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작지만 또 하나의 기준선을 한 발자국 넘은 기분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
이 동네에 4년을 꼬박 살았는데 시장이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겉만 보면 다들 자유로운 사람인 줄 안다만, 실은 나는 누구보다 갔던 곳만 가는 사람이다. 일부 귀찮음 때문이기도 한데, 실은 꽂히지 않으면 그 외의 것은 잘 못 보는 전형적인 등잔 밑이 어두운 유형.
다시 시장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연말 정산 때문이다.
재취업 후 정말 오랜만에 큰 돈을 연말 정산으로 받았는데, 이걸 계산하다 보면 내가 현금을 얼마나 쓰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 지역 페이나 현금을 사용하면 카드에 비해 높은 비율로 세금을 돌려주기에 '올해는 기필코 이 비율을 잘 지켜봐야지'가 시작이었다.
연말정산과 함께 자연스레 팀 선배들과 돈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선배가 얼마 전에 온누리 상품권으로 시장에 갔는데 정말 좋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파는 종류도 엄청 많고 결제도 편하다고. 그 얘기를 듣고 동네 근처 시장을 찾아봤는데, 어라라. 바로 집 근처였다.
진작에 받아놓고 한 번도 쓰지 않은 지역 화폐 카드를 들고 당장 시장을 찾았다. 이 높은 건물들 사이에 이렇게 크고 활발한 동네 시장이 있다니. 망원동에 항상 살고 싶었던 건 다름 아닌 망원 시장 때문이었는데, 눈 어두운 나는 정작 내 동네 둘러볼 생각은 않았던 것이다. 생각보다 규모도 크고 사람도 많아서 퇴근 후에 갔는데도 북적북적 했다. 온갖 봄 야채들이 줄을 섰고 길가에선 떡볶이와 어묵에 모락모락 김이 났다. 마음을 홀랑 빼앗기기 충분했다.
그러다 봄동을 만났다. 꽃 처럼 핀 봄동을 보자 '정말 봄이구나' 싶었다. 이 시기에 만나는 배추는 정말 달다. 겨울의 추운 바람을 이겨내고 속으로 꽁꽁 단맛을 지켰기에, 씹으면 아삭하고 시원한 단맛이 입 안을 가득 채운다. 미리 충전해 둔 지역 화폐로 떡 하나와 봄동 그리고 언젠가부터 좋아하게 된 미역줄기 반찬을 하나 샀다. 이렇게 사도 만 원. 매일 쿠팡에서 나오는 쓸데없는 쓰레기로 고생했는데 여기는 봉지 하나에 다 넣어주고 또 먹을 만큼만 살 수 있다. 배송비 때문에 무리해서 뭘 더 사지 않아도 된다는 게 제일 좋았다.
시장이 주는 경쾌함에 기분이 좋아져선, 집에 와서 처음으로 냄비 밥을 해봤다. 아주 작은 뚝배기에 쌀과 들기름을 넣고 볶다가 물을 넣어 강하게 끓인 다음 불을 줄여 뚜껑을 덮는다. 처음 해봐서 물이 많았는데 그럼에도 아주 잘 익었다. 마지막엔 명란을 넣어 슥슥 섞어준다. 봄동은 뒤집어 가운데 심지를 제거하고 잎을 하나하나 씻는다. 중간중간 이물질이 있어 잘 살펴줘야 한다. 그리곤 칼로 먹기 좋게 종종 썰어주기. 인터넷을 보고 대에충 양념도 만들어준다. 역시 다진 마늘과 참기름은 한국 음식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계란도 하나 구워주면 오늘의 저녁 완성이다.
뜨거운 명란 솥밥에 새콤 아삭한 봄동무침 하나. 좋아하는 미역줄기도 입에 함께 넣어주면, 봄이다. 반숙으로 익혀준 계란을 톡 터트려 섞어 먹어주면 또 다른 끈적임에 기분이 좋다. 이렇게 집에서 집밥을 해 먹는 것도 얼마만인지. 그저 부엌이 복작복작하고 고소한 향이 나는 것 자체가 기분이 좋다.
눈앞에 그렇게 좋아하는 시장을 두고도 이제야 안 나. 어쩌면 나는 눈을 감고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인터넷에서, 회사에서, 어쩌면 반복되고 한정된 세계 안에서만 뱅뱅 돌다가 이런 틈을 발견하면 가슴이 철렁 두근 한다. 설레서이기도 하는데, 어쩌면 나는 쳇바퀴만 뱅뱅 돌리다가 죽는 게 아닐까 싶어 져서.
한 번에 많은 걸 할 순 없겠지만
조금씩 조금씩 나의 선을 확장하고 싶다.
모든 것이 시작되는 봄, 보석 같던 동네 시장을 알게 되고 태어나 처음으로 솥밥을 해보고 봄동을 무쳐봤다. 작지만 또 하나의 기준선을 한 발자국 넘은 기분이다.
경칩(驚蟄) | 25년 3월 5일 무렵
24절기 중 세 번째 절기(節氣). 계칩(啓蟄)이라고도 한다. 태양의 황경(黃經)이 345도에 이르는 때로 동지 이후 74일째 되는 날이다. 양력으로는 3월 5일 무렵이 된다. * 출처: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절기록(節氣錄) | 자연스럽게 살고 싶어 시작한 기록
계절마다 제철 음식을 챙겨 먹는 친구가 있다. 봄에는 도다리 쑥국, 여름에는 참외 샐러드, 가을에는 홍시, 겨울에는 방어와 붕어빵. 그 애는 철마다 시장에 가서 식재료를 구경하는 재미를 알고 그것들로 따듯한 밥을 지어 친구들과 나눠 먹는 행복을 아는 사람이다. 그 애를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흘러가는 시간에 충실하고 싶어 기록해 보는 계절 일기. 절기록은 계절 속에서 먹고 마시고 듣고 웃으며 사랑하게 된 순간들을 이야기한다.
written by 청민 │ 2026. 03. 04
▸ https://ourwarmcamp.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