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기본 처세술로 비겁함을 삼고 있는 나는 이번에도 적당히 딴소리를 해볼까 한다. 그러니까 당장 내 목을 조르기 시작한 건 AI의 글쓰기 능력이지만, 다른 이야길 해볼 생각이란 거다. 솔직히 AI의 등장을 우리가 짐작하지 못했던 건 아니지 않은가? AI의 등장은 이미 인류가 바퀴를 만들었을 때 예견된 일이었다. 다만, 그게 내가 발을 딛고 서서 사는 오늘이라는 게 매우 유감일 뿐. 이미 나보다 AI가 훨씬 잘 쓰는 건 사실이다. 분하지만, 그게 진실이다.
어쨌든, AI와 경쟁해야 하는 건 최근의 문제다. 아주 근래의 문제라는 말이다. 그런 이유로 솔직히 아직은 이 문제에 대해 내가 뭘 말할 생각이 없다. 아니, 말할 수가 없다. 실시간으로 로봇은 진화하고 있으니까. 내가 오늘 당장 어떤 관점으로 무슨 말을 하든, 내일 일어나서 다시 읽어보면 헛소리가 될 게 뻔하다. 이미 기술 발전의 속도가 우리 인지 속도를 초월한지 오래라는 말이다.
그래서 비겁한 나는 AI라는 단어가 나를 위협하기 직전까지 고민하던 문제를 적어볼까 한다. 바로 ‘오늘날의 작가들은 어디서 어떤 영감을 얻는가?’하는 문제다. 확실히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대자연은 위대한 잠언 그 자체였다. 생과 죽음의 순환, 도전과 좌절, 인내와 겸손, 자연은 잠시 마주하는 것만으로 우리에게 생에 대해 고찰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물론, 이건 지금도 이어지는 말이다. 다만, 81년생인 나는 자라면서 그런 위대한 자연을 접하기보단 딱딱한 콘크리트를 딛고 서서는 점점 더 밝아지는 가로등을 마주했을 뿐이다. 덕분에 초등학교 때 방학숙제로 곤충채집이나 식물 관찰일기 등이 주어지면 그게 그렇게 곤욕일 수 없었다. 난 지방 소도시에 살았지만, 백화점이 길 건너에 있는 시청 쪽에 살았던 몸이다. 어렸다고는 해도 시골은 그저 덥고, 불편하고, 재미없는 곳이라는 걸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런 나와 비슷한 감성을 품고 자란 내 또래들이 PC통신을 했다. 우린 서로에게 구분되는 타인이길 희망했고, 오지랖을 경계했다. 그러면서도 삐삐를 휴대하며 친구들에게는 연락을 했고, 이후 최신 핸드폰을 장만해서 이성 앞에 꺼내보이곤 했었다. 그래, 그랬던 이들이 지금의 중년이다. 우리들은 꽤나 모던해서 스마트뱅킹을 선호하고, 대중교통보단 자가용을 끌고, 자연을 한적하게 마주한다 하더라도 그건 주말 휴일, 잠시 동안이다. 우린 분명 동네 슈퍼를 보고 자랐지만, 이젠 대형 마트나 편의점에서 생필품을 조달한다. 참기름이나 된장, 쌀과 몇몇 과일은 집안의 어른들이 챙겨주고 있지만, 이게 내 자식들에게도 내가 챙겨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게 우리다. 우린 자연과 전통으로부터 단절되고 있는 세대들이고, 우리의 후손들은 단절된 이후의 세대들이 될 것이다.
그럼, 그런 우리는 과연 어디서 생의 영감, 창작의 영감을 얻을 것인가?
물론, 대자연의 호흡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다만, 그게 이제는 이전처럼 절대 다수의 독자들을 단박에 설득할 수 있는 보편적인 마스터 키는 아니라는 거다. 당장 인구분포도만 놓고 생각을 해봐도 답이 나온다. 이미 전체 인구의 태반이 서울에 몰려 있다. 지하철을 타고, 잠시 한강을 스쳐 집에서 쪽잠을 자고 출근하는 인생들. 그게 오늘날의 한국인이다. 그런 인생을 지키고자 직업 선택과 취업에 열을 올리고, 영혼까지 끌어 모아 재테크와 자녀교육에 올인하는 인생. 때문에 우리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건 결국 돈이다. 돈과 관련된 정보가 가장 비싸게 팔리고, 많이 팔린다. 반대로 그간 자연은 우리에게 돈의 가치를 말하기 보단 인위적인 모든 것의 부질없음을 알려줬었다. 생과 죽음의 순환은 경쟁보단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의 가치를, 공생과 협업으로 약자에게도 삶의 무기가 있을 수 있음을 알려주던 것이 자연이었지만 그런 가르침이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가치 있는지는 모를 일이 되고 말았다.
