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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산 Mar 12. 2020

가오나시의 정체에 대한 근거 없는 탐구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대한 스포일러와 작중 캐릭터에 대한 터무니없는 추측이 있습니다.)


(♬ Joe Hishaishi - The Sixth Station)



스스로를 소유하는 특권을 위한 대가는 아무리 비싸도 과하지 않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니체의 이 멋진 말로 갈음할 수 있겠지만, 이미 가오나시에 대해 넘치도록 나온 이 뻔한 문장을 스스로 창출하기까지의 과정을 커다란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풀어보려 한다.




가오나시의 정체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하 <센>)을 처음 봤을 때부터 치명적으로 궁금했다. <센>은 초등학생 때 처음 봤는데, 가오나시는 아무리 어린 나이에 보더라도 누가 봐도 다분히 상징적인 존재지 않은가. 우리나라에서 '멋'이라는 의미로 통하던 '가오'가 실은 일본어였단 사실을 깨달은 초등학생은 가오나시란 멋없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해석을 친구들에게 들려주며 "오~"하는 찬사를 받기도 했지만 그게 터무니없단 건 그때도 알고 있었다.


가오나시의 정체를 밝혀내는 일은 사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인터넷을 뒤졌다. 사람들은 가오나시를 물질만능주의가 낳은 괴물, 끝없는 욕구에 시달리는 안쓰러운 패자(敗者) 등으로 해설하고 때로는 사회적 의미나 일본의 사회상을 곁들이며 그걸로 충분한 듯 넘어가곤 했지만 난 그걸로 충분하지 않았다. 해설이 아니라 해석이 필요했다. 그러나 나 또한 그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순 없었다.
 
얼마 전 우연찮게 <센>을 다시 보고 나서는 어쩌면, 가오나시는 유바바의 여관에서 일했던 옛 직원이 아닐까 생각했다. 높은 간부였거나, 혹은 아주 소중한 자기만의 소망을 품고 있던, 멋진 직원이.





(1) 가오나시는 배를 타고 등장하지 않았다. 마을에 있지도 않았다. 가오나시는 쭉 여관을 맴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오나시가 정처 없이 유랑하는 요괴라 우연히 여관을 지나던 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센을 만난 후로 줄곧 센을 쫓아다녔고, 이후에 제니바의 집에 정착한 걸 보면, 가오나시는 무작정 방랑하는 요괴가 아니라 어딘가 애착이 있는 대상 곁에 붙어 있거나 따라다니거나 그 주위를 공전하는 요괴다. 그런 가오나시가 처음 나타난 곳이 여관 주변이었다. 가오나시는 무슨 이유에서든 어떤 형태로든 여관에 애착을 품고 있었고, 여관을 맴돌고 있었다.
 
(2) 가오나시는 여관 직원들에게는 자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는데, 센을 만나고선 '얜 뭐지' 하는 느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가오나시는 기존의 직원들과 센을 구분했다. 기존의 직원들을 안다는 의미고, 그건 여관을 쭉 지켜봐야 가능하다. 가오나시는 여관이 친숙했던 것이다. 게다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은 센이 여관에서 일을 시작하자마자였다. 가오나시가 여기저기를 떠돌다 아주 우연히 센과 같은 시기에 유바바의 여관을 지나게 되었다는 추측은 개연적이지 않다.
 
(3) 가오나시는 약수를 위한 빨간 팻말 중 능숙하게 좋은 것을 골라냈다. 여러 팻말 중 좋은 건 값도 비쌀 테고 수도 적을 테니 좋은 팻말을 뽑은 게 우연이라고 하기엔 미심쩍다. 팻말은 직원용 도구고 팻말에 그려진 문양의 의미는 직원들만 아는 것이다. 가오나시가 어떤 마법의 힘으로 그 의미를 파악했을 수도 있지만, 직원들이 사금을 좋아한다는 것도 그 모습을 직접 보고서야 깨달았던 걸 보면 이면의 의미와 진실을 밝혀내는 마력은 없는 것 같다. 팻말의 가치를 구분할 줄 알았던 가오나시는 여관을 오래 지켜봤든 옛날에 내부에서 일을 했든 했던 것이다.




