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건설한 우리나라 최초의 계획도시
팔방이 트여 옹색함이 없다는 팔달산 기슭 아래 자리 잡은 수원시는 우리나라 최초의 계획도시이자 신도시이다. 수원 토박이인 소설가 김남일은 ‘수원을 걷는 일은 화성을 걷는 일이다.’라고 했다. 이어지는 ‘지구가 아니다’라는 말을 빼면 수원에 대한 완벽한 묘사라는데 동의한다. 수원 여행은 수원 화성에서 시작해 수원 화성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원시의 상징이며 우리나라 성곽 문화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수원 화성은 조선 18대 임금 정조대왕이 세운 최초의 계획도시이다. 그러나 최초의 계획도시 이전에 수원 화성에는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 혜경궁 홍 씨에 대한 효심이 곳곳에서 묻어나 감회가 남다르다. 수원 화성은 건축물의 아름다움과 역사적 의미가 세계적으로 인정되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까지 되었으니 정조대왕의 ‘수원 화성’은 이래 저래 탁월하면서도 위대한 창조물임이 틀림없다.
수원은 과거 마한의 '모수국'이었다가 삼국시대에는 차례로 백제, 고구려,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고구려 때 수원은 매홀이라 불렸고, 신라 경덕왕 때에는 수성군으로 변경되었다. 매홀에서 매는 물을, 홀은 고을을 뜻하니 매홀은 ‘물고을’이란 뜻이다. 수원이란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려 원종 12년(1271)에 수원도호부가 설치되면서부터이다. 이후 수주, 수성, 수성도호부 등으로 불리다가 해방 후 수원시로 바뀌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수원의 중심부에는 해발 143m의 팔달산이 자리하고 있고 북쪽에는 광교산(582m), 백운산(567m), 서쪽에는 칠보산(236m), 여기산(105m)이 포진해 있고 남쪽은 평야지대를 이룬다. 광교산에서 발원한 수원천이 수원시를 관통해 안산시와 오산시로 흘러 서해로 빠져나간다.
수원은 정조의 이상 국가를 재현한 계획도시
수원은 정조 대왕의 도시다. 200년 전 정조가 쌓은 화성이 여전히 도시를 빙 둘러싸고 있고 정조가 어머니의 회갑연을 베푼 행궁 역시 그때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팔달문과 장안문을 통해 드나들고 있으며 수원천을 사이에 두고 형성된 팔달문시장(남문시장), 영동시장, 지동시장 등 이른바 ‘왕의 시장’도 그대로다. 수원만큼 과거의 모습과 정서가 온전하게 재생되고 있는 도시도 드물 것이다. 마치 수원 화성이 복원되었을 때 그곳에 살던 사람들까지 복원해 놓은 듯하다. 때문에 수원 여행은 마치 천년 고도 경주를 여행하는 듯한 아득한 시간의 아련함이 느껴지는 시간 여행이 된다. 특례시 지정을 앞두고 있는 인구 백만이 넘는 거대도시 수원에서 시간 여행이라니! 수원 시간 여행의 출발은 수원화성과 행궁에서 시작된다.
한낮의 기온이 어찌나 뜨거운지 홍살문이 삐죽 서 있는 화성 행궁 앞 광장엔 인적마저 끊겼다. 간혹 오가는 사람들도 양산 아래 숨거나 연신 팔을 놀려 부채질을 하며 걷고 있었다. 오후 세 시가 넘어가고 있었지만 한여름의 땡볕은 수그러들 기미조차 없었다. 관람객들로 늘 북적거려야 하는 행궁 신풍루 앞도 조용했다. 한 여름 땡볕이 내리쬐는 날 그늘 한 점 없는 고궁을 관람하는 일은 고문에 가깝다. 그러나 잡다한 소음과 동선의 방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특혜를 누릴 수 있다면 뜨거운 햇살의 고문조차도 능히 견딜만하다.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앞에는 거대한 느티나무 노거수 세 그루가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다. 정조가 처음 행궁을 건립하기 시작한 것은 1789년(정조 13)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을 다녀올 때 머물기 위한 궁이 필요했을 것이다. 정조의 부친 사도세자는 정치적 모략으로 뒤주에 갇혀 죽었다. 정조가 열한 살 때였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죽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 정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정조를 '나'로 바꾸면 말이다. 그런데 정조는 왕위에 오르기까지 그 심정을 밖으로 발설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조가 대단하다.
