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를 받을 땐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한다. 나를 압박하고 있는 것들로부터 벗어나면 어떻게 될까 하고. 학교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을 땐 학교를 그만두면 어떤 기분이 들지 상상해 보고 남편과 싸울 땐 남편이 없어지면 어떤 마음이 일지 상상해 보는 것이다. 상상은 자유니 남에게 차마 말할 수 없는 발칙한 상상들을 혼자 속으로 실컷 해 본다. 그러고 나면 내리는 결론은 대체적으로 비슷하다. 지금 나를 괴롭히는 것들이 사라지더라도 나는 또 다른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라는 것, 그러니 도망가지 말고 일단 이 자리에서 버텨 볼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만의 상상 시리즈가 소재만 바꾸어 계속 되는 것은 아마 내가 스트레스에 취약한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내가 요즘 하는 상상의 주제는 '글을 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에 대한 것이다. 하루에 조금이라도 나의 시간을 만들어서 뭐라도 쓰기 위해 버둥대는 대신 그냥 아이들의 엄마로, 직장인으로만 살아가고자 한다면 나의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줄어들지 않을까. 한 글자 못 쓴 날엔 괜한 죄책감에 빠지고, 빈둥빈둥 놀라치면 마음 한 구석에서 피어오르는 "이래도 될까" 하는 불안한 마음을 버리고 그저 자유롭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마치 놀면서도 하지 못한 숙제 때문에 어쩡쩡하게 노는 아이처럼 살고 있는 나는, 그렇다면 치열하게 써 보자 라는 결론 대신 그럼 아예 그만둬 버릴까 하고 본격적으로 상상해 보는 것이다.
그 상상 속에서 나는 거북목이 덜 해졌고 잠을 좀 더 푹 자며 아이들 공부에 관심을 쏟는 열정맘이 되었다. 남편을 위한 보양식도 준비하고, 식탁 위엔 온갖 제철요리를 올리는 프로주부 9단이 되기도 하였다. 역시 암만 생각해 봐도 나에겐 글을 쓰지 않을 이유가 99가지 정도는 있다. 아니, 그 정도의 핑계를 만들어 낼 자신이 있다. 핑계대며 쓰지 않기는 실제로 늘 해 왔던 일이기도 하고. 그런데 글을 써야 하는 딱 한 가지의 이유가 나를 주저하게 한다. 글을 써야 내가 변한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나도 모르게 툭하고 나와 버린 멋진 말이나 숨막히게 멋진 아이디어 같은 것들은 아무리 대단한 것들이라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글로 쓴 말과 생각들은 단단한 벽돌처럼 그 자리에 차곡차곡 쌓이며 조금씩 내 삶의 방향을 틀어 놓는다.
사람은 하루동안 수 만가지 생각을 한다고 했다. 나는 잡 생각이 남들보다 좀 더 많은 편이니 아마 그 보다 많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들은 마치 빠른 속도로 흐르는 거대한 강처럼 일정한 방향을 향해 흐른다. 그래서 나는 매일 비슷하게 생각과 행동을 한다. 어제의 내가 내일의 나와 같고 5년 후, 10년 후의 나도 신체만 노화되었을 뿐 오늘의 나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글쓰기가 빛을 발하는 건 이 지점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런 흐름에 자꾸 끼어든다는 것과 같다. 내 생각과 행동의 당위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지나간 일에 반성을 하게 한다. 나를 불편하게 했던 타인을 어느 새 이해하게 만든다. 물론 한 두 번 글을 썼다고 대단히 달라지는 건 없지만 그렇게 쓴 글이 쌓이다보니 생각하는 방식이 조금씩 변하고 행동이 아주 조금 변화했다. 그 낙서같은 글들이 시나브로 시나브로 이어져 나를 바꾸고 삶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여정아, 너는 글 쓰기를 시작했으니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나의 글쓰기 선생님이 몇 번이고 나에게 들려 주셨던 말을 떠올려 본다. 결국 글쓰기를 그만둔다는 상상은 어불성설이다.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글쓰기 만큼은 계속 할 수 밖에 없다. 다만 나의 글쓰기가 나를 어디로 이끌지에 대해서 만큼은 프로 망상가인 나조차 영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저 계속 쓰며 살아가는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