일본어에는 나나시(名無し)라는 단어가 있다. '이름 없음'이란 뜻이다. 유바바의 여관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모두 나나시다. 이름을 빼앗겨서 없다. 원래부터 자기만의 이름이 없었는지도. 유바바는 치히로(千尋)에서 센(千)만 남겼고, 니기하야미 코하쿠누시(饒速水琥珀主)에서 하쿠(珀)만 남겼다(유바바의 여관이 일본의 옛 성매매 업소를 모티프로 했으며, 유바바가 주는 새 이름이 기명(妓名)의 변주라는 해설도 많다). 슬슬 가오나시(顔無し), '얼굴 없는' 존재의 의미가 밝혀지는 것 같지 않는가.
 
유바바가 준 이름은 일하는 존재로서의 이름이다. 인턴, 사원, 대리, 과장… 따위와 같다. 하야오는 회사원들이 그냥 개구리 같은 인간들이라고 비판한 적 있다(개구리 비하라고 너무 비난하진 말자). 여관의 남자 직원들이 개구리로 표현된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름 없는, 다 똑같이 시시한 속물들. 더 개구리 같은 남직원은 더 속물적이며, 덜 개구리 같은 남직원은 덜 속물적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불 꺼진 밤에 몰래 사금을 찾으러 왔던 남직원은 완전한 개구리였다. 본명을 기억하고 있는 센만이 나나시가 되지 않으며, 시시한 현대인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여관이 물질만능주의 내지는 신자유주의의 세계를 상징하며 여관의 직원들이 현대인의 표상이라는 주장은 그래서 힘을 얻는다.
 

덜 개구리 같은 남직원과 더 개구리 같은 남직원들과 아예 개구리 그 자체가 되어버린 남직원


나나시들은 일에만 몰두한다. 돈을 좇기 때문이다. 돈을 무작정 좇는 건 아니다. 돈이 나나시들을 그나마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가게 하므로 좇는다. 나나시들이 일에만 몰두하는 이름 뺏긴 존재--혹은 자기 이름이 없는 존재--임에도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건 내면에 소망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린이 돈을 벌어 어디론가 떠나겠다는 막연한 소망을 가지고 있듯이. 그 소망은 돈을 벌어야만 현실화할 수 있다. 이름을 빼앗김으로써 자기 존재를 위한 주권을 반쯤 일터에 양도해버린 나나시들의 정체성을 미약하게나마 지탱하는 건 아직도 버리지 않은 그 소망이다.
 
각기 다른 소망은 각기 다른 정체성이고, 나나시 한 명 한 명을 그나마 고유한 존재로, 한 줌의 존엄을 가진 존재로 남긴다. 소망과 돈의 비중에 따라 남직원들의 얼굴이 더 개구리스럽거나 덜 개구리스럽게 표현됐듯이.


린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바다 너머의 마을에 살 거라는 소망이 린을 린으로 존재케 한다. 여관 직원들 중 린의 얼굴이 유독 돋보이는 건 린이 주요 조연이어서기도 하지만 린이 센에게 그리고 관객인 우리에게 자기 소망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연출자조차 린을 조금이라도 더 입체적이며 중요한 캐릭터로 그리기 위해선 그 정도의 설정을 부여해야 하며, 설정을 부여받은 캐릭터는 더 풍부한 작화를 보장받는다. 소망이 없었다면 린은 특별한 존재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며, 린의 얼굴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그려졌을 것이다. 하쿠가 그렇게 멋졌던 것도 강렬한 소망을 품고 있어서다. 소망은 얼굴이고, 소망하는 존재는 얼굴이 있는 존재다.





