는 모습처럼 그려졌다. 센트럴 파크 사건에서 가해자로 흑인과 히스패닉 소년들이 지목되면서 ‘백인 여성을 공격하는 흑인 강간범’이라는 뿌리 깊은 고정관념이 자극되었을 것이다.   

  

인종을 둘러싼 고정관념은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 어느 사회에서든 발견되는 현상이다. 2018년 봄 제주도에 수백 명의 예멘 난민이 찾아들었다. 자국의 내전을 피해 말레이시아로 건너갔다가 체류기간이 만료되자 무비자로 입국이 가능한 제주도를 선택한 것이었다. 낯선 이방인의 예고 없는 방문에 많은 한국인들이 깜짝 놀랐고 곧이어 난민 입국을 반대하는 시위와 국민청원이 이어졌다. 온라인을 타고 확인되지 않은 억측과 소문들이 급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가짜 난민에 이어 심지어 테러리스트 침투설까지 등장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제주도에서 여성 실종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자 예멘인들이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떠돌면서 사람들의 공포심을 더욱 부추겼다. 나중에 난민들과는 무관한 변사사건들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슬람 문화권에서 행해지는 여성할례와 ‘타하루시’라는 성폭행 놀이가 온라인 게시판에 소개되면서 성범죄에 대한 우려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우리가 예멘인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는 이미 이슬람에 대한 고정관념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고정관념은 테러, 여성할례, 일부다처제, 히잡 등의 이미지로 짙게 물들어 있다.   

  

인종주의적 고정관념은 언어를 통해 구체화될 때 폭력성을 띄게 된다. 영화 <그랜 토리노>의 주인공 월트는 은퇴 후 무료한 삶을 살아가는 노인이다. 젊은 시절 한국전쟁에 참전한 적이 있고 그 후에는 포드 자동차 공장에서 오랜 기간 일을 했었다. 그의 옆집에는 몽족 이민자 가족이 살고 있다. 월트는 아시아인 이웃에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시한다. 시시때때로 이웃을 향해 얼굴을 찌푸리고 재수 없다는 투로 침을 뱉기도 한다. 어느 날 옆집에서 요리에 쓸 닭의 모가지를 치는 장면을 목격한 월트는 야만인이라고 부르면서 혐오감을 드러낸다. 이웃집 사람들을 ‘쌍꺼풀 없는 사람들’이라고 폄하한다. 

  

사람들이 흑인을 니거(nigger), 동아시아인을 칭크(chink), 아랍인을 지하드(jihad)라고 부를 때 그 단어에는 폭력성이 담겨 있다. 흑인을 향해서는 유전적 열등성을, 동아시아인에 대해서는 외모적 열등성을, 아랍인에게는 테러리스트라는 의미를 강제적으로 부여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열등하고 결핍되고 극단적인 무엇으로 억지로 끌어내리는 자체가 바로 폭력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인종차별적 단어들이 폭력적인 이유가 비단 특정 인종을 비하하거나 모욕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언어를 통해 어떤 대상을 상징화하는 자체에 이미 폭력성이 담겨있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언어를 통해 구현되는 폭력을 ‘상징적 폭력’이라고 부른다. 그는 언어가 대상의 본질로부터 특정한 의미만을 강제로 추출해낸다는 점 때문에 폭력적이라고 말한다. 


일단 언어는 그것이 가리키는 사물을 단순화하고, 사물을 단일한 하나의 속성으로 환원해버린다. 언어는 사물을 부분 부분으로 절단하고, 그 유기적 통합을 파괴하며, 각 부분과 속성을 자율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언어는 사물을 의미의 영역으로 밀어 넣는데, 이 의미 영역은 결국 그 사물에게는 외부적인 것이다. 금을 ‘금’이라 이름 붙임으로써 우리는 한 금속을 그 자연 조직으로부터 폭력적으로 적출해 내고, 그 금속에 부, 권력, 영적인 순수함 등 우리의 꿈을 부여한다. 사실 그런 꿈들은 실제 금과 아무 관련이 없는데 말이다.

- 슬라보예 지젝

  

언어는 각 존재들의 개별성을 앗아가 버리고 집합적 의미의 ‘무엇’으로 전락시킨다. 이로 인해 고유한 존재로서 가지고 있는 풍부한 이야기들과 다채로운 의미들은 상실해 버리고 단일한 집합적 의미 아래에 강제적으로 편입되고 만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적하듯이 오리엔탈리즘은 개인을 하나의 집합적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오리엔탈리즘의 이데올로기 아래에 개인은 실종되고 오직 집합체로서의 ‘동양인’만 존재하게 되어 버렸다. 

