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짬짜면 같은 선택은 없다
피아노 건반을 만져본 건 7살 때였다. 엄마의 권유로 동네 피아노 학원에 다니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피아노에 푹 빠져버렸다. 밤낮으로 종이 건반을 두들기며 진짜 피아노를 사달라 노래노래 불렀다고 한다. 피곤함을 이기지 못한 엄마는 3달 만에 학원을 그만두게 했다. 아무튼 현재 나는 도레미파솔라시도만 아는 상태이고, ‘비자발적인 피아노 학원 그만둠’은 자라는 내내, 지금까지도 감상에 젖어 들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어주고 있다. 피아노를 꾸준히 쳤다면 지금쯤 임윤찬님 같은 거장이 되어…? 아니 최소한 다룰 줄 아는 악기 하나쯤은 있었겠지 싶다.
요즘 가을 바람과 함께 다시 피아노 바람도 솔솔 분다. 아이의 세 돌이 다가오니 워킹맘에게도 약간의 숨 쉴 틈은 생기나보다. 이번엔 바로 행동으로 옮겨보자 싶어 학원부터 알아봤다. 혼자서는 도무지 시작할 엄두가 안 났다. 집이라는 공간이 내게 주는 편안함은 안정감을 넘어서 안주하게 만든달까. 우선 집에서 가까운 몇 군데를 체크해 전화로 방문 약속을 잡았다.
처음 들린 곳은 동네를 오가며 봐두었던 곳이다. 오피스텔 2층에 자리 잡은 A음악 학원. 간판과 로고 스타일에서부터 세련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문을 열자마자 하얗고 깨끗한 시설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개원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다고 했다. 넓은 공간에 피아노가 7~8대쯤 되어 보였고 피아노 외에도 첼로, 바이올린도 있었다. 선생님은 5명 이상이라고 했다. 나를 맞이한 사람은 원장이었다. 그녀는 학원 간판처럼 세련된 블랙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수강생들의 동영상을 보여주며 207호님도 이렇게 그럴싸하게 연주할 수 있다고 했다. 크고 깨끗한 공간 속 그랜드피아노 앞에서 쇼팽의 녹턴을 연주하는 내 모습이 상상되어 격하게 흐뭇해졌다.
“수요일 오전 11시 타임만 비어요. 얼른 등록하셔야 해요.”
원장은 조금 도도한 말투로 수업은 직접 진행하지 않는다고 했다. 5명의 강사가 학생과 스케줄을 조율해 진행하는 방식이라고. 수강생이 많아서 하루라도 빨리 등록하지 않으면 딱 하나 남아있는 자리도 금방 차버린다고도 했다. 약간 ‘홈쇼핑 매진 임박’ 류의 부추김과 비즈니스적인 냄새에 한걸음 물러섰다. 조금만 더 고민해보고 다시 연락드리겠다 말하고 일어서려는데 갑자기 “저희가 당한 적이 있어서요. 하시겠다고 말씀해서 강사분께 말씀드려놨는데, 안 하시면 곤란해요.”라는 게 아닌가. 오늘은 상담만 받았을 뿐인데. 죄를 지은 기분에 후다닥 뒷걸음질로 학원을 나왔다. 하물며 요즘은 의류매장 직원도 편하게 입어보시고 안 사셔도 된다고 하는 세상인데요.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그날 오후 두 번째 B피아노 학원을 찾았다. 우리 아파트 상가에 있는 작은 곳이었다. 30년 된 아파트 상가의 상태(리모델링 안 함)는 대충 짐작될 것이다. ‘허름 그 잡채’. 피아노는 2대, 선생님은 1명. 정말 작은 공간이었다. 방음 시설은 하나도 되어있지 않아 보였다. 피아노는 2대이지만 1대밖에 운용할 수 없는 구조라니. 그럼 수익은 어떻게 내는 거지? 학원에 들어온 지 5분 만에 되려 학원 사정이 걱정되기까지 했다.
원장이자 선생님은 내게 왜 피아노를 배우려 하냐고 물었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너무 좋아해서 배우고 싶었는데 기회가 닿지 않았다며, 이제는 제대로 배워서 내 아이에게도 피아노를 직접 가르쳐주고 싶다 했다. 그녀는 어린이용 교재를 보여주었다. 놀랍게도 우리가 어릴 적 배웠던 교재와는 완전히 달랐다. ‘도레미파솔라시도’는 아예 등장하지 않았고 오선지조차 한참 뒷부분에 등장했다. 오른손부터 배우고 왼손이 중반부터 등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오른손 왼손 사이좋게 처음부터 같이 배우는 것도. 음악을 듣고 즐기며 머리가 아닌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그녀의 교수법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누군가 쳐들어올 것 같은 피난처 같은 공간만 아니었어도 당장 등록했을 것이다.
짜장면과 짬뽕의 매력처럼 달라도 너무 다른 두 학원. 사실 짜장면이냐 짬뽕이냐 무얼 먹을지 고민될 땐 짬짜면을 고르면 될텐데, 피아노 학원도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리. 그냥 직관적으로 몸이 기우는 곳을 택해볼까 한다. 어차피 몸으로 체득할 음악을 배우는 곳이니까. 오늘 짜장면을 먹으면 내일 짬뽕 먹고, 모레는 탕수육 먹으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가볍게 선택해서 꾸준히 가벼운 마음으로 이어나가고 싶다.
드디어 이번 주 목요일 첫 수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