사금에 환장하는 것도 소망이 있어서다. 배금하는 인간이란 금을 숭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금을 통해 소망하는 존재다. 금에 대한 숭배는 소망에 대한 숭배고 자신에 대한 숭배다. 금으로써 자신을 정체화한다.
 
그래서 물질만능주의는 아주 인간적이고 애달픈 현상이다. 황금을 숭상하는 사람들은 내면에 소박하거나 거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 소망을 실현할 방도가 세속적이더라도 포기할 수 없다. 스스로 세속적이고 시시한 인간이 되길 감내하면서도 배금을 놓지 못하는 건,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처럼 초월하거나 하야오처럼 도전하지 못하는 한, 주어진 질서 속에 내던져진 나약한 존재에게 적어도 이 세상에선 돈이 소망의 실현을 가능케 하는 만능열쇠기 때문이다. 린이 친근한 이유는 소망을 갖고 있어서다.
 
그런데 그 소망마저 없다면 어떻게 될까. 질서 속에서 소망하지 않는 사람은 황금을 꿈꾸지 않고, 그건 배금하는 일보다 더 슬픈 일이다. 린이 여관일을 그만두고 바다 너머의 마을에서 살겠다는 꿈을 꾸지 않게 된다면, 하쿠가 자기의 원래 이름을 찾으려는 꿈을 꾸지 못하게 된다면. 돈을 좇을 필요도, 마법 실력을 높일 필요도, 유바바 밑에서 일을 할 필요도 없다.



자기만의 고유한 소망이 없는데도 어쨌든 일하는 자는 그냥 기계가 돼버린 자거나, 소망을 일로, 혹은 일을 소망으로 만들어 버린 자다. 어떤 일을 하든 일과 무관한 자기만의 소망을 품고 있다면 일이 사라져도, 직장에서 쫓겨나도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소망이 있다면 스스로 새 이름을, 진짜 이름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런데 일과 소망이 동치가 되면, 일이 사라질 때 소망도 사라지며 그 인간은 정체성을 잃는다. 은퇴 후 우울증 발생 확률과 극단적 선택을 하는 안타까운 사례가 늘어나는 까닭이다.
 
그것이 일이었든 자기만의 꿈이었든 고유한 소망을 잃은 자는 무너진다. 센이 부모님을 찾아 원래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소망을 빼앗겨버린다면 그만큼 비극적인 일은 없을 것이다. 센의 얼굴엔 웃음이나 울음 같은 게 피어날 수 없다. 소망을 빼앗긴 자는 얼굴을 잃어버리게 된다. 완전한 절망과 공허에 빠지는 이름도 소망도 얼굴도 없는 존재. 가오나시.




가오나시는 희귀한 요괴다. 늘상 요괴들을 상대하는 여관 직원들도 가오나시를 몰랐다. 가오나시의 존재를 알았던 건 지식이 많은 유바바와 제니바뿐이었다. 가오나시는 애초에 희귀한 요괴였을 수도 있지만, 불가해한 존재가 등장하면 대체로 그 정체나 기원이나 역할을 명확히 알려주는 하야오의 다른 작품에 비하면 지나치게 불가해하다. 그러나 '~나시'의 연속선상에서 생각하면 비교적 명쾌해진다. 가오나시는 어쩌면 나나시였던 게 아닐까.


