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로리 Jan 19. 2020

되는대로 살아보기

다짐 시리즈



남편이랑 나는 작년부터 유튜브를 시작했는데 이름하야 퇴근하고 전국일주! 불금에 국내 여행을 떠나는 콘텐츠다. 지금까지 전주, 포항, 경주, 오천항, 태안, 강릉에 다녀왔고 올해는 목포나 거제, 통영, 부산 등등 째금 더 밑으로 내려가 볼까 한다.




낙지를 무려 3마리나 잡았던 장삼포 해루질



사진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신나 보이는 장삼포 해루질 편. 사실 퇴근하고 전국일주는 계획된 여행이 대부분이지만 장삼포 여행은 오빠가 무작정 텐트 싣고 떠나자는데 따라나선 거였다. 역시나 무계획에는 위기가 따르는 법! 비바람이 몰아치는 오밤중에 캠프 사이트를 찾지 못해서 한참을 방황하다 결국 12시가 다 되어서야 그나마 텐트를 칠 수 있는 사이트를 찾아냈고, 무사히 1박을 할 수 있었다.


근데 이날 오빠가 나를 다시 봤다고 했다. 비바람 몰아치고, 마땅한 장소는 없고, 열두 시까지 바베큐는 커녕 저녁도 못 먹어서 호랑이처럼 화낼 줄 알았는데 침착하게 캠프 사이트 찾는데 힘쓰는 모습에 놀랐다고. 오빠는 평소에 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낄낄)


아무튼 무작정 오빠를 따라나섰을 때 이건 내게 하나의 도전 과제였다. 쉽게 짜증 내지 말고, 되는대로 하고, 문제가 생겨도 최적의 방법을 찾아서 해결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하다 보면 호랑이 같은 화를 장착한 나란 늬연도 째끔씩 유연한 삶의 태도를 연마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요가를 한건 아니지만 아무튼 째끔 변했어요.




암튼 이렇게 평일에 쌓인 스트레스를 주말여행으로 풀고 있는 우리 부부는 매주 주말에 어디 가지? 뭐하지?라는 설레는 고민을 하곤 하는데, 드디어 눈썰매와 빙어 낚시철이 돌아왔다. 스키나 보드를 타지 못하는 나는 눈썰매장 가기, 얼음낚시 하기를 이번 겨울 여행 테마로 잡았다.


월요일부터 어디를 가는 게 좋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수요일쯤 오빠 친구네 부부가 합류하기로 했다. 원래도 같이 골프를 다니는 부부라 야외 활동이 잘 맞는 커플이기 때문에 에버랜드, 베어스타운 눈썰매, 양평이나 포천 얼음낚시 위주로 겁나 알아보고 있는데 갑자기 남편이 링크 하나를 보냈다.




온천은 어때?





일단 나는 탐탁지 않았다.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긴 했으나 우선순위는 아니었고, 친구네가 제안한 곳이라고 했다. 오빠는 우리 계획을 관철시킬 생각은 안 하고, 왜 이렇게 남의 의견에 끌려다니는 거지?라는 생각에 “아니 갑자기 썰매 타러 가는 거 얘기하다가 웬 온천?" 소심하게 툴툴댔다. 근데 오빠는 내가 좋아하는 포인트만 콕콕 찝어서 다시 한번 어필했다.




그래서, 진짜 저렇게 인생샷 나오는거 맞아?



그리고 나는, 로리 남편 2년 차인데 저 정도 못 찍겠냐는 오빠의 말에 바로 넘어갔다. “그래 놀러 가는 건데 어디를 가든 뭐가 중요해. 계획에 없었다고 열올릴 필요 없지. 한번 가보고 싶던 곳이니까 이번 기회에 가도 좋겠다. 되는대로 하자.” 갑자기 내 안에 있는 긍정 회로에 불이 들어왔다.


막상 가보니 겨울 온천은 힐링 그 자체였다. 눈썰매나 빙어낚시도 좋았겠지만 이건 정말 더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날 저녁 내가 예약한 황토방 숙소도 인기폭발이었다. 두 부부가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루미큐브를 하며 제대로 힐링했다.


그렇게 저녁이 깊어지고, 별도 보고 산책도 할 겸 오빠랑 숙소 앞에 강가를 걸었다. 물안개 때문에 별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산책마저 하나의 코스처럼 완벽했다. 오빠는 내게 오늘 어땠는지 물었고, 나는 온천이 생각보다 좋았고 숙소도 마음에 들어서 너무 행복한 하루였다고 답했다.





솔직히 처음에 좀 짜증 났지?