  

영화 <크래쉬>는 다양한 인종과 민족들이 도처에서 충돌하고 갈등하며 살아가는 미국 L.A. 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흑인 청년들은 자신들을 범죄자 취급하는 백인들의 시선에 분개한다. 총기 판매상인은 아랍계 손님을 향해 ‘빈 라덴 닮은 것들’이라고 욕설을 퍼붓는다. 추돌사고로 인해 화가 난 한국계 미국인은 상대 차량의 히스패닉계 운전자를 향해 무턱대고 불법체류자라고 부른다. 히스패닉계 자물쇠 수리공은 빡빡 깎은 머리와 문신 때문에 조직폭력배로 의심받는다. 인종적 편견과 고정관념이 지배하는 도시 속에서 개인은 증발하고 집단만이 존재하는 것 같다. 

  

영화 속에서 흑인 형사가 자신의 동료이자 애인인 여자 형사를 멕시코인으로 부른다. 그러자 여자 형사는 자신의 아빠는 푸에르토리코, 엄마는 엘살바도르 출신이라고 고쳐준다. 애인이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도 모른다며 화를 내자 남자 형사가 그녀에게 묻는다. “남미 출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던지 사는 꼴이 왜 다 비슷해?”  

  

지젝은 언어의 폭력성이 모든 폭력행위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인류가 저지른 가장 대표적인 인종주의적 폭력인 유대인 학살이 이를 잘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학살을 자행한 독일인들 사이에 유대인을 향한 증오와 분노의 광풍이 유대인과의 직접적 경험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지젝의 표현대로 증오와 분노는 ‘그들의 전통 속에서 만들어지고 유포된 유대인에 대한 이미지·형상에 대한 반응’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언어로서의 ‘유대인’은 인종주의 담론을 통해 온갖 반유대주의적 정서와 부정적 이미지가 덕지덕지 붙은 이데올로기적 실체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반유대주의 독일인들이 공격한 대상은 실재로서의 유대인이라기보다 ‘허구의 차원’에 존재하는 유대인이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구별 짓기


2019년 8월 3일, 미국 텍사스 주, 엘패소에 위치한 월마트에서 극우주의자에 의한 총기난사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22명이 살해되고 24명이 부상을 당했다. 범인 패트릭 크루시우스는 21세의 백인 남성으로 범행 전 극우 온라인 게시판에 멕시코 이민자들에 대해 적대적인 글을 올린 게 나중에 확인되었다. 이민자들을 공격하는 이유에 대해 그들이 먼저 텍사스 주를 침략했기 때문에 취하는 정당한 대응 조치라고 주장했다. 미국에서는 반이민정책을 표방하는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극우주의자들과 백인 우월주의자들에 의한 혐오범죄가 빈발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극우주의가 전 세계로 번져나가는 데 있다. 


엘패소 총기난사사건이 발생하기 불과 몇 달 전인 2019년 3월 15일, 뉴질랜드의 크라이스트처치에 위치한 이슬람 사원에서도 최악의 테러가 발생했다. 무려 51명이 사망하고 49명이 부상당한 끔찍한 사건이었다. 범인은 28세의 백인 남성, 브랜튼 태런트. 사건이 있기 몇 시간 전에 트위터와 인터넷 게시판에 이슬람을 혐오하고 반이민정책을 지지하는 글을 올렸다. 그런데 바로 이 사건이 앨패소 총격사건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연이어 발생한 뉴질랜드와 미국의 총기난사사건은 대륙을 건너 노르웨이의 또 다른 극우주의자를 자극했다. 2019년 8월 10일 노르웨이의 오슬로 근교에 위치한 이슬람 사원에 무장한 극우주의자가 난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행히 신도들의 신속한 대처로 범행은 미수에 그쳤지만 자칫 또 다른 끔찍한 테러로 이어질 뻔한 사건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 범죄학자인 스튜어트 헨리(Stuart Henry)와 드래건 밀로바노비치(Dragan Milovanovic)는 모든 범죄의 기반을 불평등한 관계 구조에서 찾는다. 그러면서 지배적 지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모욕하고 폄하하는 것이 바로 범죄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을 모욕하고 폄하하는 모든 방식들은 공통적으로 누군가가 ‘완전한 사회적 존재’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방해하는 행위라고도 한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세상에 변화를 줄 수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즉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사람들과 상호작용하여 다 함께 주변 환경과 우리들 자신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과정이 막히거나 제한될 때 우리는 인간보다 못한 존재가 된다. 우리가 훼손된 것이다.