나나시들은 적당히 살아갈 수 있다. 아주 극적인 사건이 벌어지지 않으면 늘상 그렇게 흘러가는 곳이 요괴의 세계다. 센이 여관을 한바탕 휩쓸고 간 후 하쿠가 자기 이름을 되찾았던 것처럼. 여관을 잘 운영해야 하는 유바바는 여관 운영의 불안정성을 최소화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소요를 만들지 않으려 한다. 오물신을 내보내려 하고, 가오나시를 제압하려 했듯. 그러므로 가오나시는 웬만해선 태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유바바는 평상시에 현상 유지에 골몰하므로 역설적으로 극적인 일을 충분히 벌일 수 있다. 유바바는 이익에 복무한다. 유바바 여관 운영의 안정성을 유지하려 하는 건 이익을 위해서고, 이익이 되지 않거나 손해가 더 클 것 같은 경우엔 가차없이 극적 행동을 취한다. 하쿠의 쓸모가 다하자 죽여 없애려고 했고, 센의 양육자를 먹이로 만들려고 했다. 유바바의 두 계획 중 하나가 실현되었다면 센이나 하쿠 중 하나는 이름도 소망도 얼굴도 없는 가오나시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한 마리의 가오나시가 태어났다면, 작중의 가오나시가 여관을 맴돌고 있었다는 점에서 착안해 어떤 나나시가 가오나시로 변해버렸다면, 그건 여관에 자기 생을 걸고 여관의 번창을 소망으로 삼았던 직원이 해고를 당한 적이 있다는, 혹은 자기만의 소중한 소망을 품고 있던 직원이 그 소망을 완전히 박탈당한 일이 있다는, 그렇게 하나의 나나시가 얼굴까지 잃어버린 사건이 있었다는 것이다.





가오나시는 여관에서만 공허함과 외로움이 증폭되는 존재였다. 그건 여관이 본인의 거처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여관이 공허함과 외로움을 부채질하는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관은 돈을 써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돈을 써서 즐거운 목욕을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참된 행복을 얻고 공허함과 외로움을 잊을 수 있다고 홍보하는 곳이다. 그렇지 않으면 공허함과 외로움은 영원히 지속될 거라고 은밀하게 속삭이는 것과 같다. 모든 개인에게 끝없는 성장과 소비가 끝없는 만족과 행복을 줄 거라고 약속하며 그러지 않으면 영원히 불만과 불행에 젖은 존재가 될 거라고 협박하는  사회.

 

자기만의 이름과 자기만의 소망이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자는 여관으로 상징되는 자본과 시장의 사회에 내던져지면 순식간에 괴물로 변해버릴 수밖에 없다. 여관-현대사회가 제공하는 만족이란 잠시의 진통제 역할을 할 뿐이다. 잠시가 지나면 바로 다음의 잠시가, 미뤄뒀던 고독과 공허의 그림자가 덮쳐온다. 그걸 피하기 위해선 다시 식사를, 목욕을, 소비를 해야 한다. 그 잠시가 지나면 또다시 다음 잠시가 오고, 다시 식사를, 소비를 하고…….

 

그러나 이 헛된 루프는 외로움과 공허함을 진실로 달래지 못한다. 루프가 무한히 지속될수록 외로움과 공허함은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했기에 점점 몸집을 불려 가며 점점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가오나시는 처음에는 작은 팻말로 센에게 호의를 보일 수 있었지만, 필연적으로 그보다 더 큰 걸 제공해야 한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괴물이 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여관에도 식사, 목욕, 소비로 획득되지 못하는 어떤 가치는 있다. 그 상징이 센이다. 센은 당연하게도 돈으로 살 수 없다. 모든 인간은 돈으로 살 수 없고, 사서도 안되니까. 가뜩이나 헛된 루프에게 갇힌, 아주 간신히 공허함과 외로움을 참고 있는 위태로운 존재는 그런 가치가 눈 앞에 당도하는 순간, 그리고 그 존재를 다른 물화된 것들과 같은 방식으로 소유하고 소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러니까 소비라는 게 진실한 욕망 앞에선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와르르 무너진다.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다.

