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운 양념에 눈물 콧물 쏙 빼놓는 낙지볶음을 먹으면서 나눴던 대화의 조각들 또한 그 연속선상에 있다.
1980년대 부모들의 대화
이때는 자식들이 대학에 가기만 해도 좋았다. 대학 진학률이 25% 정도였던 시기였다. 특별히 서울에 있는 특정 대학이 아니더라도 자식들의 대학 진학은 부모들의 자랑거리였다. 물론 대학 진학이 아니더라도 밥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은 아니었다. 시대는 어둡고 시절은 하 수상했지만, 자식들의 성장은 부모들의 신산한 삶에 활력소였다.
"아이고, 이번에 영식이는 00대 갔다고. 아이고... 잘 갔네.. 얼른 군대 갔다 와서 장가나 가면 되겠네."
"영식이 엄마는 좋겠네. 듣고 봉깨... 순희네도 상고 나와서 산업은행인가 머신가에 갔다고 그러던데."
"두 집은 좋겠네. 우리 삼식이는 맨날 놀더니만 군인(군대) 가서 말뚝 박는다고 그러더라고. 지네 사촌 형처럼."
부모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대학 진학이 나름 중요했지만, 어디까지나 선택의 문제였고, 취업에 관한 얘기는 걱정의 대상에 들지도 못했다. 물론 이때는 한국경제가 급속도로 팽창하던 시기라 대학 진학은 취업에 관한 한 백지수표나 마찬가지였다.(취업시장이 그렇다는 얘기고 정치 사회적 상황은 최루탄이 일상화된 암울하기 짝이 없던 시절이었다.)
1990년대 부모들의 대화
이때 또한 그전과 특별한 차이가 없었다. 여전히 대학 진학률은 33%대 정도였다.사회는 어둠의 시기를 지나 민주화의 과도기로 접어들었던 격동의 시대였다. 이십 대 청춘들의 삶에는 반드시 대학에 가지 않더라도 다양한 선택지가 존재했다.대학 진학률은 여전히 낮았고, 취업의 문제는 큰 걱정거리가 되지못했다.
"성태는 법대 가서 무슨 고시공부를 한다고 그러네. 대충 졸업해서 먹고살면 되지."
"저 건너 미경이도 상고 나와서 00대 갔다고 그러던디. 공부 잘한다고 하더니만 은행은 안 가고ᆢ"
"대학 졸업반인 우리 딸은 몇 군데 합격해놓고 직장을 고르고 있다고 그러더라고."
특별히 성취동기가 강하지 않았던 부모님들은 자식들이 크게 고생하지 않고 평범하게 살기를 바랐다. 일부 직업을 제외하고 크게 직업 간 비교의 대상이 크지 않았던 터라 부모들의 열망이 크지 않았던 탓도 있다. 이때까지 대학 졸업장은 취업시장에서 강력한 보증수표였고, 한 개인의 능력을 평가하는 중요한 지표였다.
2010~2020년대 부모들의 대화
2000년대 대학 진학률은 80%를 웃돌았다가 2010년대 들어서서는 다시 70%대로 하락하였다. 그 이유는 대학 진학이 기존보다 취업에 직접이지 못하거나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현재의 부모들은 타인과의 대화 속에 자식들이 어떤 대학에 들어가서 무슨 전공을 하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그다음의 더 험난한 코스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코스요리에서 메인 요리가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애피타이저로 요리 자체를 품평하지 않는 것과 같다.
"우리 첫째는 여전히 취준생이네. 영어 때문에 캐나다 어학연수도 갔다 오더니만. 주위에 친구들도 스펙이 너무 높다고 그러네."
"우리 집둘째는 대학 2학년 때부터 공무원 시험공부한다고 하더니만. 아직 노량진에서 학원 다니고 있다네. 먼 놈의 공무원 시험 경쟁률이 백대일이 넘나. 그렇게 힘들게 해야 되는지 모르겠지만..."
"요새는 대기업 공채도 정기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경력직 우선 수시 채용도 많다는데... 신규로 들어가려면 하늘에 별따기가 아닌가 몰라."
어느덧 대학 무용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대학에 입학하는 즉시 취업공부로 진입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로 많아졌다. 특히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이들은 상당수가 학교를 그만둔다. 이제는 대학 졸업장이 예전만큼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시절이 되었다.물론 사회생활하다 보면 대학 이름이 반드시 개인의 능력이나 인성 평가에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오히려 대학의 중요성이 떨어진 현재가 문제가 아니라 과도하게 고평가 되었던 지난날이 문제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자식 자랑이 대학 진학(혹은 대학 명칭)인 시대는 지나가고 취직을 했는지 여부가 자랑인 시대가 왔다. 지인들 사이에서 아이들의 대학 진학은 대화 소재에서 멀어져 갔고. 물론 얘기를 나누다가도 다른 친구들에게 상처가 될까 봐서 혹은 미안한 마음에 자식들의 취업 얘기는 언제부터인가 조심스러운 영역이 되고 말았다.