- 스튜어트 헨리 & 드래건 밀로바노비치

  

누군가를 모욕하고 폄하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현재 그가 소지한 가치를 감소시키는 것이다. 혐오범죄의 경우처럼 신체적 또는 언어적 폭력을 통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박탈하고 특정 집단이 지닌 고유한 가치를 저열한 것으로 취급하는 행위가 대표적인 예이다. 둘째, 상대방이 현재보다 더 높은 지위나 상태에 이르지 못하도록 억압하는 것이다. 직장 내에서 발생하는 인종차별, 성차별을 이러한 억압 행위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행위들을 통해 범죄자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게 무엇일까? 본질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머무르도록 강제하여 그들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데 있다. 타자에 대한 자신의 우월적 지위와 지배권을 뺏기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범죄자는 자신들과 타자들 간에 존재하는 차이를 유지 또는 확대하기 위해 과도하리만큼 에너지를 투입한 자들로 정의할 수 있다. 

  

타인과 구별되고자 하는 심리는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본성에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폴란드 사회심리학자 헨리 타지펠(Henri Tajfel)에 의하면 사회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에 타자와의 구별 짓기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은 사회화 과정을 통해 인종, 성별, 연령, 종교, 국적, 지역, 사회계층 등에 따라 구분되는 다양한 집단에 자연스럽게 속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소속된 집단과는 동질성을, 그렇지 않은 집단과는 이질성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자신이 속한 집단은 자기 개념의 일부가 된다. 

  

그런데 타 집단과의 구별하려는 인식에는 일정한 왜곡이 수반된다. 기본적으로 나의 일부가 된 집단과 나머지 집단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실제보다 더 크게 인식하게 된다. 또한 자신이 속한 집단은 실제보다 더 긍정적으로, 다른 집단은 실제보다 더 부정적으로 인식함으로써 두 집단 간의 차이를 더 벌리려 한다. 대표적으로 주변국을 온통 오랑캐로 여겼던 중화사상,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앞세웠던 나치 사상이 이와 같은 심리적 기제가 민족 전체에게 작동했던 사례에 해당한다. 

  

혐오범죄는 인종, 종교, 국적, 성, 성적 취향, 장애와 같은 특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 선입견, 불관용 때문에 특정 사회집단을 상대로 저질러지는 범죄를 말한다. 미국에서는 혐오범죄를 일반범죄에 비해 훨씬 더 엄하게 처벌하고 있다. 혐오범죄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피해자에게 더 심각한 위해를 끼쳤기 때문이 아니다. 혐오범죄를 통해 행위자가 표현하고자 했던 메시지 자체가 민주사회에서는 허용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더 엄하게 처벌하는 것이다. 혐오의 메시지는 단순 명료하다 - ‘우리는 우월하고 너희는 열등하다.’ 혐오범죄는 열등한 존재들이 자신들과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의 표현방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혐오범죄는 민주사회의 평등 가치에 대한 명백한 거부 의사이다. 폭력을 수단으로 강제적으로 집단 간 서열을 매기고자 하는 시도다. 따라서 혐오범죄의 처벌 속에는 폭력행위 자체에 대한 사회적 비난뿐만 아니라 폭력행위에 수반된 극단적 메시지에 대한 대응 조치로서의 의미가 담겨있다. 행위자의 그릇된 주장을 부정하고 반민주적, 반인권적 메시지를 무효화하는 조치이다. 행위자에 의해서 부정된 평등의 가치를 회복시키고 재승인하는 조치이기도 하다. 또한 혐오범죄로 인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타격을 입고 ‘덜 가치 있는 존재’가 되어버린 피해자 집단의 지위를 복원시키려는 조치이다. 



표상의 저편


인류 역사를 통해 사회집단들 사이의 구별 짓기는 끊임없이 반복 재생산되어왔다. 구별 짓기는 문화와 제도 속에 녹아들어 차별과 불평등으로 굳어졌다. 구별 짓기는 이미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른 집단과 조우할 때 의식 내에 존재하는 낯섦과 다름의 벽을 뛰어넘는다는 게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에서 비롯된다. 칸트(Immanuel Kant)는 인간이 객관적 실재라고 인식하는 것도 알고 보면 정신적 구성물이며 해석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가 무엇을 인식한다는 것은 지각을 통해 정신 속으로 들어온 대상이 주관의 형식에 의해 개념화되고 의미가 부여됨을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는 우리 마음속 주관의 눈에 비친 세계, 즉 ‘표상으로서의 세계’일 뿐이다. 칸트는 이렇게 우리의 주관과 관계하는 세계를 ‘현상’이라고 부르며 실제 존재하는 세계와는 다르다고 말한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는 주관적으로 인식되는 매우 제한적인 세계일 뿐이다. 따라서 흑인, 백인, 히스패닉, 아시아인으로 구별되는 세계 역시 주관적 인식 작용에 의해 해석된 세계일 뿐 ‘진짜’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어 진짜 세계를 볼 수 있을까? 어쩌면 혐오와 증오, 극단적 폭력으로 얼룩진 구별 짓기의 현실을 뛰어넘기 위한 해결책이 표상으로서의 세계 너머에 있지는 않을까?

