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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오컬트, 영화 <온다>

보이지 않는 그것이 온다

by 곰자




1. 기괴함은 사실 일상 속에 있을지 몰라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과 <불량공주 모모코>와 <온다>. 이 세 작품은 분명 다르다. 전작들인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과 <불량공주 모모코>는 주인공의 색깔이 강하고 그를 중심 서사에 둔 작품들이었다면, <온다>는 그다지 인물이 부각되지 않는 작품이다.


하지만 나카시마 테츠야의 작품에는 어떤 '기괴함'을 강조한다는 점에선 모두 공통적이라 볼 수 있다. 인물 묘사 보단 장면 묘사와 과도한 상황 설정 등을 고려하면 기괴함이 돋보인다. 검은색과 붉은색이 과감히 쓰이고, 쓰레기 더미 속 파묻힌 인물이 나오며 난자한 피가 온 벽을 덮는다. 자칫 보기에 거북하거나 힘들 수 있는 장면들을 가감 없이 연출한다.


<온다>는 기괴한 상황 속에서 너무나 진부한 인물이 나온다. 인물들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그저 보통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 그대로다. 하지만 그들에게 한 가지 설명할 수 없는 일이 펼쳐진다. 바로 '그것'이 오는 것. 누구에게도 보이진 않지만 소리로, 진동으로 느껴지는 그것의 힘은 영매든 무당이든 막을 수 없는 막강한 힘의 존재였다.


무난한 결혼 생활을 할 것만 같았던 히데키와 카나에게 '그것'의 힘은 견딜 수 없는 공포였고 무력해진 그들을 도우려 여러 사람이 동원되지만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히데키를 가장 무섭게 하는 것은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낮이든 밤이든 그것은 들이닥쳤고 순식간에 집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고 떠났다. 히데키는 가정을 지켜보려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그것'의 속임수에 당해 죽고 만다.


히데키가 죽고 아이 '치사'는 전부 '카나'의 몫으로 돌아간다. 남편 없이 어린아이를 혼자 키우던 카나는 생활고와 육아에 지쳐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은 단계에 이르렀고, 약간의 일탈을 꿈꾼다. 치사를 외면하고 싶게 되었을 때 '그것'이 또 등장한다. 카나 또한 영매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치사와 함께 탈출하지만 결국 공중화장실에서 처참히 살해당한다. 여전히 '그것'은 보이지 않는다.


치사에게 남모르게 정이 쌓인 영매는 아이를 끝까지 지켜주려 하며, 자신보다 더 강한 영적 힘을 가진 언니가 등장하며 영화는 또 다른 상황을 제시한다.


마치 영화가 총 3부작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3회에 걸쳐 극을 이끌어가는 주인공 또한 바뀐다. 그 주인공들은 히데키와 카나 전부 죽음을 맞이했다. 마지막 주인공인 영매와 그의 언니, 그리고 치사의 행방을 쫓아가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 스토리다.



2. 기괴한 것보다 더 기괴한 것은


이야기의 구성적인 면만 보자면 '그것'이라는 미지의 공포스러운 존재를 중심으로 주인공들이 그것에 속박당하며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만 보인다. 결국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는 '그것'이며 그것이 어디에서 왔고 왜 왔으며 어찌해야 돌아가는 것인지가 가장 중요해진다.


하지만 작품 내적으로 더 깊이 있게 들어가면, '그것'의 존재가 사실은 그 무엇도 아닐 수 있다는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사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것이겠지만 영화 속 인물들이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선택을 하는지 에 따라 각자의 내면에 도사리게 되는 존재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의 모습을 주인공마다 각자 다르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첫 번째 주인공 히데키는 대외적으로는 좋은 아빠와 좋은 남편 행세를 하고 다녔지만 실상은 모든 것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홀로 육아를 도맡아 하는 아내의 고충을 모른 체했고, 좋은 남편과 아빠의 체면만을 위해 블로그에 자신의 모습을 자랑하는 데에만 시간을 썼다. 아이가 아파도 노트북을 무릎에 올려두고 블로그를 했으며, 임신한 아내가 집들이 준비로 힘들어해도 다들 그런 것이라 무심하게 충고했다. 가장 위험한 건, 히데키 본인은 스스로가 꽤 좋은 남편이자 아빠라고 생각하며 지낸 것이었다. 아내 카나가 점점 피폐해져 가도, 그것의 원인조차 모르던 그는 결국 '그것'에게 의해 처참히 살해된다.


'그것'을 없애는 것만이 가족을 지키는 길이라 생각하며. 그것을 따돌리려 노력했지만 그것의 덫에 걸려 외롭게 죽어간 것이다.

카나 또한 히데키가 죽고 아이(치사)를 홀로 돌보며 이성을 잃어갔다. 생계와 육아를 동시에 해야 하니 그녀 혼자서는 버거웠을 것이다. 아직 아이는 어리고, 그들을 배려해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고, 세상의 속도에 둘만이 어떻게든 맞춰가야 했다. 결국 카나는 정신을 놓아버렸고, 그녀의 엄마처럼 건강한 삶은 팽개쳐버린 여자가 된다. 심지어 자식마저도 저버리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고, 엄마 역할과 카나 개인의 자아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그것'에게 살해당한다.


3. ‘그것’은 어디에나 있다


난 영화를 보면서 '그것'의 존재가 늘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어떤 '결과'가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가 매번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그것'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이다. 누구든 그것을 항상 어깨에 메고 다니며 생활한다. 올바른 선택을 내리지 못할 때 그것은 작동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잠시 방황하고 내렸던 선택이, 무지해서 외면했던 결과가 무거운 책임감으로 우리를 따라오는 것이다. 어깨에 메고 있던 망태 주머니 속에서 '그것'은 슬그머니 내려와 우리 앞을 가로막고 결국 책임을 다하지 못했을 때 우리를 죽여버린다.


물론 카나보다 히데키의 죽음이 더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책임을 더 못다 한 쪽은 카나보단 히데키 쪽이라 생각하며, 카나는 인간으로서 최선의 노력은 다 했다고 다독여주고 싶다.


그래서 히데키의 죽음엔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보이지만 카나의 죽음엔 어떤 이유가 정확히 있었는지가 사실 크게 납득되지 않는다는 점이 아쉽다. 무지하고 무심했던 히데키보다 굴곡진 삶에서 균형을 잡아가려 애썼던 카나는 왜 '그것'의 압박을 받았어야 하는지. 카나라는 캐릭터의 감정이 바뀌어 가는 부분은 매력적이었지만 그녀의 죽음을 조금 더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면 하는 아쉬움은 끝내 떨치기 어려웠다.



그리고 후반부, '그것'을 물리치려는 마을 사람들의 굿판. 그것의 존재가 히데키와 카나의 이야기에선 막강했던 반면 후반부로 가서 그것의 존재는 조금 우스운 장치로 사용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후반부 사람들에겐 '그것'의 존재가 카나보다 더 납득되지 않았다. 결국 히데키에서 시작된 어떤 공포의 존재가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스토리밖엔 던져주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괴함의 참신함을 보고 싶다면 이 영화를 추천한다. 또한 그것의 모습을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연출해낸 것이 매력적이었다. 과장된 것 같은 배경 묘사에서도 감독만의 색깔이 있었고, 애초에 그런 과장됨을 보여줄 것을 약속하고 영화를 시작했기 때문에 보는 사람 입장에서 동화되는 것도 있었다.


내게 있는 ‘그것’은 얼마나 기괴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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