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태어난 카뮈는 많은 차별과 편견을 경험했습니다.
카뮈는 북아프리카 혈통 때문에 프랑스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내 생애에서 유일하게 노력한 것은 정상적인 인간의 삶을 사는 것’
1800년 전 북아프리카는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로마는 북아프리카에 엄청난 박해를 하였습니다.
로마의 탄압은 북아프리카 사람들을 단합시켰고, 그들의 저항정신은 불타올랐습니다.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지 40년이 지났지만, 북아프리카 교회는 로마의 박해를 잊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 중에는 약간의 변절자가 있었지만, 대다수는 순교자의 희생과 저항정신을 높이 받들었습니다.
그러한 북아프리카에서 걸출한 지도자가 나왔으니 그가 바로 어거스틴입니다.
어거스틴은 지금의 알제리 타 가스 테(Tagaste)에서 태어났고 카르타고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런 그가 북아프리카 알제리의 히포(Hippo)교구의 주교가 되었습니다.
카르타고에 버금가는 큰 도시 히포의 주교가 된 어거스틴의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북아프리카 교회는 100년 가까이 로마의 박해에서 변절했던 종교 지도자들 문제로 갈등을 겪었습니다.
이때 어거스틴이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어거스틴이 로마의 박해에 저항하고 순교했던 선조의 희생을 높이 기리고, 변절했던 사람들의 잘못을 인정한다면 북아프리카 교회는 하나로 통합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로마 가톨릭의 주교가 된 어거스틴은 변절자들의 편에 섰습니다.
그리고 지난 일이니 그냥 덮고 가자는 식의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 결과 어거스틴은 북아프리카 교회와 갈등하게 되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에게 외면받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동료로부터 비판과 공격을 받았고, 자신을 지지해주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고립과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오 주여! 주님 안에서 쉴 때까지 제 마음은 쉼을 모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외로움이나 고독을 경험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고립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주변의 친구들이 모두 떠나고 홀로 남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카뮈나 어거스틴은 외로움과 고립을 경험했습니다.
출신 성분 때문에, 혈통 때문에, 잘못된 생각이나 판단 때문에 우리는 고립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외로움과 고립을 경험한다고 모두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카뮈는 일생 부조리한 세상에 저항하는 이방인으로 살았고, 글을 썼습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판단(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때문에 고립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가 고향 북아프리카 교회를 바라보던 시각이 어떠했든 간에, 그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갈등과 아픔을 해결할 길이라 믿었고, 글을 썼습니다.
그의 글이 오늘날까지 영향을 끼친 것은 바로 그가 믿었던 하나님, 고독과 고립 속에서 끊임없이 찾았던 하나님에 대한 진솔한 열망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고립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 때문이든, 타인의 잘못 때문이든 아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카뮈의 길과 어거스틴의 길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