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0
모니터 하얀 화면 속 속절없이 깜빡 거리는 마우스 커서를 바라본다. 10분, 20분, 30분 의미 없이 깜빡이는 커서 옆으로 유튜브 쇼츠와 쇼핑몰 창이 부지런히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며 시간만 죽이고 있다. 주제는 덜컥 받아 들었지만 무엇을 써야 할지 막막한 마음이 이제 곧 1시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대로라면 오늘도 "에라이, 모르겠다"를 외치고 컴퓨터를 끄고 누워버릴 기세였다. 이번엔 안된다는 다짐으로 유튜브와 쇼핑몰 창을 닫고 키보드 자판에 손을 올렸다.
처음으로 글을 썼던 게 언제인지 기억해 본다. 방학 숙제로 쓴 일기, 레포트 이런 것들을 제외하고 내가 나의 의지로 나의 생각을 써 내려갔던 것은 언제가 처음일까. 싸이월드 일기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어디 내놓고 이야기하기 부끄럽고 추악한 과거이니 제외한다 치고, 처음 내 의지로 글을 썼던 기억은 아마도 대학교 2학년때, 학교에서 진행한 백일장 대회인 것 같다.
유난히 푸르렇던 걸로 기억하는 녹음이 우거진 6월 초, 교양 수업을 마치고 벤치에 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 대학본부 앞 잔디 광장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리기 시작했다. 주최 측인 것 같은 사람들이 원고지와 행사 안내가 적힌 A4 용지 한 장씩을 나눠주고 있었다. 얼결에 다가가 받아 든 그 종이에는 '제1회 잔디광장 백일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최우수상은 50만 원, 우수상 30만 원, 장려상 10만 원의 상금 안내가 함께 적혀 있었다. 다음 수업까지 시간도 남았고 상금에도 욕심이 나 낡은 벤치에 기대어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23:00
다음 문단이 잘 써지지 않아 멍하니 깜빡이는 커서만 응시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기도 할 겸 따뜻한 우엉차 한 잔을 타서 홀짝홀짝 마시며 창밖으로 흩날리는 얕은 눈발을 바라보았다. 1년 동안 써 내려간 글이 몇 개인가 생각해 본다. 12 달이니 적어도 12편의 글은 썼을 테고, 그러다가 모임 사람이 7명이니까 적어도 80편이 넘는 글들이 "이렇게 어렵고 고통스러운 창작의 과정 속에서 탄생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짧은 감탄을 쏟아냈다.
우엉차를 다 마시고 의자에 앉았을 때 "그냥 쓰지 말까."하고 생각했다. 쉽게 가려면 브런치에 묵혀둔 글 가져다 올리는 방법도 있고, 자유주제를 찾아 휘뚜루마뚜루 써 내려가는 방법도 있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갈팡질팡 하던 그 순간 하얀 모니터 위에 점점이 박혀 있는 글자들이 어지럽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쯤 되니 오늘은 여기까지 쓰고 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정히 잠자리에 누워 모임원들의 면면을 떠올리다가 "아, 다들 고생이 많다"하고 작게 되뇌었다.
24:00
마우스 커서는 다시 깜빡이고 있고, 잠들지 못한 나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녹아내리는 글자와 의미를 찾으며 방황하는 눈동자가 어지럽게 뒤섞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검은색 활자 앞에 두 눈의 초점을 맞춘다.
백일장 주제는 '추억'이었다. 어떤 추억을 써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나는 삼촌과 함께 강가에서 물고기를 낚고 수영도 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유독 천렵, 물놀이를 좋아했던 삼촌은 여름이면 어린 나와 형을 데리고 물고기와 다슬기 같은 것을 잡으러 다녔다. 그래서일까 초록이 우거지고 뜨거운 해가 내리쬐기 시작하는 여름이 오면 그때의 기억이 많이 떠올랐다.
그런 삼촌이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을 때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글에는 이런 마음을 많이 녹여 썼다. 유년 시절의 추억을 만들어준 삼촌과 그 존재의 부재가 주는 슬픔 같은 것들 말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쓰려고 했던 글이 점점 가볍지 않게 되고야 말았다.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매미 울음소리 한가운데서 나는 펜을 꼭 쥐고 나의 감정을 원고지에 쏟아 내었다. 깊은 감정과 대조적으로 그리 어렵지 않게 술술 써 내려간 글이 원고지를 꽉꽉 채우고 있었다.
해가, 어느새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녹음이 그 초록빛을 잃고 점차 어둑어둑한 밤의 장막을 드리우고 있을 때, 나의 글쓰기가 끝이 났다. 원고지는 한여름의 열기에 진득이 흐른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불편한 자세로 오랜 시간 앉아 있다 보니 허리가 굽어 뻐근했다. 펜을 꽉 쥔 손은 피가 잘 통하지 않아서인지 한동안 저릿저릿했다. 원고지와 참가 신청서를 제출하고나서야 오후 수업을 빼먹고야 말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02:00
다시 깜빡이는 마우스 커서, 충혈된 눈으로 시계를 바라보았다. 새벽 2시였다. 새벽 2시. 집중해서 실제로 글을 쓴 시간은 10분? 아니면 20분 남짓일까? 썼다 지우고 다시 쓰는 시간까지 하면 그래 넉넉 잡아 30분이라고 하자.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다. 더 이상 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행주를 기를 쓰고 쥐어 짜내는 느낌이었다. 더 이상 나올 게 없다. 여기서 끝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며칠 뒤 심사 결과가 발표되었고 나는 장려상을 받았다. 상장과 함께 받은 돈 10만 원으로 하루 즐겁게 마시고 놀았다.
02:30
이렇게 글을 마무리하고 정리를 했다. 모든 것을 쏟아냈다는 자세로 의자에 앉아,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한숨을 '후우'하고 내쉬었다. 뙤약볕 아래서 땀에 젖은 손으로 글을 쓰고, 수업을 빼먹을 정도로 열중하던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다시 잡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러워질 때 행주에서 '또록'하고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문장을 더 추가하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때 그 글이 내 첫 번째 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