헐. 어떻게 알았지? 뜨끔했다. 나는 분명 티 내지 않았다 생각했는데 로리어 독해 능력이 마스터 레벨이구만. “처음에는 계획대로 안돼서 짜증 났는데 이제 큰 문제 아니면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아보려고. 오빠랑 살다 보니까 마음이 유하게 바뀌는 거 같아. 예전 같았음 남의 의견만 따른다고 짜증 내거나 우리 계획대로 하자고 우겼을 텐데. 나 많이 달라졌지?” 내가 우쭐한 표정으로 말하니까 오빠가 손을 더 꼬옥 잡아주면서 말했다. "그렇게 서로 닮아가는 거지"



1. 되는대로
2. 흘러가는 대로
3. 좋은 게 좋은 거다



내가 정말 못하는 게 이 세 가지다.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상적인 부분에서도 이게 잘 안될 때가 있다는 거다. 무슨 일이든 철저하게 계획하고, 상황을 미리 그려보고 몇 가지 대안까지 생각해 둔다. 근데 그게 어그러지면 짜증 나고, 사람을 만나든 어디를 가든 하나하나 고민하고 완벽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믿는 그야말로 피곤한 스타일이다.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집들이 시즌이었다. 시간을 미리 정해서 하는 집들이도 있었지만 번개로 친구들이 놀러 오는 상황, 갑자기 2차로 와야 하는 상황, 장소에 비해 인원이 많은 경우 등등을 모두 신경 쓰느라 나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고민하기 일쑤였다. 냉장고에는 부족하지 않도록 미리 재료들을 채워놓고, 개인 식기며 술잔 세팅, 혹시나 자리가 비좁은 경우 소파를 어떻게 배치할지까지 걱정했다.




내가 생각해도 피곤한 나란 늬연



근데 남편은 아주 큰 문제가 아닌 이상 흘러가는 대로 하는 편이라 늘 평화롭다. 남편 친구들도 비슷한 성향이 많다. 이제는 부부동반으로 만나서 꽤나 친한 남편 친구들 모임이 있는데, 나는 “철저한 계획”과 “되는대로” 사이에서 내적 갈등에 시달릴 때마다 이 모임에서 만난 친구들을 종종 떠올린다. 그리고 나도 일상적인 부분에서만큼은 여유롭고 편안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렇게 해도 별일 없구나, 이해할 사람들은 다 서로 이해하는구나. 라는걸 깨달은 거다.


일례로 A부부네 집에 꽤 자주 갔는데 소수로 모일 때에는 예쁘게 차려서 파티를 한적도 있지만, 인원수나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유연하게 자리가 만들어졌다. 친구들끼리의 만남에서 철저하게 세팅된 자리나 식기, 요리는 그리 중요치 않았다. B친구네에 급으로 2차를 갔을 때에도 의자가 모자라면 나눠 앉았고, 식탁에 옹기종기 모여 방금 시킨 피자를 먹었다. 모두 즐거운 추억이다. 중요한 것은 함께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시간을 보내는 본질 자체에 있었다.


그런데 나는 "계획대로"라는 신념에 파묻혀, 그 위대한 본질을 잊는 경우가 많았다. 1박을 하자고 떠난 여행지가 우리 둘 마음에 쏙 들었던 어느 날, 오빠는 1박을 더 하고 싶어 했다. 금요일에 떠난 거라 하루 더 있어도 그리 나쁠 건 없었다. 근데 나는 일요일은 하루 종일 집에서 쉬는 편이 낫고, 1박만 계획하고 왔다는 이유로 집에 가자고 했다. 아쉬움이 남는다.


이번 여행은 온천도, 숙소도 너무 좋았고 두 부부가 루미큐브에 빠져버렸다. 그래서 같이 서울로 올라왔고, 친구 부부가 몇 판만 더 하고 가자길래 저녁까지 루미큐브를 했다. 일요일이었지만 저녁도 먹고 천천히 집에 왔다. 내 계획대로라면 일요일에 서울로 오자마자 집에 가서 빨래를 돌리고, 쉴 생각이었지만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되는대로 시간을 보냈고, 그 시간 역시 행복했다.




행복했던 일요일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니, 내가 그렇게 아등바등하며 내 인생과 일상을 계획대로 이끌려고 해도 결국에는 되는대로 흘러가는 일이 많았다. 나 자신을 조금만 내려놓고 그 흐름에 맡겨두면 미리 걱정할 일도, 얼굴을 붉힐 일도, 씩씩거릴 일도 줄어든다는 것을, 인생은 준비한 상황대로 흘러가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이 남자와 살면서 새삼 깨닫고 있다.


그래서 새해가 되면서 혼자 조용히 다짐한 것이 있다. 올 한 해는 계획에서 벗어난 일들이 일상에서 난무하더라도 “그래, 되는대로 하자"라는 말로 평온하게 화답할 것. 최대한 "되는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할 것.


작가의 이전글 서른 넘어 손절한 관계들 (2)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