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예지 Jun 26. 2019

결혼의 자격

오래 연애해서 결혼한 건 아니고

결혼을 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회적인 기준에서 자격을 따지자면 난 결혼조차 논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 정도 연애했으니 ‘결혼할 때가 되었다’는 말이 많았다. 10년도 더 넘은 오랜 연애 기간 때문에 결혼한 거라고 대부분 알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좀 다르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그와 결혼할 마음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에게 불확실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부터도 한 회사에 일 년도 정착하지 못하는 철새 같은 삶을 살고 있었고 남편은 음악하는 기타리스트였다.


그래서 내게 결혼이란 아주 머나먼 미래의 무엇이라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 말처럼 결혼을 위한 첫 번째 조건은 경제력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랑하는 마음이 충분히 있다 하더라도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결혼은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우린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뿐.


부모님 역시 만약 결혼이 하고 싶더라도 남편 될 사람의 경제력은 꼭 보장되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물론 부모님 역시 딸과 지금의 남편과의 결혼을 상상하셨지만, 시소처럼 삐걱대는 그들의 연애와 미래를 알고 있기에 결혼을 쉽게 허락하실 수 없었다.


특히 누구보다 어려운 신혼 초를 보낸 그들에게 딸이 똑같은 전철을 밟는 건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다. 아기 시절, 울고 웃으며 반지하에 있는 먼지를 먹은 큰 딸은 그렇게 지독한 비염에 걸렸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들은 내 비염이 반지하에서 살았기 때문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다.


남편은 고등학생 때부터 입버릇처럼 결혼하자고 했다. 어린 시절에는 멋모르고 하던 결혼하자는 말이 대학생이 되고 몇 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횟수가 줄어들었다. 삶이 퍽퍽해지고 미래를 확신할 수 없었던 그는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없다고 했다. 언젠가 그런 확신이 든다면 먼저 말하겠노라 다짐하며 커피잔을 찬찬히 쓰다듬던 그의 다부진 손을 아직도 기억한다.


5년 아니면 10년 후가 되야 결혼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측과는 다른 시나리오를 자꾸 쓰게 된다.

내가 결혼을 결심한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내 곁에 없었다. 그에게 먼저 전화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저 그가 전화할 수 있을 때만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항상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그의 군 입대 이후로 24시간 대기조가 된 나는 전화기 앞에서만 온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행복과 불행은 평행선을 달리는 친구들이 아니었다. 극도로 불안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불안한 시간들이 존재했기에 극대화된 행복을 경험할 수 있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를 만나는 찰나의 순간을 깊이 감사할 수 있게 되었고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방법을 배웠다. 오랜 시간을 만났지만 매일을 함께 보내며 각자의 일에 치여있었던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단순한 표현도 꽤 어려워했다. 하지만 기다림에 익숙해진 우리는 바라봄만으로도 서로를 애틋하게 그릴 수 있음을 깨닫게 됐다. 양극단이라고 생각했던 불행과 행복이 스스럼없이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자 평범하다고 느껴졌던 모든 것들이 눈부시게 다가왔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더욱 절실해졌다. 소득이 연 몇 천 이상 돼야 한다느니, 학벌이 스카이 이상이라느니. 그런 조건 따윈 더 이상 필요 없었다. 평범한 모든 순간이 눈부실 수 있음을 깨달았다. 본연의 나를 들여다봐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이유도 한 가지 더 있다. 믿기지 않겠지만 혼자가 익숙해졌다. 그래서 결혼을 확신하게 됐다. 혼자 열심히 밥을 먹었고, 그와 자주 가던 카페도 혼자 다녀왔다. 가끔 보고 싶던 영화도 커플 사이에서 혼자 볼 수 있게 됐다. 그렇게 혼자가 익숙해질 때쯤 결혼을 결심했다. 혼자를 기르는 법을 알게 되면서 본연의 내 모습을 마주하게 됐다. 진짜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됐음을 알게 되자 남편이 될 사람을 더 잘 사랑해줄 수 있겠다 생각하게 됐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스스로 대화할 수 있다.


내게 결혼은 그런 것이었다. 행복하고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공간을 함께 꾸려나갈 영혼의 단짝 친구가 필요했다. 지금 이 사람 없이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한 편으론 혼자서도 잘 살 수도 있겠다는 극단의 생각이 들자 결혼하고 싶어 졌다. 영혼의 단짝 친구에게 나를 아끼는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나 역시 그에게 새순이 돋도록 씨앗도 뿌려줄 수 있고, 땅이 단단해지도록 물도 줄 수 있을 것이다.


나의 프러포즈가 상대에겐 강압적일 수 있겠다 싶어 몇 개월을 고심한 끝에 운을 띄웠다. 군인인 그에게 결혼이란 큰 부담이자, 제대 이후에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그의 시간을 가로막는 것이라 여길 수도 있었다. 내 예상과는 달리 그는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라고 말했다. 지금껏 보여준 사랑에 화답해줘서 연신 고맙다고 말했다.


오랜 연애의 보상이 결혼이 아님을 이제 안다. 결혼의 결심에 있어 시간은 크게 비례하지 않았다. 그저 혼자인 나에게도 함께인 우리에게도 성실함이라는 게 있었기에 결심할 수 있었음을 알게 됐다. 당신은 함께 있는 시간에 온전히 관계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인가.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어떤 순간에도 그에게 마음을 바칠 수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는가?


이전 04화 우리 같이 회사 때려치울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