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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소 May 16. 2021

걷다가 산책자가 된 사람

기꺼이 따라 하다가 내속에 앉는 것들

매일 걷는 사람을 만났다. 걸으면서 달라진 점에 대해서 들었다. 그의 씩씩한 말이 탐이 났다. 하루하루를 걸으면서 생각한 것은 버릴 것은 버리고 알맹이는 꼭꼭 모아놓은 본인의 철학이었다. 단순히 책 귀퉁이를 모은 스크랩이라기보다 자기만의 사유처럼 읽혔다. 튼튼해 보였다.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 책은 세상도 남도 아닌 나의 방식을 이야기하는 인터뷰 모음집이다. 이 책 특별판을 한 챕터 읽은 느낌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멋진 남의 이야기에 자주 감탄하고 그런 생각을 모으는 사람이고. 그래서 아주 잠시였지만 걷는 그 사람의 철학에 기꺼이 재밌게 설득당했다.


나도 걷기 시작했다. 멋진 사람을 따라하고 좋아하다 보면 나도 닮는 구석이 생길 테니까. 내가 살고 싶은 방향으로 기꺼이 물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만난 걷기의 철학자에 매료되어 조금씩 걸었다.

매일 걷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래도 걷기를 마음먹은 후부터는 조금씩 일상에서 걷는 시간을 만드려고 한다. 


걸음에도 수많은 방법이 있다는 걸 요새 알아차린다. 생각이 많을 때는 생각하느라 어떻게 걷는지는 신경쓰질 못한다. 힘을 빼고선 툭툭 발로 차듯이 걷기도 하고 싱그러운 풍경이 펼쳐져 있을 땐 아주 느리게 스르륵 걷기도 한다. 그러다가 바른 자세를 생각하면서 몸을 바로 세운다. 코어에 힘을 주고 골반에서 다리, 발까지 이어지는 근육을 느끼면서 움직여본다. 어제는 친구들이랑 같이 요가이면서 스트레칭을 했는데 한번 하고 나니까 돌아다니는 감각이 진해진 게 느껴졌다. 더 많은 걸 감각할 수 있겠다고 또 알아차려버렸지 뭐야. (아주 뿌듯하다.)


이젠 걷기만큼 주말에 따릉이를 타고 한강변을 주르륵 달리는 횟수가 많아졌다. 뭐라도 걸으면, 뭐라도 움직이면 무겁게 가라앉았던 생각들도 가뿐해진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 보면 생각의 범위도 모니터만 해지는 것 같다. 14인치 비율의 시야는 걸으면서, 자전거를 타면서 세상만큼 커진다. 남산만큼 길게 늘일 수도 있고 한강만큼이나 넓게 펼쳐보일 수 있다. 자기만의 속도로 걷고 뛰고 타는 사람들. 저 멀리까지 내다보이는 풍광들에 나도 기꺼이 풍경이 되면서. 훨씬 가볍게 돌아올 수 있다. 이게 비워낸다는 의미였던 건가, 생각을 버릴 수 있다는 뜻이 이런 건가. 아주 약간 실감해본다.


집에 오는 여러 버스들 중에 성곽길 쪽으로 가는 버스를 잡는다. 청계천을 지나서 남산을 보며 걸어서 퇴근을 하면 하루가 잘 정돈된다고 느낀다. 그렇게 이제는 조금씩 걷고 싶은 곳에서 내려서 집까지 오기도 하고, 산책할 수 있는 동네 길을 탐색하고 안 가본 길을 무작정 걸어 나가기도 한다.


사실, 종종 실패한다. 일에 떠밀려서 야근을 해서, 비가 와서 등등 이유는 많다. 그래서 ‘매일’ 걷는 사람의 성실함과 습관이 된 마음이 크다고 생각한다. 매일 걷기로 했으니까, 약속을 잡으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걸어가면  될지를 떠올린다는 사람이 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나에게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생각이라고 느낄 새도 없이 그냥 그렇게 되는 것, 습이 된 건 무엇일까를 물었다. 답은 잘 나오지 않았고 나는 그냥 내 속도로 걷는다. 결국 내 걸음은 나만 걸을 수 있으니까.

-노을 지는 쪽을 향해 무작정 걸었다. 개성 없는 신도시의 무표정한 풍경이지만 공기는 투명하고 빛은 예리했다. 복잡하게 뒤엉킨 습한 생각들을 바람에 말리며 걷다가 놀라운 경험을 했다. 내 발과 땅이 대화하는 느낌, 나 자신을 세상으로 여는 느낌, 풍경을 만나는 주도권이 나에게 돌아오는 느낌. 아무런 목적이 없었기에 가능한 경험이었다. 이동이나 답사처럼 특별한 의도를 갖는 걷기와 달리 그냥 느릿느릿 걷다 어슬렁거리며 떠돌다 옆길로 새는, 우연에 내맡긴 자유로운 걷기가 시간에 속박된 신체를 해방시켜주었다. -배정한, 도시를 느리게 걷기, 한겨레 크리틱


배정한은 복잡하게 뒤엉킨 습한 생각들을 바람에 말리며 걷다가 놀라운 경험을 했다고 썼다. '내 발과 땅이 대화하는 느낌, 나 자신을 세상으로 여는 느낌, 풍경을 만나면 주도권이 나에게 돌아오는 느낌.' '그냥 느릿느릿 걷다 어슬렁거리며 떠돌다 옆길로 새는, 우연에 내맡긴 자유로운 걷기가 시간에 속박된 신체를 해방시켜주었다.'라고. 나의 걷기는 아직 철학을 갖기에는 이제 걸음마를 뗀 상태라 정의하기 어렵다. 뭔가로 표현하기에는 말랑말랑한 상태다. 더 걸어봐야 겠다. 하지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우연히 '걷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걸기 시작한 날부터 일상은 많이 달라졌다. 시간이 또렷해졌다. 목적 없이 걸었지만 의도치 않게 생각이 정리되고, 달라지는 계절을 내 발으로 한걸음 한걸음 내딛으며 느낄 수 있다.


이 기록은 을지로의 직장인이 1시간 점심시간을 어떻게 걸어 다니는지, 어떻게 걷는 사람에서 기꺼이 산책자가 되어가는지에 대한 글이다.(맞다. 이 글은 예고편이다.)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고 점심시간을 잠자는데 썼던 사람이, 일이 남아있어 마음 졸이며 일하는데 보내기도 했던 과거의 직장인이 지금은 어떻게 한낮을 보내는지 써보려고 한다. 직장인들의 메카라 점심시간까지도 줄을 서고, 웨이팅을 해야 하는 치열한 맛의 거리에서 살짝 비켜나가 걷는 시간을 남겨본다. 든든하게 도시락을 챙겨 먹고 발걸음을 옮긴다. 3월부터 을지로와 청계천을 걸으며 만난 식물, 덕수궁을 10바퀴 돌면서 어쩌다 보니 쌓여서 묶게 된 우연한 산책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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