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여름휴가는 어디로 갈래?"
친구들과는 매년 여름휴가 시즌마다 짧은 여행을 간다. 못 가는 사람 빼고 되는 사람이라도 삼삼오오 모여서 휴가를 가는데, 친구 중 둘은 결혼을 했고 넷은 여전히 미혼이다. 승승장구 패션 브랜드 대표님 K, 직장과 개인사업까지 투잡을 뛰는 친구 J, 나의 동거녀이자 뮤지컬 배우 문 배우까지, 그리고 뭘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것저것 많이 하는 나를 포함해 우리 넷이 미혼이다. 아무래도 이 나이쯤 되면, 사람들은 다들 왜 여태 결혼을 안 했는지 제일 궁금할 테지만(뭐요? 안궁이라고요?) 뭐 특별한 이유는 없다.
마지막일 줄 알았던 연애가 마지막이 아니었고, 이 사람이다 싶었던 확신이 착각인 걸 깨 닫았으며, 우리는 우리의 일을 끔찍하리만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인지 우린 아직도 미혼이며 꽤나 자유로운 편이다. 그래서 휴가를 맞춰 종종 여행을 간다. 휴가 때만큼은 돈을 아까지 않고 가장 좋은 숙소를 고르고, 가장 좋은 품질의 식재료를 골라 배가 터지도록 먹고 간이 무너지도록 마시며 과하고 짧게 놀다가 돌아오는 게 우리의 휴가 방식이다.
"발리 항공료 얼마야?"
뭐어어어엌!!!!! 직항이 무려 80만 원대. 난 안돼. 틀렸어.
대체로 비싸게 떠나는 채리는 이해하겠지만 (책 #대체로비싸게떠나는편입니다. 를 참고하세요) 비성수기에 저렴하게 여행을 할 수 있는 프리랜서들은 대체로 성수기에 비싸게 떠나는 걸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다. 평소 제주를 만 원대에 가는 나를 더러, 7만 원을 주고 제주를 가라고 하면 절대 안 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나는 대체로 명철이나 휴가 기간에 여행을 하는 법이 없고, 보통은 평일에 출발과 도착을 한다. 사람도 없고 가격도 저렴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국내 여행도 주말은 피하는 편. 그래서 갑자기 이 휴가가 안땡기기 시작한다. 왜 내가 이 비싼 돈을 주고 해외여행을 해야 하지? 정말 돈이 아깝군...
"야, 여행은 카드로 가는 거야 원래!"
친구들에게 돈이 아까워서 못 가겠다고 했다. 그렇다. 서른의 중반에도 80만 원을 턱턱 쓸 만큼 난 그렇게 여유롭지 못하다. 찌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아마 나는 꽤나 돈을 잘 버는 사람이었어도 아까워했을 거다. 나는 자신에게 쓰는 돈에 인색한 편이다. 혼자 있을 때는 돈이 아까워서 절대로 배달음식을 시켜 먹지 않으면서 친구가 있으면 내가 쏠게! 하면서 2인분을 결제해버리는 사람. 혼자 쓰는 돈은 아까운데,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쓰는 돈은 하나도 아깝지 않다. (그러니까 궁상맞다 말하지 말아 줘요- 좀 궁상이긴 하지만)
휴가 때만큼은 돈을 아끼지 말자고 했지만, 휴가가 해외여행으로 바뀌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 7월 한 달은 출근이 없었고 많이 바쁘지도 않았다. 즉, 돈 나올 구멍이 없단 얘기다. 프리랜서는 매달 수익이 나지 않으면 극심한 불안함에 치를 떨게 되는데, 지금이 딱 그 시기인 것이다. 돈 나올 구멍이 없어서 여행을 못 가겠다는 나에게 친구가 한마디 한다. 언제부터 그렇게 의기소침했냐고, 그냥 카드로 긁고 같이 가자고. (나란 여자, 합리적인 설득보다 야! 인생 뭐 있냐! 그냥 떠나는 거지! 한마디가 더 자극적이다.)
그래, 어차피 돈이란 건 꽁꽁 싸매고 있는다고 새어나가지 않는 게 아니다. 그보다 가치 있는 경험에 쓰는 돈은 후회했던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일 년에 한 번뿐인 휴가를 보내는 친구들에 비해 나는 시간적으로 더 여유롭기 때문에 함께 무언가를 하려면 내가 맞춰주는 것이 백 번 옳았다. 내 생각만 한다면, 그러니까 내가 썩 해외가 안 땅기는 시기라거나, 뭐 그딴 개인적인 감상을 들먹이기엔 '너무 의리 없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달까? (사실 여행이 좀 안 땡기는 시기인 것도 맞지만; 에헴;) 그래. 돈은 다시 벌면 되지!
아무튼 그래서 미뤄뒀던 교재 작업을 8월까지 끝내고 고료를 받아 여행에서 쓴 돈을 메꾸겠다는 의지를 갖고, 발리행 항공권을 티켓팅했다. (하지만 결국 원고는 12월인 지금에야 마감을 했다 ;;;)
내가 돈이 없지, 시간이 없냐!
그렇다고 스크루지 도연이 80만 원짜리 항공료를 지불했을 리 없다. 무려 20시간의 경유 시간을 거쳐 30만 원대로(왕복) 발리를 가는 경유 항공권을 결제했다. 그리고 친구들보다 5일 앞서 여행을 출발한다. 6시간이면 도착하는 직항 편과 함께 출발했다가는, 발리에 도착해서 짐을 풀었다가 다시 집으로 가는 짐을 싸야 할지도 모르니까 20시간의 경유 시간이 아깝다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넉넉하게 일정을 잡았다. 함께 하는 여행도 좋지만 이왕이면 발리까지 가서 혼자 며칠 정도는 머무르고 싶기도 했고.
언젠가 횡단보도 신호가 아슬아슬하게 바뀌는 시간, 뛰어가는 사람들 사이로 느긋하게 걷고 있는 날 봤다. 뛰어갈 이유가 전혀 없잖아? 급한 약속도 빨리 처리해줘야 하는 업무도 없는 요즘. 남는 건 시간뿐인 요즘. 마음껏 시간을 낭비해보려 한다. 시간이 많아진 만큼 벌어들이는 돈이 적어졌지만, 시간을 선택하고 얻어지는 충만감은 돈 이상이다. 정말이지 사람들이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게 시간이잖아.
시간을 낭비할 수 있는 나만의 특권, 펑펑 쓰다 갈게.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