경쟁은 무한 경쟁이 되었고,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도덕과 공정성을 수시로 훼손한다. 편법을 정당한 것이라고 미화하는 정도는 이제 귀여운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사회 환경은 모든 책임을 나약한 개인에게 다 부가하였고, 감성적으로 고장 난 사람들은 자신이 대체 왜 왜곡된 정서로 여전히 경쟁해야 하는지 원인도, 답도, 모른 채 버티고만 있다. 이런 현실에서 과연 작가들은 어디서 영감을 얻고, 어떻게 독자들을 다독일 것인가?
한동안 도심 속 귀퉁이에 자리 잡은 자연에 몰입한 적이 있다. 거리의 가로수, 아파트나 학교 조경이나 시청의 화단, 근린공원을 소박하게 지켜주는 푸른 아이들 같은 것들 말이다. 그건 내게 어떤 노력을 요구했다. 집중을 위한 집중의 시간이 필요했고, 때로는 지루한 관찰을 요구했다. 그만큼 어떤 자연스런 영감이란 게 쉽게 떠오르질 않았다. 무채색으로 정비된 도시구획. 그 좁은 틈바구니 안에서 생물들이 다채로운 색을 보여주는 건 아름다운 일이었지만, 칼로 반듯하게 자른 듯한 작은 구획 안에 묶인 생명들에게서 어떤 영감을 얻는다는 건 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 그 자체에 더 많은 에너지를 썼다. 자연이 안겨주는 정서가 인위적으로 잘려나간 인간 군상. 그래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과 주유소 소장, 세일즈맨과 무역회사 직원, 사회복지사와 간호사 등이 내 관심사가 되었다. 그들은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다들 현실에서 버티거나, 성장을 위해 몸부림을 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빽빽한 일상을 보내고 휴일이 오면 칼로 반듯하게 자른 인위적인 자연에 몸을 기대거나 디지털 모니터가 보여주는 훨씬 더 다채로운 색상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자연을 찾아 캠핑을 떠나는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들이 찾아가서 몸을 눕힌 곳은 대부분 오토캠핑장으로 텐트를 걷고 몇 걸음만 걸으면 원터치로 물이 흘러나오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곳에서 그나마 조금 더 반짝이는 별빛을 보며, 별빛보다 더 환한 스마트폰을 켜서 스스로 살아있음을 확인하곤 했다.
오늘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 난 거기에서 글감을 찾았다. 어떤 대단한 잠언이나 인생을 극적으로 뒤흔들 만큼의 깨달음 같은 건 없었지만, 확실히 눅진한 희로애락이 있었고, 끊어진 관계를 잇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런 나약한 조각들이 내 눈에는 제법 아름답게 보였다.
난 솟아오르는 감성을 부지런히 쓰려고 노력했지만, 세상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아시다시피 정신을 차릴 때쯤, 이미 AI가 나타나 내 목을 조르고 있었으니까. 이건 정말, 대단한 힘이다. 도심은 획일화 된 무채색 얼굴이지만, AI는 색채마저 다채롭다. 넘나들지 못하는 장르가 없고 인간의 창작에 관여하는 것을 망설이지도 않는다. 많은 이들이 조력 도구로 AI를 말하지만, 이미 그 성능은 다수의 산업군에게 회의감을 안겨주는 중이다.
이런 혼란 속에서도 나는 글을 쓰려고 발버둥을 친다. 글을 쓰며 영감의 원천을 찾고, 사람을 다독일 사람의 이야기를 꾸미려고 노력한다. 물론, 이런 노력이 언제까지 유효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당장 오늘까지는 이어졌으니, 내일도 변함없이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납작 엎드릴 뿐이다.
운이 좋게도 올해도 우리 아파트에는 벚꽃이 피었다. 내 아이가 벚나무를 보고 예쁘다고 소리치며 어린이집으로 등원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자본의 가속화와 거기에 따른 어떤 대책도 없는 인간의 욕망은 조만간 저 나무들마저 앗아갈 게 뻔하다. 이미 북극의 얼음은 녹아 영구동토마저 위협받고 있으니까. 분명 나의 아이는 조만간 벚나무가 아닌 다른 인위적인 물감을 보고 아름다움을 말하게 되리라. 난 감히 그 세계가 어떤 세계이리라 말하지는 못하겠다. 빈약하고 조악한 상상력으로는 디스토피아밖에 그리질 못하겠으니 말이다.
그래서 난 오늘도 SNS를 통해 사람들의 단면을 관찰한다. 거리로 나와서는 고개를 숙이고 걷는 이들의 뒤꿈치에서 각자의 인생을 추적해본다. 물론, 도심 속 한 귀퉁이에서 고개를 빼곡하게 내민 조경에게도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게 당장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니까.
나의 시선이 아파트단지 입구 진입로 차단기에 내려앉은 벚꽃 잎에서 멈춘다.
21세기를 살며 글을 쓴다는 건 이처럼 모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