정조는 1752년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8살 때 세자에 책봉되었고 1762년 25세 때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입적되어 22대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정조의 일성은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도다”였다. 이 한 마디에는 정조의 아버지를 향한 연민과 사랑과 그리움, 죄책감 그리고 회환…그 모든 심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왕위에 오른 정조는 제일 먼저 양주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의 수은묘를 영우원으로, 사당을 경모궁으로 격상시켰다. 즉위한 지 13년째인 1789년(정조 13) 정조는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겨 새 단장한 후 현륭원으로 격상시켰다(1899년 장헌세자가 장조로 추존됨에 따라 현륭원은 융릉으로 추증되었다). 인근에 살던 주민들은 팔달산 자락으로 옮기게 하였다. 드디어 수원 화성과 행궁의 건립이 시작된 것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한을 풀어드리는 동시에 정조의 꿈인 개혁정치를 펼치는 첫걸음이었다.
건립 당시 576칸으로 지어진 화성행궁은 조선 시대 행궁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답다고 칭송받는다. 정조는 행궁이 완성되자 '이제 화성은 나의 새로운 고향이다. 행궁의 정문은 신풍루라고 하여라'라는 교지를 내렸다. 신풍이란 임금님의 새로운 고향이란 뜻이니 정조가 수원 화성에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행궁은 평상시에는 수원부 관아로 사용되었고 임금의 원행이 있을 때에는 왕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정조의 꿈이 담긴 행궁은 일제강점기 민족 문화 말살 정책에 의해 무참하게 파괴되고 훼손되었다. 정조의 어진을 모셨던 화령전 건물에 자혜의원을 개원하였고 이후 아예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병원 본관으로 사용하였다. 1925년에는 봉수당을 허물고 2층짜리 벽돌 건물을 세우고 병원 이름도 자혜의원에서 경기도립수원의원으로 고쳤다. 그나마 수원 군청으로 사용되던 낙남헌만이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았다.
화성 행궁은 1996년 화성이 축성된 지 200년이 지나서야 복원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행궁 복원은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을 토대로 진행되었다. 2003년 576칸 중에 482칸이 복원되었고 그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복원에 20여 년이 걸린 셈이다. 현재 2단계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복원된 지 20여 년이 지난 행궁에서는 제법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신풍루로 들어서니 차례로 좌익문과 중양문이 나온다. '좌익'은 곁에서 돕는다라는 뜻으로 내삼문인 중양문을 도와 행궁을 지킨다는 의미이다. 좌익문 왼편에는 정조가 행궁에 머물 때 신하들을 접견하던 유여택이 있다. 평소에는 수원 유수가 거처하였으나 임금이 행차하면 신하들을 접견하고 각종 행사에 대한 보고를 듣는 곳이었다.
중양문을 지나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봉수당과 장락당, 복내당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화성행궁의 정전이라고 할 수 있는 봉수당은 정조가 수원 행차 시 머물렀던 곳이다. 정조는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정궁에 ‘봉수당’이란 이름을 붙이고 이곳에서 어머니 홍씨의 회갑연을 베풀었다. 봉수당에는 회갑상을 받은 홍씨에게 절을 올리기 위해 정조와 왕비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비록 모형이지만 늙고 지친 홍씨와 그 앞에 선 정조 내외를 보니 한 나라의 국왕이기 전에 아들 이산이 참으로 애잔하고 가엾다.
혜경궁 홍 씨(1735~1816)는 10세에 세자빈이 되었고 28세에 지아비를 잃었다. 혜경궁 홍씨에 대한 아들 정조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성대한 회갑연을 베풀어서라도 위로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남편을 앞세운 혜경궁 홍씨는 아들마저도 앞세우고 한 많은 세월을 마감했다. 홍씨는 고종 때 헌경왕후로 다시 황후로 추존되었다.
