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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대단한 것들은 오랜 기간 계속하는 것이 만든다

땅에 쓰는 시(정영선 조경가)

by 봄날


문득 모과꽃이 보고 싶어 군위 사유원을 다시 찾았다. 사유원에서 우연히 만났던 분이 유퀴즈의 조경가 정영선 선생님의 이야기를 보고 일부러 사유원을 둘러보러 왔다는 말씀을 들었다. 화창했던 지난해 봄날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작년 오월 아내와 함께 창덕궁과 창경궁의 봄꽃들을 구경하고 싶어서 집을 나섰다.


먼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던 조경가 정영선 선생님의 전시회(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를 보았다. 그 전시회를 둘러보고 난 후 정독도서관에 들러 흐드러지게 핀 벚꽃 구경을 하며 걸어서 창덕궁에 도착했다.


돈덕전, 덕수궁


창덕궁과 낙선재, 창경궁과 춘당지를 둘러보면서 조경은 역시 왕궁이 최고라며 다시 한번 위대한 조경가 정영선 선생님의 가장 한국적인 조경에 대해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정영선 선생님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찍은 영화, ‘땅에 쓰는 시’(2024)를 보고 싶어 했던 아내와 함께 다시 광화문 흥국생명빌딩의 독립영화 상영전문관 시네큐브를 찾았다.



평소 특수부대 출신이라 삼보이상은 걷지 않는다며 늘 아내에게 농을 쳤지만 광화문은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지하철을 타고 시청역에 내렸다. 오랜만에 함께 로맨틱한 덕수궁 돌담길을 돌아 시네큐브 영화관에 도착했다.


마침 다른 상영관에서는 베를린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홍상수 감독의 영화, ‘여행자의 필요’가 상영되고 있었다. ‘땅에 쓰는 시’를 보고 연이어 ‘여행자의 필요’(2024)를 보기로 의기투합했다.


오리가족


하지만, 초록초록한 화면에 너무나 힐링이 된 나머지 그냥 그 파릇한 기분을 유지하고 싶어 다시 돌담길을 되돌아 덕수궁을 찾았다. 덕수궁 연못가에 앉아 오리가족을 구경하며 충분한 쉼을 얻고 난 후, 다시 덕수궁을 돌아보았다. 늘 그렇듯 우리나라 근대사의 아픔이 속상해서 그 현장을 외면하니 항상 잘 조경된 나무와 활짝 핀 작약등 꽃들만 보였다. 우리의 궁궐은 한국적 조경의 최고봉이니까.


작약


문득, 누군가 덕수궁 석조전을 배경으로 러닝셔츠 차림에 어깨에 세면타월을 걸치고 석조전 앞 분수대에서 칫솔질하는 사진을 찍어 해외 펜팔친구에게 보내고 “있어빌러티’를 과시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생각났지만, 은근하게 근엄하고 진지한 아내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괜히 얘기했다가 또 싼마이 농을 한다고 무시당하기 십상이라 그냥 혼자 웃고 말았다. 하지만 사소한 재미를 잃지 않는 한 우리의 인생은 무너지지 않으니까.


석조전, 덕수궁(대한제국의 궁궐)


우리나라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나처럼 정영선 선생님의 작품을 많이 둘러보게 되어있다. 호암 미술관의 정원 ‘희원’, 군위의 명품수목원 ‘사유원’, 화성 남양성모성지, 한강 선유도 공원,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아산병원, 예술의 전당,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양수리 다산생태공원, 올림픽 공원 내 조각공원, 용산 아모레퍼시픽본사빌딩, 제주 오설록, 남해 사우스케이프골프클럽, 연남동 경의선숲길공원등등



그녀의 다큐 영화를 보면서 다시 태어나면 조경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찾은 덕수궁 안 연못 앞에 앉아 오리 가족을 바라보며 무슨 일을 하든, 일단 생계로 하는 프로가 되면 재미보단 그 치열함에 짓눌려 버리고 말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냥 한 뼘의 텃밭이라도 매일 가꾸며 고상하게 취미가 가드닝(gardening)이라고 말하는 게 낫겠단 생각을 했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니까.



정영선 선생님이 조경가는 지구를 보살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말했지만, 다큐영화 제목처럼 조경가는 땅에 시를 쓰는 사람이란 말에 더 공감이 갔다.

정영선 선생님 이전의 한국 조경은 꽃과 나무를 줄 세워 심는 것이 조경이라고 인식하는 수준이었다.


그녀는 늘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는 말을 많이 강조했다. “소박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한국 정원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에도 딱 들어맞는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다. ‘일만 시간의 법칙’이 아니라도 언제나 모든 대단한 것들은 오랜 기간 꾸준히 계속하는 것이 만든다. 꾸준함은 재능이니까.


회화나무(1670), 돈덕전(덕수궁 영빈관) 발코니


정영선 선생님은 “우리 산이 바로 내 작업의 교과서였다"면서 "한국의 산천이야말로 신이 만든 정원이자 천국"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우리 한국적인 조경을 보면 “서두를 필요 없다. 반짝거릴 필요도 없다. 그저 자기 자신이면 된다 “(No need to hurry. No need to sparkle. No need to be anybody but oneself)라고 말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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