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현실 사이

by 루펠 Rup L

대학 때 배웠던 수학 과목 중 <수치 해석>이라는 것이 있었다. 당시 계산을 위해 공학용 계산기로 프로그래밍을 하면서 재미를 느꼈었는데, 사실 그것도 특정 주제에 대해 발을 담가본 수준에서 접했으니 재미가 있었지 그 자체로서 파고드는 과목이 있었다면 과연 수강할 엄두나 났을까 싶다.
당시 내가 파악한 수치해석의 아이디어는, 단번에 값이 나오지 않으면 대입법으로 해와 비슷한 것이 나올 때까지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네 자리 비밀번호를 찾기 위해 0000부터 9999까지 대입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예를 들어 실제 해가 x=2.5인데 계산으로 구할 수 없다면 맞는 y값이 나올 때까지 x에 0,1,2,3,4,5를 마구 넣어 보다가 2와 3에서 비슷하게 나오는 것을 보고 2.1,2.2, 2.3 같은 값을 반복해서 넣어 보는 것이다. 그렇게 점점 좁혀 가서 내가 원하는 해상도의 값이 나오면 그것을 해로 사용한다. 이 방식을 처음 접하고 나서 머릿속에 든 생각은 무엇보다 '현실적이다'라는 것이었다. 방정식은 아름답고 실용적이지만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우리 세계와 동떨어진 수학의 세계가 따로 있어서 그곳을 엿보는 느낌이었다면, 이렇게 일일이 손에 쥔 숫자들을 하나씩 넣어보는 것은 차라리 물리 실험과 비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조금 다른 문제이기는 하지만 블랙홀의 특이점에 대해서도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특이점이라는 것이 수식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접근할 수만 있을 뿐 실존하지는 않는 게 아닐까. 무슨 말이냐면, 나는 특이점의 '존재'는 믿지 않는다는 뜻이다. 특이점에 무한히 가까워지면서 비슷한 현상을 관찰할 수는 있지만 절대적인 진공이 현실에 있을 수 없듯이 그 개념이 현실화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이다. 블랙홀은 단지 수학적인 블랙홀처럼 보이는 천체일 뿐이며 실제로 블랙홀이 존재한다면 가지고 있을 특성을 상당 부분 관찰할 수 있을 테지만 전부는 아닐 것이다. 질량과 부피 때문에 중력 증가가 어느 정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부분도 있을 것이고 그로 인한 시간 흐름의 둔화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력과 시간 흐름이 마치 공간이 수직으로 꺾이듯 변할 수는 있되 수직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빛이 들어가고 나면 시간이 굉장히 느리게 흐르기 때문에 다시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관찰'될 수는 있으나 빛이 멈출 수는 없으므로 그 안의 시간으로 빛의 속도로 통과할 뿐 실제로 그 중심의 천체에 부딪히거나, 혹은 그 곁으로 통과하고 나면 다시 그곳의 시간으로 빛의 속도로 벗어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지금 50억 년 전에 생긴 블랙홀을 보고 있고, 그 안을 빛이 통과하는 데 우리 시간으로 20억 년이 걸린다면, 빛이 들어가서 중심 천체에 부딪힌 후 다시 나오는 데까지 40억 년이 걸리므로 우리가 보기에는 어두운 천체로 보일 뿐 딱히 블랙홀처럼 보이지는 않을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빛이 그냥 반사되어 나오거나 오랜 시간에 걸쳐서 뒷부분의 및이 통과해 나와서 행성 같은 존재인 줄 알았던 블랙홀이 발견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절대 특성으로의 접근으로 인해 절대 특성의 현현으로 보이는 건 우리 인생에서도 종종 보이는 환상이다. 성공한 작가가 되고 싶다거나 모든 수준을 뛰어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꿈은 우리가 그곳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환상을 계속해서 심어준다. 그러나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라서 칭송을 받을 뿐, 그 꿈은 현실적인 인간의 한계로 인해서 실제로는 블랙홀의 특이점처럼 도달이 불가능한 곳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현실적으로 도달이 불가능하다'는 이러한 깨달음은 죽음 때문에 조바심 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어차피 누구나, 인간의 역사를 등에 지고 무한히 접근할 수 있게 짓눌려 가며 구르는 바퀴가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