봉수당에서 화령전으로 가는 길목에 '노래당'과 '낙남헌'이 있다. 노래당은 정조가 노후를 보내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늙음이 찾아온다’라는 뜻으로 노래당이라 이름 짓고, 출입문에는 젊음을 보존한다는 의미의 ‘난로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정조는 아들이 15세가 되면 왕위를 물려주고 화성에서의 노후 생활을 꿈꾸었으나 1800년 6월 49세에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다.
노래당에 잇대어 있는 낙남헌은 화성 행궁에서 유일하게 원형이 보존된 건물이다. 과거시험(별시)과 같은 공식 행사나 연회가 열렸던 곳이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때는 61세에 달한 모든 수원부 백성들을 위한 양로 잔치가 열리기도 했다. 일제의 폭압을 견뎌낸 낙남헌 기둥을 감싸 안으면 좋은 기운을 받게 된다는 속설이 전한다.
낙남헌을 지나면 화령전이 나온다. 순조는 갑자기 세상을 떠난 정조를 위해 1801년 행궁 옆에 화령전을 건립하고 어진을 봉안했다. 정조의 초상화를 모신 운한각과 이안청, 복도각으로 구성되어 있는 국내에서 유일한 영전 건축물이다.
행궁 신풍루 앞마당에는 '무예 24기 공연'이 펼쳐진다. 무예 24기는 조선 전통의 무예와 중국, 일본의 우수한 무예를 적극 수용하여 만든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무예로 조선의 최정예부대인 장용영 외영군사들이 익혔던 24가지의 실전 무예이다. 화성 행궁을 지키는 장용영의 수위의식와 장용영 군사들의 훈련을 보여주는 공연도 이곳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코로나 19로 인해 공연은 저녁 시간에 한 차례만 열린다.
어둠이 내리면 행궁 일대는 어둠과 빛의 향연이 펼쳐진다. 깜깜한 밤하늘 아래 은은한 불빛을 따라 궁궐 뜰을 사부작사부작 걷는 즐거움은 여름밤에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다. 팔달산 중턱에서는 서장대가 빛을 발하며 날렵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문득 내가 서 있는 곳이 21세기 수원 한복판인지, 18세기 정조가 살아 있는 세상인지 혼란스럽다.
화성행궁에서 팔달문에 이르는 500m 정도의 행궁동 공방거리는 수원의 인사동이라 불린다. 공예품점 30여 개소와 맛집, 카페, 갤러리 등 50여 개소가 모여 있다.
수원 화성 – 성곽 건축의 백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다.
왕위에 오른 지 18년째인 1794년 정조는 화성의 축성을 시작하였다. 정조가 화성을 축성한 데에는 도성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뿐만 아니라 자신이 상왕이 되어 일선에서 물러났을 때를 대비해 자신이 머물 거처를 마련하는 의미도 있었다. 정조 18년(1794) 1월에 시작된 화성 축성은 정조 20년(1796) 9월에서야 끝났다. 완공되기까지 무려 2년 9개월이 걸렸다. 정조는 화성의 설계를 최고 실학자인 정약용에게 일임하고 조심태, 정민시, 서유린, 홍원섭 등에게 실무를 담당케 했다. 정약용은 전통적인 건축 기법에 서양의 건축기법을 도입하여 단기간에 근대적이고 과학적인 성곽 구조를 지닌 아름다운 성을 완성하였다. 공사의 총책임자는 채제공이 맡았다. 완공된 화성의 규모는 둘레 약 5.7km, 성곽 높이 4~6m로 4개의 출입문과 41개의 시설물을 갖췄다.
지난 시대에 축적된 기술뿐만 아니라 최초로 선보이는 신기술까지 조선의 모든 건축/축성 기술이 총동원되어 건립된 화성은 성곽 건축의 백미로 꼽히며 주변 경관을 해치지 않고 자연과 어우러지는 아름다움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러나 화성 역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심하게 훼손되었다. 수원 토박이들조차도 오랫동안 풍문으로 성과 궁궐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뿐 진짜로 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정도다.