  

영화 <크래쉬>에는 한 흑인 부부가 운전 중 백인 경찰관에게 검문을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인종주의자인 경찰관 라이언은 남편 카메론이 보는 앞에서 몸수색을 이유로 아내 크리스틴을 성추행한다. 일이 커지는 게 두려웠던 카메론은 경찰관에게 사과하고 현장을 빠져나온다. 크리스틴은 모욕감에 남편을 비난하고 카메론은 아내를 지키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하며 괴로워한다. 그런데 다음 날 크리스틴이 혼자 운전하던 중 교통사고가 발생하고 그녀의 차가 전복되고 만다. 마침 사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 라이언은 전복된 차가 폭발하기 직전 목숨을 걸고 그녀를 구해낸다. 라이언이 크리스틴을 품에 안고 다급하게 사고 현장을 탈출하는 장면 뒤로 강한 폭발음과 함께 사고차량에서 시뻘건 불길이 치솟는다. 마치 도시를 뒤덮고 있던 인종적 편견, 차별, 혐오의 장막이 그 불길 속에 모조리 타버리는 것 같은 장면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표상 뒤에 감추어졌던 세계가 살짝 모습을 드러낸다. 그 세계에는 생명의 소중함과 인간의 존엄함이라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절대가치가 있다. 나와 다른 인간에 대한 공감과 배려가 있다. 

  

구조를 위해 전복된 차 안에 들어온 라이언의 얼굴을 알아본 크리스틴은 전날 밤의 치욕스러운 경험을 떠올리며 비명을 지른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크리스틴은 라이언을 향해 증오의 시선을 내뿜으며 결사적으로 구조를 거부한다. 그때 라이언의 눈빛이 흔들린다. 전날 밤 자신의 행동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입혔는지 순간 깨달았던 것이다. 이제 라이언은 한 소중한 인격체로서 그녀를 대해야 함을 알게 된다. 안전띠를 절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의 손이 그녀의 몸에 닿아야 하는 상황을 설명하고 정중하게 양해를 구한다. 차에 불이 옮겨 붙어 너무 늦었다고 판단한 동료 경찰들이 라이언만이라도 살리려고 그를 잡아 차량 밖으로 끌어낸다. 하지만 라이언은 크리스틴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차 속으로 다시 들어가 기어코 그녀를 구해낸다. 비로소 크리스틴의 눈에 진정한 화해와 용서, 그리고 감사의 눈물이 흐른다.


증오를 뛰어넘어 화해, 용서, 감사의 눈물이 흐른다 - 영화 <크래쉬>

  

한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을 향한 동질감이 회복할 때 인종집단으로 구분된 인식의 칸막이를 넘어설 수 있지는 않을까?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 안에는 외부로부터의 경험을 올바로 인식하기 위해 ‘도식’이라는 개념적 틀을 가지고 있다. 노랗고 길쭉하게 생긴 물체를 보고 바나나인 줄 아는 이유는 바나나 도식이 정신 속에 이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적 인식은 사실 주관적 것일 뿐 대상의 본질과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게 칸트의 설명이다. 우리 머릿속에 있는 인종집단의 도식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면 그냥 백인, 흑인, 히스패닉으로 보일 뿐 그 본질적 모습을 보기가 어렵다. 


<크래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종적 편견에 사로잡혀 사사건건 충돌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하나같이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다. 빡빡머리와 문신 때문에 폭력배로 오해받는 히스패닉계 자물쇠 수리공은 어린 딸에게는 그지없이 자상한 아빠다. 인종차별주의자인 경찰관 라이언도 늙고 병든 아버지를 살뜰하게 모시는 효자 아들이다. 접촉사고 현장에서 인종차별적인 폭언을 퍼붓던 아시아계 여성도 알고 보면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아끼는 아내다. 비록 피부색과 생김새는 달라도 모두들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인종집단 도식은 개별적 인간마다 간직하고 있는 고유함을 제대로 보지 못하도록 만든다. 인종이라는 개념은 눈에 보이는 신체적 특징에 따라 대상을 분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일 뿐이다. 일단 개별적 대상들이 같은 부류로 구분되면 대상들 간에 존재하는 차이는 사라지고 만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모든 존재들이 무한한 잠재성과 다양성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차이 때문이다. 