코로나가 급습하고 있는 어려운 시절에도 소소한 일상은 지속된다. 친구들과 대면이나 비대면 대화를 하다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등 많은 얘기를 하다가도 자녀들의 취업을 말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온다. 이 시간이 되면 친구들의 얼굴에 희비의 감정이 엇갈린다. 초중고 12년과 대학 4년의 결과가 취업이라는 결과로 판정당한다는 게 억울한 면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밥벌이를 해야 하는 소시민적 삶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풍경이기도 하다.(이런 상황은 아이들이 공부를 잘했거나 그러지 못했거나와 크게 관계가 없다.)
대학생이나 취준생들의 고민이 깊어지는 만큼 부모들의 걱정도 바닥을 친다.예전의 "사오정이나 오륙도"에 관한 사회적 문제가 이제는 청년세대에까지 허리케인 같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취업시장에서의 고난은 개인의능력 문제라기보다는 세태의 문제일 수밖에 없어서 이 문제를 해결할 뾰족한 수는 없어 보인다.(이 문제는 투표를 잘하거나 못하거나의 차원도 아니어서 더 그렇다. 다만, 이 문제를 국민의 선택문제로 몰고 가는 일부의 견해도 있다.)
정년 연장의 문제와 청년실업의 함수관계는어떨까? 정년연장 얘기만 나오면 거품을 무는 이들이 많다. 서로 상관관계가 없다는 측면부터 밀접 관계라는 얘기 사이에 여러 견해가 존재한다. 물론 일간지 기자나 대학교수들의 칼럼에서도 수학적 추론이나 경험적 검증 없는 감정적이고 자극적인 문장이 춤을 춘다. 여기에는 사회적인 노동력의 총량, 노동의 질과 효율성의 상관성, 중장년의 일자리와 노인복지라는 복합 함수가 존재하기에 무엇이 옳을지는 쉽게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아무튼...
평범한 부모들의 입장에서 자식의 취업을 걱정하지 않는 이가 있을까. 꿈속에서라도 취준생인 자식의 취업과 자신의 일자리를 내주는 것에 대한 고민이 어찌 없을까. 일부 대기업 노조에서는 부모의 퇴직과 자식의 취업을 노사협의 중 하나의 계약조건으로 한다는 얘기도 있었다. 자식 중 일부가 부모의 일자리를 이어받는 것인데... 그런 계약이 상식이나 법령에 위반되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들의 감정선을 건드리는 것은 사실이다.
여러 친구들과 대화 중 어떤 친구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취직 때문에 고생하는 아이를 보다 보니. 지금 내 자리라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봤네..."
"그러니까.... 요새 부모들 중 자네 같은 마음을 품지 않은 부모가 얼마나 있겠는가. 하하하..."
"그런데, 부모들이 자리를 준다한들 애들이 받으려 하겠는가. 자기들도 자존심이란 것도 있을 테고, 진심으로 하고 싶은 것도 있을 것인디..."
"아이고, 염병. 다들 배부른 소리 하고 자빠졌네. 아이들한테 주고 싶어도 못주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그런 생각은 상상하지도 말게."
다른 친구들도 입을 모아 한소리씩 하다 보니 '부모들 마음이 거기서 거기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들의 호기 어리고 위험한 상상이 우리가 어려운 시절을 살아가고 있음을 실감나게 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느 한 취준생의 분노나 어느 한 부모의 바람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거대한 흐름 속에 교묘하게 움직이는 자본주의의 냉정함은 개인들의 희망과 별개로 흐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모들 마음속에는 자식들의 취업에 관한 불편함의 씨앗이 자라고 있음은 분명하다.
어쩌면 많은 부모들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한두 가지 생각이 자리 잡고 있을 수도 있다. 세계경제와 국가경제가 활성화되어 누구나 취업 걱정을 하지 않는 1980년대나 1990년대 같은 시대가 다시 도래하기를... 당장 그런 시절이 오지 못한다면 취업 때문에 걱정이 많은 우리 아이를 위해 내 일터와 내 책상을 물려주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릴 수도 있다.
하지만 부모들의 희망은 거기까지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무리 양보해도 또 하나의 <부모 찬스> 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