마침내 1975년 복원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20여 년 후인 1997년 수원 화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성이 복원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정조가 남겨 놓은 ‘화성성역의궤’ 덕분이다. 기록을 중시했던 정조는 화성 축성 과정과 비용, 기간, 인부 수 심지어 인부들의 이름까지 꼼꼼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1997년 12월 이태리 나폴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제21차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던 것도 정조가 남긴 기록유산 덕이 컸다. 심사 위원회의 결정문에도 이 점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성의 가치는 당시 공사 내용을 담은 '화성성역의궤'에 담겨 있다. 돌 무게가 얼마고, 어떤 목재를 사용했고, 심지어 공사비로 얼마를 지출했는지까지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설계와 시공 부분은 그림과 해설을 따로 붙여 놓았다. '화성성역의궤'만 있으면 화성은 얼마든지 다시 지을 수 있다. 화성이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과학적이라는 이유다.” (1997년 21차 이탤리 나폴리에서 열린 세계 문화유산 위원회)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당시 소견에서 "화성은 동·서양을 망라하여 고도로 발달한 과학적 특징을 골고루 갖춘 근대 초기 군사 건축물의 모범"이라며 "성곽은 이제 겨우 200년에 지나지 않지만 제각각 지닌 예술적 가치를 감안할 때 마땅히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려야 한다"라고 극찬하고 있다.
수원 화성 둘러보기
- 화성의 4개 관문
이제 화성의 성곽을 직접 거닐고 눈으로 그 아름다움을 확인해 볼 차례다. 화성을 둘러보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직접 다리품을 팔아 연필을 꾹꾹 눌러 글씨를 쓰듯 화성의 구석구석을 두 발로 꾹꾹 밟아가며 살펴도 좋고, 화성어차를 타고 성곽의 중요 지점을 둘러봐도 좋다. 일장일단이 있다.
화성어차는 순종 황제가 타던 자동차와 조선시대 국왕이 탔던 가마를 모티브로 제작되었다. 화성어차가 성곽을 따라 한 바퀴 도는 데는 약 35~40분이 소요된다. 화성행궁 승강장에서 출발하는 관광형 노선과 연무대에서 출발하는 순환형 노선이 있다. 관광형 노선은 화성어차 승강장에서 출발해 연무대-장안문-화서문-팔달산-화서문-장안문을 거쳐 다시 화성행궁으로 돌아온다.
화성 어차를 타고 화성의 윤곽을 그린 후에 성곽을 따라 걷기를 추천한다.
수원 화성에는 모두 4개의 관문이 있다. 북문 장안문, 남문 팔달문, 서문 화서문, 동문 창룡문이다. 성문들은 모두 아치형의 홍예문이며 2층에는 적의 동태를 감시할 수 있는 누각이 설치되어 있다. 장안문과 팔달문이 가장 화려하고 장엄하다. 통상 성의 남문이 주관문인데 반해 수원 화성은 북문인 장안문이 주요 관문이다. 그 이유는 정조가 서울에서 화성으로 행차할 때 가장 먼저 들어올 수 있는 문이었기 때문이다. 장안이란 서울로 통하는 문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백성들이 행복하게 산다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보물 제402호인 팔달문은 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뜻을 지니며 수원 사람들은 ‘팔딱문’이라고 불렀다.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으나 도로 공사로 인해 성문만 남아 있다. 팔달문 주변에는 수원천을 따라 팔달문시장을 비롯해 지동 시장, 영동 시장 등의 전통시장 등이 형성되어 있다. 보물 제403호인 화서문은 서북공심돈과 함께 서쪽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화서문과 서북공심돈이 어우러지는 풍경은 수원 화성의 건축의 백미로 일컬어진다. ‘화성의 동쪽을 맡고 있다’라는 뜻을 지닌 동쪽의 창룡문 아래로는 수지 풍덕천과 성남으로 이어지는 4차선 도로가 시원하게 지난다. 인근에는 연무대와 국궁 체험장 등이 있다.
4개 관문 외에도 비밀통로인 암문 5개, 수문 2개, 무기를 보관하거나 적의 동태를 감시하는 적대 4개, 적군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공심돈 4개 등 모두 41개의 시설이 배치되어 있다.
