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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Oct 16. 2023

본회퍼의 예술론

2023년 미국의 기독교 잡지인 Christianity today 10월호에 의미있는 글이 올라왔습니다. 창의성의 댓가 : 예술을 위해 윤리학을 제쳐둔 본회퍼의 선택은 잘 한 것일까요? (The Cost of Creativity: Bonhoeffer Set Aside Ethics For Art. Did He Choose Well?) 입니다. 이 글을 읽고 제가 느낀 점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나치 히틀러에 저항하던 본회퍼는 1945년 4월 9일 나치에 의해 순교당했습니다. 그는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1943년 4월 게쉬타포에게 체포당하여 베를린 북쪽 테겔 감옥에 갇혔습니다. 1944년 10월까지 테겔 감옥에 있었는데 비교적 자유로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가 유죄판결을 받은 후 테겔에서 프린츠 알브레히트 슈트라세로, 그리고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로, 마지막으로 플로젠뷔르크로 이송되어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기 한 달 전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본회퍼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본회퍼가 이 세상을 살았던 39년동안 그는 많은 책을 썼고 제자들을 길러 냈습니다. 그는 지난 100년 동안 기독교 신학자 중에 가장 많이 인용된 글을 썼고,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런 그가 생의 마지막 순간인 감옥 생활 동안 무엇을 했을까요? 많은 기대를 모았던 최고의 저서 ‘윤리학’을 완성하기 위하여 시간을 썼을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세어보라”(시90:12)고 하였으며, “너희는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약4:14)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본회퍼는 테겔 감옥에서 약 1년 6개월 동안 여유 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때 그는 시를 쓰고, 희곡을 쓰고, 소설을 쓰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은 그의 ‘윤리학’ 완성이었습니다. 그러나 본회퍼는 예술을 선택했습니다. 그의 탁월한 신학적 재능을 누르고, 그의 평범한 예술적 표현을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이 과연 잘한 일일까요? 그는 감옥에서 자신의 재능을 낭비했던 것일까요?


사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있습니다. 크리스챤은 그 선택의 순간 자신의 판단이 옳은 것인지 항상 생각합니다. 선택의 순간에는 자신이 바른길을 택했다고 생각했지만, 지나고 나면 후회와 아쉬움만 남길 때가 종종 있습니다. 본회퍼는 어떠했을까요? 감옥에서 본회퍼는 목사로, 신학자로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유명한 시를 썼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정말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사람인가?

아니면 내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뿐인가?

우리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고, 갈망하고, 아프며,

마치 목이 졸린 것처럼 숨을 쉬려 몸부림치고,

색채에 굶주리고, 꽃과 새의 노래를 원하며, 

친절한 말과 인간의 따뜻함에 목말라하며

권력에 대한 욕망과 사소한 모욕에 분노로 치를 떨며,

이리저리 뒤척이며 위대한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며,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들을 도울 수 없다는 사실에 두려워하며,

기도하고, 생각하고, 일하려 해도 너무 피곤하고 공허하다. 

이 모든 것에 지쳐 이별의 인사를 준비하는

… 나는 누구인가? 나의 이 외로운 질문들이 나를 조롱하네. 

내가 누구든지 간에 주님은 나를 아십니다. 

오 하나님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번역의 미숙함으로 본회퍼의 마음이 손상되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가슴 아픈 고민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지나온 삶, 그리고 죽음을 기다리는 지금 이 순간 많은 후회와 아픔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루어질 수 없는 인간적인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한 면만 보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고, 장점과 약점, 잘못과 실수들이 가득합니다. 그래도 본회퍼는 분명한 결론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잘 아시는 주님께 자신의 전부를 드립니다. “오 하나님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그의  또 다른 시 ‘선한 능력으로’는 그가 교수형 당하기 얼마전 약혼자였던 마리아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 썼습니다. 


그 선한 힘에 고요히 감싸여  그 놀라운 평화를 누리며 

나 그대들과 함께 걸어가네. 나 그대들과 한 해를 여네 

지나간 허물 어둠의 날들이 무겁게 내 영혼 짓 눌러도 

오 주여 우릴 외면치 마시고 약속의 구원을 이루소서 

그 선한 힘이 우릴 감싸시니 믿음으로 일어날 일 기대하네 

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셔 하루 또 하루가 늘 새로워 

주께서 밝히신 작은 촛불이 어둠을 헤치고 타오르네 

그 빛에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온누리에 비추게 하소서 

선한 힘이 우릴 감싸시니 믿음으로 일어날 일 기대하네 

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셔 하루 또 하루가 늘 새로워 

이 고요함이 깊이 번져갈 때 저 가슴 벅찬 노래 들리네 

다시 하나가 되게 이끄소서 당신의 빛이 빛나는 이 밤 

선한 힘이 우릴 감싸시니 믿음으로 일어날 일 기대하네 

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셔 하루 또 하루가 늘 새로워


그가 감옥에서 신학책이나 윤리학 책을 쓰지 않고 문학에 몰두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자신이 죽은 후,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폐허가 된 독일에서 그의 후배 목회자들이 그리고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생각했습니다. 물론 목회자도 필요하고, 신학자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 밝고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데 여러 방면의 많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예술의 힘을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목회와 신학만 생각했던 그는 전쟁 후를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깊이 있게 성찰하고,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선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방법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예술을 통해 전쟁의 불확실성과 참혹함 속에서도 희망과 신뢰의 정신을 키워갈 힘이 예술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지금 세계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으로 시끌벅적합니다. 전쟁의 위기 속에 늘 살아온 대한민국은 오히려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평화에 대한 희망보다는, 극한 감정 대립과 싸움에 오히려 몰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갈등과 싸움, 폐허와 공허, 고통과 눈물의 실존적 현실 앞에서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렌즈는 무엇일까요? 예레미야가 감옥에서 죽음을 앞두고 희망의 땅을 산 것처럼

본회퍼는  감옥에서 평화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할까요?

https://youtu.be/iK9FMgVkSAU?si=6grylcx51F5_Xb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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