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우리 아이만할 때니 90년대 초반의 어느 날이다.
당시 나는 엄마가 운영하는 작은 피아노학원에 딸린 가겟집 단칸방에 살고 있었다. 단칸방과 조그만 화장실(이라고 할 수도 없는 변기 하나 정도), 온수조차 나오지 않는 열악한 수도, 그리고 무려 커다란 LPG 가스 통을 배달해 난방을 하던 주방 아닌 주방이 있었다.
대체로 썩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내 유년시기 중, 얼마 되지 않는 아련하고도 따듯했던 이야기를 하나 해 보려고 한다.
피아노 학원 수업이 없던 날이니 아마도 주말이었을 것이다. 엄마와 나는 그 날 아무도 없는 피아노 학원 공간에서(그러니까 우리 집에서) 쿠키를 구웠다. 그런데 말이 쿠키지 오븐도 없고 제대로 된 베이킹 재료도 없었으니 그 결과물은, 그야말로 돌덩이를 씹어먹는 느낌이었다. 무엇으로 구웠는지도 모르겠고, 아마 후라이팬 같은 것으로 구웠는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에 없는 살림이니 아마도 버터조차 충분히 넣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날의 돌덩이 같았던 쿠키를 구운 날이 너무 좋았다. 엄마와의 손에 꼽히는 즐거웠던 유년 시절의 추억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쿠키를 구운 공정 따위는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그 날 아마도 나는 우리 엄마하고 많이 웃었을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당시 어린 날의 내게 쿠키를 굽는다는 건 마치 동화 속과 같은 이벤트였을 것이다. 쿠키는 제과점에서나 파는 것이고, 그것도 엄마의 주머니 사정이 좋을 때나 사 먹을 수 있고, 집에서 쿠키를 먹는다는 건 세계명작동화 속 지구 반대편의 아이들이 하는 일 같았으니까. 결과물이 어떻든 마냥 즐겁고 행복했을 것이다.
특히 늘 생계에 지쳐 있던 엄마와 오랜만에 쿠키를 굽는 한가로운 일을 했다는 게, 어린 나에게도 크나큰 행복감으로 다가왔던 게 아닐까.
그 때의 그 기억이 너무 인상깊게 남아서, 나는 엄마가 되고 아이와 여러 번 집에서 쿠키를 구웠다. 아이가 서너 살 아기일 땐 그냥 사실상 모든 과정을 내가 다 하고 아이는 그저 사진 찍을 때 약간의 반죽만 조물조물 해 보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 아이도 어엿한 6살이 되고, 내가 엄마와 돌덩이 쿠키를 구웠던 나이와 비슷해졌다. 이제는 나름대로 스스로 할 줄 아는 것이 많아졌다.
오랜만에 그 날의 나와 엄마가 생각나서 또 쿠키를 구웠다. 생각보다 제법 많은 양의 버터를 넣고, 계란도 깨서 넣고, 나무 주걱으로 젓는 건 아이가 조금씩 했다. 단 냄새가 올라오는 쿠키 반죽이 만들면 아이가 조그만 손으로 동전 같은 쿠키를 만들어서 유산지에 올렸다. 아이 얼굴처럼 동그란 쿠키 반죽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반죽들이 구워지면서, 마침내 집 안을 달콤한 냄새가 가득 채우기 시작하면 쿠키가 완성된다. 이래서 쿠키를 굽는 마음은 늘 설렘으로 기억되나보다.
사람은 후각으로 기억을 한다. 쿠키 역시 냄새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냄새에 이끌려 완성된 쿠키를 확인해 보면, 따끈하고 달콤한 쿠키들이 모습을 나타낸다.
쿠키는 분명히 주식과는 거리가 멀다. 빵은 그래도 밥 대신 먹기도 하는데 식사 대신 쿠키를 먹기에는 뭔가 너무 허전하다.
일단 영양적으로도 너무나 불균형하다. 기껏해야 탄수화물과 지방, 당분만 가득 채워져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폄하하기에는 쿠키는 너무 특별하다. 특히나 집에서 직접 갓 구운 쿠키라면. 가족과 함께 웃으며, 집 안을 가득 채운 달콤한 냄새를 맡으며 기대감에 부풀었던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사람이란 영양가 있고 쓸모 있는 것만으론 살지 못하는 존재인 것 같다. 나는 오래도록 불필요한 일을 하지 않고, 생산적인 일만 하려고 불철주야 뛰어다녔다. 그런 시간들이 나를 키워 준 부분도 있지만, 정말 지칠 때는, 넘어져버렸을 때는, 식사가 아닌 쿠키가 생각난다. 엄마와 구웠던 맛 없고 영양가도 없었을 그 쿠키가 나를 다시 일으켜세운다.
우리 아이와 구웠던 쿠키가 언젠가 그런 기억으로 남게 되기를, 설령 풍요로운 시대에 태어난 내 아이는 이걸 전혀 특별한 기억으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아직 말랑하고 통통한 볼살을 가진 어린 아이와 구웠던 쿠키는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