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 <국어 잘하는 아이가 이깁니다>
"수능 언수외 112 맞았습니다."
가끔 내 수능 성적을 묻는 학생이 있다. 그러면 사실 그대로 대답해 준다. 그럼 대부분 이렇게 되묻는다.
"외고 나오셨다면서요? 거긴 영어 1등급 기본으로 맞는 곳 아니에요?"
뼈 그만 때려 얘들아...
나에게 수능 대박은 없었다. 그냥 평소 실력 그대로 나왔다. 저 성적표 들고 집 가까운 교대에 찾아갔다. 몇 년 뒤 2급 정교사 자격증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초등학생들 가르치는 걸로 밥벌이하고 있다.
가끔은 학생들에게 미안하다. 언수외 111도 아니면서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그래도 요즘 학생들은 어른보다 더 어른스럽다. '큰별쌤' 최태성 선생님보다 담임 선생님이 역사를 모른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수업을 들어주기 때문이다.
고3 때 모의고사를 죽어라 쳤다. 평가원부터 사설 기관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결과는 뻔했다. 절대 언수외 111을 달성하지 못했다. 잠을 줄여도 소용없었다. 이놈의 등급은 마치 풍선 같았다.
-언수외 112가 나와서, 영어를 더 공부하면?
=> 언수외 211 드립니다ㅋㅋ
-이제 국어를 집중적으로 파면?
=> 언수외 121 드립니다ㅋㅋㅋ
-이제 수학에 시간을 더 투입하면?
=> 다시 112로 돌아왔네요?
이짓(?)을 고3 내내 했다.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수능을 한두 달 앞두고는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서 모의고사 성적표 구기며 질질 짠 적도 있다. 도대체 111은 어떻게 받는 건데!
같은 반 친구 중엔 괴물이 많았다. 모의고사 쳤다 하면 언수외 111을 안정적으로 뽑아내는 애들이었다. 걔네들한테 염치 불고하고 물어본 적이 있다.
"어떻게 하면 언수외 111을 맞을 수 있어?"
그럼 하나 같이 이렇게 말했다.
"그냥 읽고 정답 고르면 되잖아. 그게 힘든가?"
... 물어본 내가 븅딱이지. 그렇게 내 고3은 끝났다. 나에게 언수외 111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렇게 15년을 더 살았다. 그리고 이 책, <국어 잘하는 아이가 이깁니다>를 만났다. 그제야 36년 묵은 내 머리가 트였다. 드디어 언수외 111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이다!
내가 죽었다 깨나도 언수외 111 못 맞았던 이유?
=> '독서 기본기'가 부족했으니깤ㅋㅋㅋㅋ
맞다. 인정한다. 나는 독서 기본기가 부족했다. 나는 계획 없이 책을 읽었다. 기초 공사를 탄탄히 해야 언수외 111이라는 성을 쌓는데, 나는 모래성 위에 건물을 올리려고 했던 거다. 와르르 안 무너진 게 다행이다.
[내 독서 커리어]
-초등학교: 이야기책만 편식(디즈니 시리즈 or 박경리의 토지 같은 거)
-중학교: 판타지 소설만 편식(9클래스 마법사가 되는 게 내 꿈이었음)
-고등학교: '언수외 풍선 놀이' 중인데 책 읽을 시간이 어딨나?
이 책, <국어 잘하는 아이가 이깁니다>에 나 같은 학생의 사례가 나온다. 완전 내 방에 CCTV 달아놓은 줄 알았다. 이쯤 되면 궁금한 게 생긴다. 나처럼 '독서 편식'을 하는 학생을 어떻게 구제할까?
우리 아버지도 나름 노력하셨다. 명색이 고등학교 국어교사에, 한자 1급 자격증까지 갖고 계셨으니까. 내가 초등학생일 땐 국어사전 가지고 노는 법을 알려주셨다. 중학생일 땐 한자부터 한문, 붓글씨까지 가르쳐 주셨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결국엔 내가 아버지를 이겼다. 하긴 그때의 나는 9서클 마법사가 되어 세계관 평정 중이었다. 그놈의 국어사전과 옥편이 내 눈에 들어왔겠는가?
하지만 나민애 교수님은 달랐다. 나 같은 놈을 구제하는 방법을 알려주더라. 이런 편식쟁이는 늪에서 한 번에 꺼내면 안 된단다. 군침 싹 도는 책으로 살살 유혹해야 한단다. 뭍으로 꺼낸 뒤 진흙을 살살 떼어내야 된단다. 그러면 책 편식 지옥에서 아이를 꺼낼 수 있단다.
심지어 아이가 몇 살에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은지 알려준다. 저자와 제목, 그리고 출판사까지 레시피를 국자 채로 떠먹여 주신다. 왜 이게 좋은지 한줄평까지 달아주신다. 요리계에는 백 선생님이 있다면 독서계에는 갓민애 교수님이 계신 거다.(심지어 판타지소설조차 적당히 읽으면 몸에 좋단다. '속독'의 원리를 알 수 있다나?)
물론 여기까지 읽은 분이라면 뭔가 반박하고 싶으실 것이다.
-나민애 교수, 당신이 뭔데? 책 좀 읽었다고 자랑이야?
-당신이 나태주 시인의 딸이면 다야? 그리고 솔직히 나태주 시인, <풀꽃> 원툴 아냐? 요새 시 읽는 사람이 어딨음?
-당신이 서울대 학사부터 박사까지 다 땄으면 다야?
-서울대 교수로 학생들 10년 넘게 독서교육 해봤으면 다야?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처음엔 반발심이 들었다. 나도 나름대로 '책 읽고 글 쓰기' 짬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문사에 칼럼도 3년째 쓰고 있고, 다음 메인에 내 글 5번 띄워 봤고, 블로그 글쓰기로 책도 냈으니까.
하지만 <국어 잘하는 아이가 이깁니다> 책을 덮으면서 이런 불충한 생각은 싹 날아갔다. 왜냐고? 교수님의 클라스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왠 클라스? 서울대 교수 타이틀 때문이냐고? 나태주 시인의 딸이라는 '글수저 DNA' 때문이냐고? 아니다. 다 틀렸다. 내가 압도된 건 이것 때문이다.
"저는 아이에게 읽힐 책은 제가 먼저 읽어봅니다. 아이가 관심을 보이지 않아도 옆에서 그냥 읽어요. 까르르 웃을 때도 있죠. 아이가 궁금해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기다리다 보면 아이가 관심을 보이는 '그날'이 옵니다."
세상에! 그 많은 책을 다 읽어봤다니. 그리고 다 소화했다니! 이 책에는 나민애 교수의 추천도서가 한가득 담겨 있다. 모든 추천도서에는 나민애 교수의 한줄평이 있는데, 그것만 봐도 나민애 교수의 클라스를 알 수 있다. 이건 찐이다. (영화로 치면 '박평식'이나 '이동진' 평론가의 한줄평을 본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이다.)
이 책을 다 읽고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바로 유튜브 채널을 새로 하나 팠다. 블로그도 하나 새 단장했다. 그리고 앞으로 올릴 서평은 여기 모으기로 결심했다. 나도 나민애 교수를 따라 할 것이다. 내 딸에게 먹일 책은 내가 먼저 먹어볼 것이다. 내가 먼저 서평을 써볼 것이다. 그리고 딸과 맛나게 토론해야지.
내 딸이 먹을 책 식단을 마련해 준 교수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유치원생부터 대학생까지 15년 치 식단을 엄선해 주셔서 감사하다. 그리고 '언수외 111의 비밀'을 풀어 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하다.
이제 발 뻗고 잘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