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에서 과테말라로
채리에게
답장이 늦었지? 너 꽤나 내 편지를 기다린 눈치더라? 안달 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어. (변태?ㅋㅋ) 그간의 나의 이야기를 전할게. 6월 초의 내 편지에서 바쁜 일들이 하나 둘 정리되어 가고 있다고 전했지? 덕분에 6월에 일주일간 국내여행을 다녀왔어. 대구 - 통영 - 거제도를 다녀왔는데 남편과 나의 첫 남쪽 지방 여행이었지. 여행이라고 하기엔 어쩐지 여행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데 친구들을 만나러 갔기 때문이야. 고향 대구에 있는 친구들, 통영에 머무를 때 유일하게 친구가 되어주었던 동생, 그리고 거제도로 시집간 친구까지. 남편을 소개하고 인사하는 시간을 내어 다녀왔어. 코로나만 아니면 그냥 한자리에 다 모아놓고 술이나 진탕 마시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 직접 찾아가서 한 사람 한 사람 만나고 왔지. 일주일 내내 술 마시고 친구 집을 전전하고 돌아왔더니 역시 집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더라.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어.
지금은 삶 자체가 여행이 되어버려 여행이나 캠핑이 많이 고프지 않았어. 강원도로 이사 오고 나서는 처음 가보는 동네, 동네 국밥집. 작은 구멍가게, 산, 계곡, 하늘, 나무 모두가 새롭고 낯선 것들이니 말이야. 그런데 여행을 다녀오니 다시, 여행이 그립더라. 낯섦, 그 참을 수 없는 끌림. 그래서 국내여행 지도 어플을 다운로드하였어. 혼자서는 많이 다녀봤지만 남편과는 안 가본 곳 투성이니까. 그래서 함께 색을 채워나가기로 하면서 말이야. 아직 지도는 흰색이 더 많아. 하지만 지도에 색을 채운다는 목표가 생기고 나니까 여기도 가고 싶고 저기도 가고 싶고. 여행 욕망이 다시금 생겨나더라. 그래서 지난주에는 강원도 중에 안 가본 곳을 찍고 원주와 횡성을 여행했어. 원주도, 횡성도 들른 적은 있지만 여행한 적은 없었거든. 찍고 왔다가 아닌 여행했다로 지도를 채우고 싶었어. (나 굉장히 모범생 같지 않니?ㅎㅎ) 원주에서는 영화도 보고, 유명하다는 복숭아 불고기를 먹고, 전통시장에 청년들이 예술촌을 이룬 곳을 다녀왔어. "원주 미로 예술시장"이라는 곳인데 백종원의 골목식당에도 나온 적이 있대. 전주에 남부시장 청년몰 가봤지?(너라면 가봤을 거라 생각해) 그런 느낌이야. 작고 귀여운 소품들도 많고, 맛있는 거리 음식도 많고. 남편과 나는 가게 하나하나를 다 엿보고 악기 상앞에서 베이스 기타를 연습하는 한 아저씨의 연주 소리도 감상하고, 금은방에 세공을 하는 사장님의 손길도 지켜봤지. 백 선생님의 손길이 거쳐갔다는 타코 집에서 타코 하나를 시켜 나눠먹고, 소품 샵에서 직접 만든 고체 향수도 하나 사서 횡성으로 향했어.
횡성에서는 한우밖에 생각이 안 나겠지만 (ㅋㅋ) "풍수원 성당" 이란 곳을 다녀왔어. 참, 채리도 가톨릭 신자 아니었나? 남편도 가톨릭 신자거든. 그래서 남편을 위해 만든 여행 코스인데, 한국인 신부가 지은 최초의 성당이래. 100년도 넘었고, 한국에서는 4번째 성당이랬나. 그만큼 역사도 깊고, 국내 성지순례지라고 하더라고. 부지가 엄-청 넓은데 특히 남편이 '십자가의 길' 이라며 설명해준 길은 참 좋았어. 예수님의 길을 따라간 곳의 끝에는 넓은 잔디밭에 크게 돌멩이로 크게 묵주를 만들어 두었는데 조심스럽게 내가 물었어.
