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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연 Mar 06. 2021

여전히 겨울

강원도에서 과테말라로

채리에게


채리 안녕? 답장이 많이 늦었네. 지난 2주간은 남편과 나의 1주년을 기념해서 강릉으로 마실을 다녀왔어, 그리고 가족들이 연휴 동안 놀러 와서 3박 4일이나 있었고, 남편의 일 때문에 서울도 다녀온 데다 폭설 때문에 차가 눈에 빠져 차를 밀어대느라 몸살도 났었어. 글로만 읽어도 숨이 찰 지경이지? ㅎㅎ 답장이 늦었으니 변명이라도 해보는 거야. 


그리고 나의 결혼식은 말이지. 꽃이 피는 봄에 가족식을 하기로 했는데, 강원도는 3월이 되어도 아직 겨울이라 5월이나 되어야 야외에서 식사를 할 정도의 날씨가 되지 않을까 해서 5월 정도 예상하고 있어. 실은 우리끼리 얘기지만 둘이 이렇게 잘 살고 있고, 가족들한테는 인사를 했기 때문에 또 가족 식이 필요 있나 싶어서 그냥 하지 말까 싶었어. 그런데 부모님이 친구들을 만나면 '우리 아들 혼인신고만 하고 둘이 산다.'라고 하는 게 어른들한테는 영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인가 봐. 그래서 하긴 해야 할 것 같아. 결혼 전에야 원빈 이나영쯤을 생각하면 멋지고 예쁘겠다 싶겠지만 아무래도 결혼식 로망이 없는 나로선 그마저도 귀찮고 번거롭게만 느껴진다. 가끔 내가 이럴 때 보면 은근 냉소적인 스타일이라니까. 웨딩사진이라도 남기자 싶어 주문했던 흰 원피스를 겨우 이번 주에 수선을 맡겼고, 웨딩슈즈는 여태 고르지도 못했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한 스튜디오 실장님은 언제 올 거냐고 조르다 못해 이젠 포기했나 봐. (ㅋㅋㅋ) 아무튼 나의 결혼식 전개 상황은 여기까지.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지난 2월 19일은 내편과 나의 만난 지 1주년 되는 날이야. 우린 만난 그날 바로 사귀었으니 만난 날과 사귄 날 뭐 그런 셈이야. 나는 로맨틱한 걸 좋아하고 언제나 인생에 있어 사랑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또 반대로 은근히 기념일이나 이벤트 이런 건 안 챙기고 무심한 편이야. 이번 밸런타인데이에는 채리와 다니엘 오빠는 둘이 데이트를 했던데 (타코를 먹었던가?) 나는 초콜릿은커녕 설 명절 다음 날이라 남은 음식에 소주를 먹었어. 게다가 현) 남편 구) 남자 친구의 첫 번째 생일날 그 흔한 케이크도 안사준 나... 그런데 왜 2월 19일을 기념했냐면 우린 앞으로 이 날을 기념일에서 삭제할 예정이거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념하고 앞으로 이 기념일은 없애자고 했어. 물론 내가 먼저 제안했고 말야. 낭만 바사삭. ㅋㅋㅋ. 우린 아마 앞으로 결혼기념일, 그리고 각자의 생일, 크리스마스 정도를 챙길 것 같은데, 채리와 다니엘 오빠는 어떤 기념일을 챙기는지 궁금하네. 아무튼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우리의 1주년은 일주일 정도 남해, 통영, 거제 쪽으로 여기저기 여행을 좀 하고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아무래도 마음이 쓰여 강원도 안에서만 당일로 움직이기로 해서 다녀왔어. 인스타로 봐서 알겠지만, 맛있는 음식들 포장해서 한상 거하게 먹고 새벽에 토했지. 네가 남긴 '너 다워서 좋다'는 댓글 보고 왠지 뿌듯했다. 


참, 며칠 전에 강원도에 또 폭설이 내렸어. 대설경보까지 내렸던 그날은 눈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경기도 언니네로 대피를 갔었는데 다음날 돌아와도 눈이 치워지지 않아서 집 앞에서 차가 빠져 얼마나 고생했나 몰라. 게다가 집 앞 소나무는 2그루나 눈 무게 때문에 부서졌어. 신기한 경험을 많이 하고 있는 강원도 생활은 따뜻한 봄이 오면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루하루 설레며 잘 지내고 있어. 일 년이 언제나 맑은 과테말라에 사는 채리는 인스타를 보니 너의 식모가 자취를 감춰서 시호를 하루 종일 보느라 꽤 고단한 중인 거 같던데 답장이 이번에 늦더라도 잘 참고 기다리고 있을게. 식모가 얼른 돌아오길 빌며, 오늘은 이만 여기까지.


PS. 안 바쁠 때 답장 좀.

강원도에서 도연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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