- 공심돈, 유일하게 화성에만 있는 특이한 구조물
화성의 시설물들 가운데 가장 특이한 건축물은 공심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공심돈은 성곽 주위와 비상시에 적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한 망루의 일종인데 이름 그대로 건물 안쪽이 텅 비어 있다. 적의 눈에 띄지 않고 망루로 올라가기 위해 안쪽을 비우고 사다리나 계단을 설치했으니 그 지혜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로서도 전례가 없었고 지금까지도 화성의 공심대가 유일하다. 동북공심돈, 서북공심돈, 남공심돈 등 3개의 공심돈이 있으며 그중 서북 공심돈이 가장 아름답다. 성이 완공된 이듬해인 1797년 화성을 찾은 정조는 신하들에게 서북공심돈을 가리키며 “보아라. 우리 동국 역사상 최초의 공심돈이다. 마음껏 구경하라”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서북공심돈은 201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200년이 지난 지금 서북공심돈 앞쪽에는 화서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평화로운 저녁나절을 보내고 있은 시민들은 자신들의 뒤편에 있는 서북공심돈과 화서문에 무심해 보인다. 그런 서문을 두고 수원 토박이 작가 김남일은 “한참 있다 가도 화서문은 그 자리에 서 있다. 서문은 늘 그렇게 서 있어서 서문이다.”라고 썼다. 수원 사람들에게는 이 아름다운 건축물들은 그저 늘 그 자리에 있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일 뿐이다. 단아하면서도 단단한 공심돈을 마주 하고 서니 나 역시 정조가 그랬듯이 힘껏 외치고 싶다. ‘맘껏 보아라. 동국 최초의 공심돈이다.’
- 서장대와 동장대
신풍루에서 화령전 방향으로 가다 보면 ‘생태교통마을’조형물이 보이고 ‘왕의 도로’ 안내판이 서 있다. 이 길을 걷다 보면 행궁을 중심으로 형성된 구도심길임을 실감하게 되는데 꼬불꼬불 이어지는 골목길에는 외국 유명 관광지를 연상시키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작은 레스토랑, 양품점,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하다. 제각각 개성을 풍기는 매장들을 기웃거리다 보면 어느새 화서문이다.
화서문 누각으로 올라 성곽길을 따라 600m 정도 오르면 서장대에 당도하게 된다. 화서문과 서장대 중간쯤에 서북각루가 서 있다. 늘씬한 자태를 자랑하는 서북각루에 오르면 수원시의 서쪽 지역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누각 사이로 탁 트인 대로가 쭉 뻗어나가는 모습이 산자락을 휘돌아 나오는 바람만큼이나 시원하다. 서북각루에서 땅방울도 식힐 겸 풍경에 빠져 있느라 한참을 머물렀다. 이제 마지막 급경사만 오르면 서장대다.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 계단을 올라서니 커다란 새 한 마리가 당장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기세로 날갯짓을 하고 있다. 서장대다.
팔달산 정상에 위치한 서장대는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군사지휘소이다. 그러나 누가 서장대를 보고 군사 지휘소라고 하겠는가. 서장대는 군사시설로 보기에는 너무도 아름답다. 정조는 한낱 군시설을 어쩌자고 이토록 아름답게 지었단 말인가. 세계의 그 어떤 나라에도 이렇듯 아름다운 지휘소는 없었다. 그것도 이 산꼭대기에 말이다. 서장대 주변의 소나무들은 또 어떠한가.
서장대 앞에는 첨성대를 반으로 잘라 놓은 듯한 노대가 서 있다. 적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지은 노대조차도 마치 하늘에 제를 올리는 장소처럼 신성해 보인다. 혹시 서장대와 노대는 정말로 제단이 아니었을까. 서장대에는 ‘화성장대’라는 정조의 친필 편액이 걸려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서장대는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듯 아래쪽 행궁에서도 한눈에 보인다.
동장대에서는 병사들이 무예를 연마했기에 연무대라고도 부른다. 지형은 높지 않으나 사방이 트여 있어 화성의 동쪽에서 성 안을 살피기 좋은 장소이다. 석양에 물들어가는 연무대와 일대 풍경이 아름답다.