"여기 혹시 들어가 봐도 될까? 예수님이 혼내시려나"
하면서 발을 쑥 집어넣었어.
"그럼, 예수님은 네가 어떤 행동을 해도 사랑해주실 거야."
라고 남편이 말하더라. 음 - 작은 파장이 마음에 막 일렁이는 게 느껴졌어. 네가 알다시피 종교인들에게 크게 실망을 한 적이 있었으니까. 물론 남편은 성당도 이젠 나가지 않고 (ㅋㅋ) 팔뚝엔 커다랗게 십자가에 묵주가 매달려있는 타투를 해버린 사람이지만 그는 그의 방식대로 믿음을 지켜나가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았어. 한껏 세차게 소나기가 지나간 후라 공기도 시원하고 주변의 푸르름들은 어찌나 채도가 높아져있는지. 눈도 귀도 마이 내장들도 모두 건강해지는 기분이었어.
여행을 이렇게 마무리하긴 아쉬우니 횡성에서도 맛집을 찾으러 갔어. 알지? 여행은 맛있는 로컬 맛집으로 마무리해야 진정한 여행이라 할 수 있잖아. 한우 빵이 유명하대서 시장에 들러 한우 빵집을 갔더니 문을 닫았고, 한우 내장탕 맛집을 찾아갔으나 영업 종료... 또르르... 그렇게 횡성 여행은 맛집을 모두 실패했어. 대충 아무 데나 들어가서 먹을까 고민했지만, 그렇게 마무리하고 싶진 않아서 남편과 나는 횡성에는 노란색을 칠하기로 했어. 마음에 드는 여행을 한 곳은 오렌지색. 조금 여운이 남거나 덜 본 곳은 노란색으로. ㅎㅎ 다음에 다시 와서 여행을 완성하기로 말이야. 네게 이 편지를 쓰면서 느낀 건 그렇게 마무리되지 못한 여행도 여행이었으니 오렌지 색을 채워줘도 되겠다는 마음이 들어. 왜냐하면 이렇게나 할 말이 많아졌으니 말이야. 이건 진짜 여행이었다는 증거니까.
여행 이야기를 하자니 말이 점점 길어지네. 지난 네 편지 말미에 구제 숍 이야기를 해준다는 말에 잔뜩 기대했는데 중간에라도 카톡으로 뭔데 뭔데!! 물어보고 싶었어. 일부러 네 블로그도 안 보고 말이지. 포스팅으로 미리 다 봐버리면 재미없으니까. (우리 꽤나 콘셉트에 충실한 편 ㅋㅋ) 그리고 답장을 쓰면서도 한참 네 편지에 눈이 머물렀던 단어는 "요즘 내가 푹 빠져있는 것" 이란 말이었어. 요즘 나는 무엇에 푹 빠져 살까?라고 생각했고 생각보다 푹 빠져있는 게 없는 것 같아 조금은 상심하려는 찰나 생각난 게 여행이었지.
'아 참, 나 요즘 다시 여행에 푹 빠져있구나.'
하고 깨달았어. 틈만 나면 색이 채워지지 않은 곳을 남편과 여행할 궁리를 하고 있으니 말이야.
네가 푹 빠진 바이올린 실력은 인스타로 확인해버렸는데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 이 공개 펜팔을 읽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모르겠지만 세상에나 이건 편지에 담아줘야 되는 거 아닌가 싶어. 미치도록 잘해서 진짜로 깜짝 놀랐고, 현악기가 얼마나 다루기 힘든 악기인지 알기에 경외감까지 들어오더라. 너의 노력을 귀로 듣는 기분이었어.
무튼 다음 편지엔 네가 푹 빠진 구제 숍 얘길 얼른 듣고 싶어. 그리고 또 한 달간 생겨난 너의 다른 이야기들도 듣고 싶고. 나는 다음 편지에 또 어떤 여행지 얘길 들려주게 될까 :)
다음 편지를 기다리며 오늘 편지는 마무리할게.
오늘도 너의 가정 모두에게 행복함이 깃든 하루 되길 :)
이만!
ps. 시간 날 때 답장 좀.
강원도에서 도연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