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고양이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시작된 열병은 그렇게 가라앉고, 레아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오후 3시, 언제나 평화로운 마을 사무소에 졸음 공기가 퍼질 무렵.
거북 아저씨는 아예 고개를 끄덕끄덕 흔들면서 졸고 있고 페더 씨는 눈만 뜨고 있을 뿐 머릿속으론 퇴근 후 아내랑 뭘 해 먹을지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레아도 멍-한 표정으로 다 쓴 서류 귀퉁이에 낙서만 하고 있다.
정적을 깬 것은 미세스 펜네 소장님이다.
"레아, 이 서류 좀 스미스 씨 공방에 갖다 줄래요? 이번 마을 축제 대비해서 무대 시설 점검해야 하는데, 대장간에서 확인할 목록이에요. 무대 앞에 의자를 좀 놓을 건데 시제품 좀 만들어 달라고 전달해 줘요."
"알겠습니다, 소장님."
레아는 자전거를 타고 언덕에 있는 스미스 씨 대장간에 간다.
공방 안에 들어가기도 전에 나무 톱밥 냄새가 자욱하다.
"스미스 씨, 안녕하세요. 마을사무소 레아에요."
"오, 어서 와 레아. 그렇잖아도 기다리고 있었다. 축제 일로 온 거지?"
"아, 안녕...레아."
덩치 큰 스미스 씨 뒤로 체구가 작은 비버 한 마리가 수줍게 등장한다.
비노. 레아보다 한 살 어린, 숲속마을에서 나고자란 친구다. 엄마곰과 함께 도서관에서 일하는 비비의 오빠다.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좋아서 목공을 취미로 하다 스미스 씨의 조수로 일하고 있다. 성격은 다소 소심하지만 특유의 꼼꼼함으로 스미스 씨가 놓친 부분을 챙기기도 하고, 최근에는 제법 괜찮은 작품을 만들어내며 스미스 씨의 신임을 받고 있다.
그때 스미스 씨가 서류를 훑어보곤 말한다. "음, 이 정도는 우리 비노도 할 수 있을 것 같군. 나는 지금 여우 씨네 농장 울타리 수리하러 가야 해서. 비노야, 잘 부탁해."
"엇... 알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스미스 씨가 나가버리는 바람에 공방엔 레아와 비노만 남았다.
비노는 조심스럽지만 꼼꼼하게 도면을 그리고, 창고에서 나무 조각을 꺼내 왔다.
슥삭슥삭-
비노의 대패질 소리만이 조용한 공방 안에 울렸다.
"이 정도로 하면 덩치 큰 아빠곰이 앉아도 끄떡없을 거야. 공연 막바지에는 꽤 신나는 음악들이 나올테니 버미 같은 꼬마 녀석들이 의자 위에서 춤을 출지도 모르니까, 너무 높지는 않게 만들게."
"우와- 비노, 너 이럴 땐 진짜 천재 같아. 어릴 때도 조용히 목공만 하더니."
비노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인다. "헤헤, 고마워.."
공방의 나무들이 붉은 노을로 물들었다.
"자, 이 정도면 시안은 대략 완성인 것 같아. 어때?"
"비노, 너무 멋진 의자야. 고마워. 덕분에 축제 준비에 도움이 많이 됐어."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다. 레아,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
"응, 나도. 이렇게 같이 일하게 돼서 좋았어."
레아는 긴 그림자를 늘어트리며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에 레아는 오늘따라 유독 공기가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혹시...?
아니야, 그냥 오늘 날씨가 좋아서, 멋진 의자가 잘 만들어져서,
그리고 비노는 언제나 착한 친구니까-라고 생각했다.
레아가 집에 돌아왔을 때, 삼색 할머니는 오늘도 온천의 돌을 반짝반짝 빛이 나도록 닦고 있었다.
온천 물은 해질녘 노을이 비쳐 분홍빛으로 너울거린다.
"할머니, 나 왔어요."
"그래, 오늘도 많이 바빴지?"
"....응, 늘 그렇지 뭐."
"그래. 얼른 밥 먹자."
식탁에 앉은 레아가 대뜸 말한다.
"할머니 있잖아, 어릴 때부터 그냥 친구로 보였던 애가... 갑자기 다르게 보일 수도 있어?"
뭔가를 짐작한 할머니가 눈을 반짝이며 레아 앞에 앉는다.
"후후, 물론이지. 내가 너희 할아버지를 처음 만난 게, 지금 레아 너보다도 한참 어릴 때였으니까."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그렇게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어요?"
"물론이다마다. 그때도 이 숲속마을에서 매일같이 어울려 놀던 친구였지. 같이 물장구 치고, 술래잡기 하고...그렇게 지내다 어느 순간 갑자기, 그 녀석이 든든해 보이더구나. 호호."
"우와, 할머니가 먼저 할아버지 좋아한거야?"
"누가 먼저랄 게 있나, 그냥 늘 보다 보니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서로 마음이 통한 거지. 그나저나 너, 갑자기 이런 얘기 하는 거 보니 마음에 둔 아이라도 있구나?"
레아는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어우 아니야 할머니! 그런 거 아니야~"
"으이그, 녀석. 귀신은 속여도 할미는 못 속여. 얼른 밥이나 먹어."
그 순간 비노도 스미스 씨와 함께 공방을 정리하고 퇴근 채비를 하고 있었다.
"비노, 저녁에 별 일 없으면 우리 집 와서 같이 저녁 먹을래?"
"에...저는 좋지만, 사모님도 계신데 괜찮을까요?"
"사모님이 너 준다고 산딸기랑 나무껍질 구이를 산더미만큼 해 놨어. 얼른 와."
연식이 느껴지지만 단단한 나무로 쌓아올린 스미스 씨의 집에선 구수한 나무껍질 구이 냄새가 풍겼다.
비노가 식탁에 앉자 스미스의 아내가 갓 구운 나무껍질 구이를 잔뜩 쌓은 접시를 내려놓았다.
비노가 식사를 하다 말고 스미스에게 물었다.
"저... 스미스 아저씨,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뭔데?"
"그, 아저씨랑 사모님은 어떻게 만나신 거에요?"
"하핫, 그건 갑자기 왜?"
"아니..그냥 궁금해서요. 헤헤."
그때 스미스의 아내가 말했다. "우린 어릴 때부터 숲속마을 산을 뛰어다니며 놀던 친구였어요. 물장구도 치고, 가끔은 풀밭에 누워서 구름 모양을 구경하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서로에게 가장 특별한 존재가 됐던 거지."
스미스가 비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너, 좋아하는 여자 생겼구나?"
비노는 귀 끝까지 얼굴이 새빨개지며 손을 마구 내젓는다. "아니에요! 그런 거 없어요, 정말로."
스미스가 비노의 등을 살짝 치며 말했다. "으휴, 이 녀석! 다 티 난다, 티 나!"
비노가 결국 조금 머뭇거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성격도 소심하고, 잘하는 건 목공밖에 없어서.. 제 마음을 전해도 될지 모르겠어요. 소중한 친구를 잃고 싶지 않기도 하고..."
스미스는 포크를 잠시 내려놓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노야, 내가 지금까지 목공을 하면서 배운 게 있는데 말야. 목공도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것보다 나사 한 개, 톱질 한 번에 정성이 들어간 게 훨씬 가치있다는 거야. 내가 보기에 너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마음이 단단한 녀석이야. 그리고 누군가는 너의 그 가치를 알아봐 줄 거야."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환한 달빛을 받으며 걸어가는 비노의 마음속엔 스미스의 말이 남아 반짝반짝 빛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