- 북수문(화홍문)과 남수문 & 방화수류정
수원 화성으로는 광교산에서 발원한 수원천이 흐르는데, 성안으로 들어오는 곳에 북수문(화홍문)이 세워져 있고, 나가는 쪽에 남수문이 세워져 있다. 화홍문은 멋진 누각과 7개의 아치로 이루어져 있다. 여름철 7개의 무지개에서 물보라를 일으키며 부서지는 물줄기를 ‘화홍관창’이라 하여 수원팔경으로 꼽는다.
화홍문 뒤편에 높은 언덕에는 방화수류정으로 불리는 동북각루가 세워져 있다. 단 하나의 쇠붙이도 사용하지 않고 나무로만 지은 건물이다. 동북쪽 군사 지휘소로 만들어진 누각이긴 하나 정자에서 바라보는 풍광과 정자와 어우러진 주변 풍광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아름답다. 방화수류정 아래 용연이라는 불리는 연못이 있다. 방화수류정에는 4개의 달이 뜬다고 한다. 하늘에 뜬 달, 호수에 비친 달, 술잔에 담긴 달 그리고 임의 눈동자에 어린 달이다. 방화수류정의 평면지붕 형태는 18세기에는 유례없는 뛰어난 건축기술로 밝혀져 역사적, 건축적, 예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보물 제1709호로 지정되었다. 이 외에도 수원 화성은 포를 발사하는 포루 5곳과 치성, 통신 시설인 봉돈과 적대 및 각대 등 군사시설을 갖추었다.
화성은 두 발로 걸어야 한다. 걷는 자와 걷지 않는자가 느끼는 화성은 분명 다른 화성일 것이다.
p.s 우리나라의 아파트 건설업자들이 정조의 100만분의 1이라도 미래와 역사와 아름다움에 혜안이 있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습은 퍽 달라져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운행 시간: 09.40~16.30(30분마다 운행. 점심시간 12.00~12.30)
탑승 요금: 성인 4,000원/군인 및 청소년 2,500원/어린이 1,500원
문의: 031 228 -4683
l 무예24기 공연
공연 일시: 매주 화요일~일요일, 11.00~11.30 (월요일 휴무)
공연 장소: 신풍루, 화성행궁 광장
문의: 031 267 1644
l 장용영 수위의식
공연 일시: 매주 일요일 14.00~14.30(4월~10월)
공연 장소: 신풍루, 화성행궁 광장
문의: 031 290 3600
팔달문 주변에는 팔달문시장, 지동시장, 영동시장, 통닭거리 등 전통 시장들이 포진해 있다. 가장 역사가 오래된 곳은 팔달문시장이다. 1796년 처음 문을 열었다. 팔달문 시장은 ‘왕의 시장’으로 불린다. 정조는 화성을 완성하고 ‘부국강병의의 기초가 상업에 있다고 보고 팔달문에 시장을 열고 전국의 유명한 상인을 불러 모았다’. 정조는 신분계급제로 인해 정체된 조선을 살릴 방법으로 상업을 택한 것이다. 정조는 해남에 터를 잡고 무역업을 하고 있던 고산 윤선도의 후손들을 수원으로 불러 들이는가하면, 이들에게 말총전매권과 인삼 유통권 등을 허가하는 등 상업 번창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폈다.
그런가하면 남수문과 가까운 지동 시장은 100여 년전 보부상들이 터를 잡기 시작하면서 발달했다. 수원천을 사이에 두고 야채 등을 파는 노점상들이 늘어서 있고 패션과 먹거리 등도 즐비하다. 1층 순대 타운에는 20여 개의 순대 전문 식당들이 늘어서 있다. 팔달문에 맞닿아 있는 영동시장은 한복 특화 시장으로 유명하며 포목, 커튼 등의 거래도 활발하다. 이제는 팔달문 일대의 시장을 통틀어 왕의 시장이라고 한다.
