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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뿌리샘 Oct 20. 2023

내가 뭐라고, 글쓰기가 뭐라고.

술주정

도무지 맥주를 마시지 않고선 잠 들 수 없을 것 같은 날이 있다. 바로 오늘 같은 날. 엄마는 친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게 농사가 힘들어 저녁마다 마셨던 깡소주 때문이라고 하셨다. 어렸을 땐 할아버지의 얼굴을 쏙 빼닮았던 나는 커가며 외모는 바뀌었을지언정 여전히 할아버지의 유전자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너무 피곤하고 지치면 술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잠들기가 어려웠다.


 바쁘다와 피곤하다는 필요조건의 관계이다. 바쁘면 피곤하다. 그리고 오늘은 아주 많이 바빴다. 평소에도 쉴 틈이라곤 많지 않았지만 오늘은 새벽부터 밤까지 일정이 꽉 찼다. 새벽엔 둘째와 셋째의 소풍 도시락을 싸고 저녁엔 저 멀리 촌에서 하는 제사에 참석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며칠 간 공모전을 준비한다는 부담감에 짓눌려 순전히 놀기만 한 날에도 마음은 수 백톤의 무게를 이고 있는 요즘이었다. 그러니 오늘은 근래 중 몹시 피곤한 밤이었다.

 아이들 재워놓고 맥주 한 캔을 서둘러 들이부었더니 혈관에 피가 아닌 피곤이 도는 게 느껴졌다. 의자 등받이에 기대 깊은 숨을 내 쉬어 보는데 퍼득 오늘 받은 메시지들이 생각났다. 구독자가 셋이라는 말에 기꺼이 내 브런치를 구독해 준 글동무 학이언니, 도윤언니가 보내준 메시지였다. 글이 좋다는 응원과 내 팬이라는 짧은 몇 마디의 카톡을 굳이 다시 핸드폰을 꺼내 한 번 더 확인했다. 설렘과 흥분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과 동시에 인사치레라는 속삭임이 들렸다. 내가 뭐라고 그런 말들을 하겠어. 그냥 하는 말이지, 뭐. 속삭이듯 들리는 작은 소리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렇지, 내가 뭐라고. 라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살짝 취기가 돌기 시작했던 것일까. 근데 그렇다면 ‘내가 뭐라고’의 ‘내’가 뭐지? 나는 그 속삭이는 존재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나는 뭘까. 이렇게 나이를 먹어놓고 글쓰기가 좋다 말하며 하루 종일 글에 매달리고 있는 나는 뭘까. 잠시 현실을 잊어버린 철없는 사람인걸까. 십여년 넘게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그게 내 경력의 전부였는데 마치 그런 일은 없었던 것 마냥 나는 왜 쓰고 또 쓰고 있는거지. 한참 내 손길이 필요한 내 아이들도, 내 손이 닿아야만 제대로 돌아가는 집안일도 다 내팽겨치고 왜 나는 이렇게 글쓰기에 몰두하는 것일까. 내가 뭘 안다고, 무슨 말을 쓰겠다고 나서서 이러는 것일까. 와락 눈물이 났다.

 언제나 안정적인 것만을 선택해 왔다.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실상은 나에게 안정적인 상황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교대에 간 것도, 재미는 없지만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한 것도 내 마음이 편안해 지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글쓰기는 아니었다. 전혀 안정적이지 않았다. 어느 날은 쓰고 싶은 말이 나를 휘몰아쳐서 순식간에 써 내려 가기도 했고 어느 날은 문장 한 줄, 단어 하나 쉽지 않은 적도 있었다. 사람으로 치자면 틀림없이 나쁜 남자였다. 내가 힘들고 마음이 엉켜있을 땐 이 세상에서 유일한 내 편 인 것처럼 다가왔다가 내가 평온해 지는 날들엔 찾아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마치 나쁜 남자에게 빠진 여자인 것 마냥 매일 글을 쓰고 또 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애정을 넘어 나를 괴롭게까지 하는 애증의 관계가 되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게 뭐라고. 나는 내가 글쓰기에 푹 빠져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을 생각해 보았다. 내 모든 시간과 생각, 마음을 쏟아 한 꼭지의 글을 완성하고 나면 찾아오는 희열. 정련되지 않은 내 마음의 한 가운데를 아주 얇게 슬라이스 해 세상에 꺼내 놓는 즐거움. 무엇보다 내가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는 주도적인 느낌은 나를 기분 좋게 하였다. 망치로 정을 두드릴 때마다 뚜렷이 드러나는 석상의 얼굴처럼 고치면 고칠수록 선명해지는 글의 변화도 좋았다. 어느 누군가는 글쓰기 공부를 시작하며 한동안 뽕맞은 기분이었다고 하던데 나 또한 그런 것 같기만 했다.


 감사하게도 얼마 전 라디오에 보냈던 사연이 방송된 후로 예전엔 받지 못했던 내 글쓰기에 대한 응원을 받았다. 아흔이 되신 외할머니나 얼굴도 모르는 엄마의 지인들이 연락와 칭찬과 응원을 보내 주셨다. 하지만 정작 내가 받고 싶었던 건 나 스스로가 보내는 인정과 격려였다.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내 속에 수많은 내가 ‘글쓰기를 꿈꾸는 나’에게 손가락질 하며 혀를 차고 있었다. 네가 뭐라고 나머지 것들을 소홀히 하는 거니. 철이 아직 안 들었니. 내가 흘렸던 눈물은 다름 아닌 ‘글쓰기를 꿈꾸는 내’가 흘렸던 눈물이었다. 글 쓰는 걸 좋아하고 다른 일보다 재미있게 하고 있으니 계속 써도 된다는 그 허락을 나는 나에게 받고 싶었다.

그동안 걸어온 길을 벗어나 옆길로 새어도 될까? 글을 쓰기 위해 나의 하루를 할애해도 될까?

환승해도 괜찮다고, 아이들은 꿈꾸는 엄마를 보며 자랄 것이라고 글을 써왔지만 여전히 내 무의식에 깔려있던 불편한 마음들이 오늘 수면으로 드러났다.


그래도 돼.


이 한 문장을 적어놓고 다시 울었다. 먼 길을 돌아 드디어 도착한 기분이었다. 다른 것들을 미처 놓쳐도 괜찮으니 글을 써도 좋아. 나는 다시 한 번 나에게 자세히 풀어서 설명했다. 눈치 보지 말고 꿈을 꾸며 쓰고 싶은 글을 쓰라고, 너의 삶을 살라고 비로소 허락을 해 주었다. 마음이 편안해 졌다. 계속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 하자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던 글쓰기가 온순한 강아지마냥 내 옆에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뭔지 또, 글쓰기가 뭔지 묻는 질문에 이제는 답할 수 있다. 나는 쓰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내 공간 한 귀퉁이에 있는 사랑스러운 반려견 마냥 글쓰기를 품으며 살아나갈 것이다. 마찬가지로 글쓰기는 나를 '진짜 나'로 만들어주는 도구이자 과정, 그 자체이다. 날을 갈 듯 글쓰기를 통해 나를 다듬어가며 변모하고 진화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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