 

자기만의 진실된 그 무엇도 가지지 못한 가오나시가 그토록 진실된 존재를 만났을 때, 자신에게 박탈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닌 이를 만났을 때 강렬한 소유욕을 느낀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요컨대 따뜻한 마음, 진심 같은 뻔하고 유치하지만 가장 강력한 것. 그러나 그걸 예쁘게 가다듬고 표현하는 방법은 단언컨대 우리를 포함한 우리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 거의 모두가 모른다. 연애와 결혼만 유일한 안식처 되어버린 세상의 우리 얼마나 많은 집착과 상처들에, 또 얼마나 많은 체념과 달관에 휩싸여 있나. 가오나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여관 안의 가오나시는 반드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현대사회의 바깥을 의미하는 강의 신이 준 경단을 괴물이 된 가오나시가 먹었을 때 구토를 하며 괴로워한 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란 가오나시를 가득 채우고 있는 여관의 이데올로기--이름도 소망도 없이 무한히 소비하라--에 정면으로 반하기 때문이다. 가오나시가 토해낸 건 여관의 이데올로기였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선 자기만의 소망을 갖거나, 그 세계를 탈출해야 한다. 세계 안에서는 소망이 없으면 버티기 힘들지만, 세계 밖에서는 소망 없어도 살 수 있다. 친절한 안내자가 있다면. 제니바 옆에서 안정됐던 가오나시처럼.



그릇된 세계일지라도 한 세계를 탈출하는 일은 아주 쓸쓸하다. 차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장면은 극히 슬프게 연출됐다. 글머리에 소개한 음악을 들으셨다면 기억났을 것이다. 적어도 내 주변에서 열차 씬이 슬프지 않았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보면서 운 사람도 있었다. 센은 치히로로 돌아오며 여관일을 그만뒀고 하쿠는 코하쿠누시로 돌아오며 제자일을 그만뒀고, 둘 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로 했고, 그건 이별이었다. 마지막 터널 또한 그만큼 쓸쓸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그만큼 희망으로 충만한 장면은 없었다. 희망은 원래 슬픈 감정이다. 무언가를 버림으로써 거듭나려는 마음가짐이므로.

 

여관의 음식은 맛있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연은 엄청나게 맛이 없다는 식의 표현도 생각해봄직하다. 이 근사한 교훈을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단순한 사고방식으로 치환하는 어른은 없길. 여하간, 니체가 말한 대로, 스스로를 소유하는 특권을 위한 대가는 아무리 비싸도 과하지 않다. 결국 <센>에 대한 가장 보통의 해설로 마무리된 셈인데, 어쨌거나, 우린 여관 안에서든, 여관 밖에서든, 스스로를 잃지 않고 잘 살아가야 한다.

 



논외지만, 유바바도 나나시다. 일본어로 유바바湯婆는 목욕탕 할머니란 뜻이다. 그건 자기만의 이름이 아니다. 유바바의 쌍둥이는 제니바다. 쌍둥이인데 한 명은 영어 이름, 한 명은 일본어 이름, 한 명은 '이름' 이름, 한 명은 직책 이름을 갖고 있다. 유바바는 자기만의 이름일 수 없다.

 

유바바도 다른 나나시처럼 정신없이 돈을 좇는다. 그에게 있는 단 하나의 소망은 아들이다. 아들이 없어졌을 때 유바바는 이성을 잃고 광폭하게 변했다. 화려하게 치장된 유바바의 집무실과 방은 그가 소망을 얼마나 간절하게 쫓았는지를 증명한다. 그런 유바바가 진짜 이름과 진짜 소망을 갖고 있는 제니바와 철천지 원수처럼 싸우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여관의 말단 직원부터 최상층의 지도자까지 모두 이름 없이 돈만 좇는 아사리판, 현실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이 가능하다.

 

유바바에게서 원래 이름을 빼앗아간 건 누굴까? 자기 스스로일 수도 있고, 유바바 이전에 여관의 주인이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가오나시가 여관의 전임 주인이었고, 유바바에 의해 살해당했거나 실각했다는 상상도 가능하겠다.

 

여담으로, 지브리의 설명에 따르 하쿠는 결국 자기 세계로 돌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유바바와의 계약을 파기할 명분이 없으며, 치히로와 달리 정확한 이름을 적었기에 계약 무효 선언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쿠는 가오나시가 되진 않았을까.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하쿠는 자기 이름을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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