수원화성의 통닭거리는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극한직업’에 등장하면서 더 유명해졌다. 1970년대 수원천 일대에 통닭 가게가 하나 둘씩 생기면서 ‘수원통닭거리’로 특화되었다. 팔달로를 따라100m거리에 10여 개의 통닭 전문점이 있다. 이 골목에서 하루 팔리는 통닭의 양이 평균 1,500마리라고 한다. 신선한 닭을 대형 가마솥에 튀겨 내어 식감이 바삭하고 양이 많아 인기가 많다. 어린 시절 술이 불콰하게 오른 아버지의 손에 들려 있던 기름 묻은 종이 봉투, 그 안에서 풍기던 고소한 기름냄새는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을 소환한다. 그 시절의 아버지가 그립다면 당장 통닭거리로 달려가라.
화성 행궁에서 나와 화성어차 매표소를 지나면 바로 신풍초등학교 옛 교문이 남아 있다. 1896년에 세워진 수원 최초의 공립학교이다. 지금은 영통으로 이전하고 옛 교문만이 쓸쓸하게 남아 있다. 초등학교 교문을 따라 화성의 옛 모습을 담은 담벼락 갤러리가 있다. 사진에 담긴 오래 전 화성의 모습과 지금 달라진 화성의 모습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 있다. 담벼락 갤러리가 끝나고 화서문로를 걷다보면 나혜석 생가터가 나온다.
나혜석(1896~1948)은 우리 나라 최초의 여류 화가이자 작가이며,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신교육과 일본 유학을 다녀온 대표적인 신여성이었다. 여성에게만 순결과 정조를 강요하는 조선 남성들의 위선을 강하게 비판했고, 자신을 옭아맨 식민지 조선의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굴레에서 벗어나 어머니와 아내도 아닌 자유로운 ‘인간’으로서의 삶을 꿈꾸었다. 한때는 촉망받는 젊은 여류 화가로서 전도유망한 젊은 외교관 김영우와의 결혼, 최초의 세계 일주 등으로 세간의 이목을 받았으나 최린과의 불륜이 문제가 되어 이혼했다. 당시 그녀는 여성의 정조만을 문제시하는 남성 중심의 위선적인 사회를 통렬히 비판하여 충격을 던졌다. 그녀의 삶은 비극적으로 끝났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다가 1948년 12월 10일 길거리에서 객사하고 만다. ‘나혜석 생가터’에는 생가터를 알리는 푯말과 벤치 하나만 덜렁 놓여 있다. 그녀의 죽음만큼이나 쓸쓸한 풍경이다. ‘여자도 사람이다’를 외쳤지만 너무 일찍 외쳤던 나혜석의 삶을 생각해 본다.
행궁에서 종로 거리를 걷다보면 북수동성당과 수원성지가 있다. 수원 교구는 2000년 화성 전체를 천주교 순교 성지로 선포했다.
정조의 사후 천주교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로 인해 수원유수부가 관할하던 한강 이남 지역과 경기도, 충청도 일대에서 천주교 신자 2천여 명이 화성으로 끌려와 처형당했다. 북수동 성당 일대는 신도들을 처형하던 토포청과 심문을 하던 이아(화청관)가 있던 곳으로 당시 사용되었던 형틀이며 고문기구들이 야외와 실내에 전시되어 있다.
북수동 성당의 제2 주차장 자리는 수원 최초의 본당인 구수원성당이 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파리외방선교회의 심뽈리 신부는 아름다운 고딕식 건물의 (구)수원성당을 세웠으나 한국 전쟁 때 심하게 훼손되어 헐렸다. 최근 복원이 진행 중이다. 북수동 성당 옆 고풍스러운 벽돌 건물은 원래 소화국민학교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뽈리 화랑으로 운영되고 있다. 1934년 문을 연 소화국민학교는 원래는 나무 건물이었으나 불이 나서 타 버렸고, 1952년 현재의 벽돌건물로 다시 지었다.
북수동성당을 지은 프랑스인 뽈리신부의 이름을 따서 뽈리 화랑이라고 부른다. 삐걱거리는 복도를 따라 오래된 나무 교실에는 천주교 박해 때 사용되었던 형구와 성당 관련 귀한 사진들이 상시 전시되고 있다. 근현대 한국천주교 역사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는 곳이다.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본 기사는 헬스오 매체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healtho.co.kr/news/view/1452064909/all/1317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