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말하면 둘째가 스스로 태어났다기보다는 엄마가 선택한 제왕수술 일자에 맞춰서 세상 밖으로 나온 날이다.
40주까지 '때'(양수가 터지거나 진진통이 시작되거나)를 기다리는 자연분만과 달리 제왕절개는 출산예정일보다 미리 1주일 전에 수술 날짜를 잡는다.
미신이나 사주팔자 '좋은 날'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우리 부부는 병원 의사 선생님이 "이 날짜에 하실래요?"라고 제안한 수술일에 순순히 따랐다. 수술일을 확정한 이후에는 병원 사정에 의해서 수술시간을 1시간 앞당기기까지 했음에도 우리 부부는 크게 저항하지 않았기에(아마 사주팔자 시간대를 받은 부부였다면 불가능했겠지) 병원으로부터 무료 커피 쿠폰까지 받았다.
첫 애는 (모두가 들으면 안타까워하는 케이스인) '자연분만 시도하다가 제왕으로 결국 수술한' 사례였다.
10시간의 진통 끝에 막판에 가서야 "이 각도로는 아기가 못 나온다"는 의사선생님의 판단에 따라, 들 것에 실려 수술실로 옮겨졌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아기 울음소리를 들었다.
정확히는 정신을 한 번 잃고(아마도 마취에 의해서였겠지) 아기 얼굴을 확인한 후에 (2차 마취에 의해) 다시 정신을 또 잃었다.
제왕수술을 했지만 온전한 정신으로 수술실에 간 것이 아니었기에 제대로 제왕수술을 겪어봤다고 하기도 애매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둘째의 제왕수술을 앞두고 지인으로부터 <제대로 된 제왕수술의 절차>를 듣고 나서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OO아, 제왕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우선 셀프로 수술대에 올라가야 해. 그리고 하반신 마취만 하기 때문에 정신이 온전한 상태에서 내 배를 째는 거야.. 그게 얼마나 공포스러운데"
"와, 그럼 그냥 내 배를 째주십쇼? 저를 제물로 바칩니다. 이러고 올라가는 거야?" (그치 그치)
지인으로부터 들은 제왕수술은 내가 첫 애 때 겪은 제왕수술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저런 자세한 설명은 병원에서 사전에 해 주지도 않는 귀한 정보였다. (미리 해주면 산모들이 겁을 먹을까봐 안 해주는 게 아닐까)
이렇게 미리 들은 제왕절개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수술 당일의 상황을 시뮬레이션 해보고 나니 수술예정일이 다가올수록 아이를 만난다는 기쁨보다는 수술에 대한 스트레스가 훨씬 커졌다. 평생 큰 수술을 해 본 일이 없는데 정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내 배를 가른다고 하니, 수술에 대한 두려움이 뱃속의 아이를 곧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을 압도해버린 것이다.
드디어 수술일은 다가와 버리고, 진통을 겪으며 수술실에 입장했던 첫째 때와 달리 나는 너무나도 평온한 상태에서 수술실에 들어가게 되었다.
페인버스터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유착방지제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등을 선택한 후에 간호사의 호출에 맞춰 수술실로 입장했다.
수술실 밖에서 기다려야 하는 남편에게 태연히 손을 흔들고 들어간 수술실의 모습은 이미 첫 애 때 본 적이 있어서 그리 낯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서웠다.
역시나, 제왕선배가 알려준대로 수술대에 올라가기 위한 계단이 마련되어 있었고 간호사 선생님들의 부축을 받으며 셀프로 수술대에 올라가 누웠다.
하얀거탑에서나 볼 법한 밝은 조명 아래 누워있으니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정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내 배를 가르고 애를 꺼낸다는 거지???'
마취 선생님이 들어오시자 두려움은 한층 강해졌고('이제 곧 마취를 하겠구나. 내 몸은 절딴 나겠구나'), 몸을 새우처럼 한껏 구부린채 등 뒤로 꽂혀 들어오는 마취주사 바늘을 생생히 느꼈다.
마취주사를 맞으면 덜 무서운 것 아니냐 하겠지만 오히려 맞고나서가 더 무서운 거 아시는지.
'마취는 제대로 된 걸까? 마취가 제대로 안 되었으면 어떡하지? 그 뭐냐 인터넷에 떠도는 도시전설처럼 마취가 제대로 안 되어서 배 짜르는데 고통을 생생히 느껴버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마취주사를 맞고난 후 내 얼굴 앞쪽으로 초록색 천이 덮여졌다. 수술의 본격적인 시작을 의미하는 초록색 천이었다.
'아,,, 이제 진짜 본격적인 시작이구나. 내가 제물로 바쳐지는구나. 저 초록색 천 너머로 피가 낭자하겠구나.'
어느덧 수술실에는 가수 10cm의 음악이 잔잔하게 깔렸다. 원래 제왕수술하는 동안 음악을 틀어놓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너무 무서워하니까 간호사 선생님들이 '음악 키자'하면서 틀어놓은 음악이 10cm였다.
10cm 권정열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드디어 내 배를 가를 원장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배를 가르는 느낌이 어떤 것이냐고?
의사선생님이 내 배 여기저기를 엄청 꾹꾹 강하게 연신 눌러대는 느낌이 계속되었다. 아프다고 말하기는 뭐하지만 무언가 묵직하고 불쾌한 터치가 이어지는 가운데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이건 손으로 배를 세게 누르는 게 아니라, 손으로 누른 채 매스로 여기저기 째고 있는 것일 게 분명해!!'
그 와중에 의사선생님은 "어우, 양수가 너무 많다. 양수 너무 많아"라고 중간중간 멘트를 하시니 나는 그저 속으로 덜덜 떨면서 수술이 빨리 끝나기만을 '제정신으로' 바라고 또 바랐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갑자기 아기의 울음소리가 '응애'하고 퍼졌다. 이어서 간호사가 뱃속에서 나온 아기를 한쪽으로 데려갔고 언제 수술실에 들어왔을지 모를 남편이 아기의 탯줄을 자르는 모습을 수술대에 누워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산모님 아기보세요". 간호사가 내 가슴팍에 아기를 올려놓자 신기하게도 아기가 울음을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