  

영화 <그랜 토리노>에서 월트는 우연히 길을 가다가 이웃집 몽족 이민자 가족의 딸인 수가 흑인 깡패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녀를 구해낸다. 이 일을 계기로 월트는 이웃집과 가까워진다. 비로소 그는 ‘몽’이 나라가 아니라 라오스, 태국, 중국 등지에 흩어져 살던 민족의 명칭이라는 사실, 정글에 살던 사람이 아니라 고산지대에 살던 사람들이라는 사실 등을 알게 된다. 하루는 월트가 이웃집 잔치에 초대를 받게 되고 그곳에서 수로부터 몽족의 전통에 관해 배울 기회를 갖는다. 몽족 사람들은 머리에 영혼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절대로 머리를 두드려서는 안 된다는 점,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행위를 무례하다고 여긴다는 점을 알게 된다. 또한 몽족 사람들은 상대방이 화를 내면 웃음을 짓는데 비웃는 게 아니라 당황하고 불안할 때 나오는 반응이라는 사실도 배운다. 이제 월트에게 몽족은 더 이상 비슷비슷해 보이는 아시아인들이 아니다. 고유한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들만의 삶의 방식을 가진 특별한 민족으로 인식된다. 

  

그러자 월트의 시선은 서서히 그 집안의 한 인물에게로 향한다. 이웃집 아들 타오는 몽족 갱단의 협박에 못 이겨 월트의 소중한 앤티크 자동차 그랜 토리노를 훔치려다 발각된다. 이 일을 계기로 둘은 가까워진다. 처음에 월트는 타오를 그저 동네를 어지럽히는 유색인종 십 대 중의 하나쯤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타오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미래에 대한 꿈을 갖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는 착하고 성실한 청소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제 월트는 아시아인, 몽족이라는 개념적 도식을 뛰어넘어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고유한 존재로서의 타오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 것이다.

  

우리가 인식의 표상이란 세계에 갇힐 때 내 앞에 선 타자는 한낱 사물이 되어 버린다. 인종, 성, 종교, 국적, 성 정체성의 도식 안에서 주관적으로 해석된 타자는 인간 주체가 지닌 고유함, 생명력, 변화 가능성을 박탈당하고 만다. 인간성을 상실하고 만다.


따라서 이 무언가로 가정된 주체는 개인적 이야기로 가득한 풍부한 내면의 삶을 지닌 또 다른 인간이 아니다. 개인적 이야기들은 자기 서사를 통해 의미 있는 삶의 경험을 얻을 수 있게 해 주는데, 그런 풍부한 내면을 지닌 사람은 결국 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적이란 그의 이야기를 당신이 들은 적 없는 사람이다’.

- 슬라보예 지젝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의 주인공 데릭은 처음에는 교도소 세탁 작업장에서 만난 흑인 라몬트를 적대하며 대화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점차 데릭은 마음을 열고 라몬트와 소통하게 되면서 그를 친구로 받아들인다. 라몬트 역시 데릭이 흑인을 살해한 백인 우월주의자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를 진심으로 위한다. 데릭은 라몬트의 보호 덕분에 다른 흑인 재소자들의 공격을 받지 않고 무사히 출소하게 된다. 


지젝의 말처럼 상대방을 ‘풍부한 내면을 지닌 사람’으로 바라볼 때 인종적 편견과 적대감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길이 비로소 열린다. 우리의 인식이 주관적 표상에만 의존하면 대상이 가진 풍부함과 다양성을 놓칠 수밖에 없다. 인류에게 내재되어 있는 보편적 인간성과 주체마다 간직한 고유한 이야기들이 제 모습을 드러낼 때 혐오와 편견이 견인하는 폭력의 악순환을 멈추게 할 수 있지는 않을까?   




참고문헌

마빈 해리스, 「작은 인간」, 김찬호 옮김(민음사, 1995)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정일권·김희진·이현우(난장이, 2011)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박홍규 옮김(교보문고, 2015)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백종현 옮김(아카넷, 2006)

Henri Tajfel, ‘Social Identity and Intergroup Behavior,’ Social Science Information, Vol. 13, Issue 2(1974)

Marvin Harris, Patterns of Race in the Americas (W.W. Norton and Company, 1964)

Stuart Henry & Dragan Milovanovic, Constitutive Criminology (Sage,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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