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로 몰리지 않기
프리랜서 생활을 하면서 가장 좋은 점은, 불필요한 친목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회사에 다닐 때처럼 싫어도 좋은 척 해야하는 인간관계의 피곤함을 겪을 필요가 없다. 출퇴근을 할 필요도 없고, 내 업무 외의 잡일을 할 필요도 없다.
물론 회사생활에 따르는 그 모든 피곤함과 번거로움과 시간 제약은 안정적인 '월급'과 복지로 보상을 받는다. 따박따박 고정적으로 들어오는 월급의 안정성이 주는 가치는 생각보다 크다. 미래를 계획할 수 있게 해주고, 사회적인 신분도 어느 정도 보장해준다. 직장생활을 통해 얻는 배움도 적지 않다.
확실히 회사 다닐 때보다 프리랜서 일이 수입은 확연히 줄었다. 아이와 함께 있다보니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못하는 이유도 있고, 그렇게까지 온종일 일에만 매달려 있고 싶지 않기도 하다.
한때는 의욕이 넘쳐서 일도 이중으로 받고, 밤을 며칠씩 새가며 일만 한적도 있었다. 신입 때는 무조건 열심히 해서 어느 단계까지는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덕분에 일이 계속 들어오고 자신감도 붙었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더 나쁜 결과로 돌아왔다. 건강이 악화되고, 일의 퀄리티도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그때는 압박감에 시달렸던 것 같다. 마흔이 넘어 경력을 바꾼 만큼 빨리 증명해내야 한다는 압박감, 좋은 경력을 많이 만들어 두어야 한다는 부담, 나를 보호해줄 울타리(회사)가 없으니 빨리 나의 전문분야를 찾아야 한다는 초조함...
사람이 코너로 몰리면 평정심이 무너진다. 평정심이 무너지면,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게 된다. 그때 그때 풀지 못한 답답함과 화를 쌓고 쌓다가 이상한 포인트에서 폭발해버리고 만다. 엉뚱한 곳에서 원인을 찾으려 하지만, 사실 진짜 원인은 나의 '내면'에 있다.
이 '무너진 평정심'의 최대 피해자(?)는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다. 특히 아이에게 미안한 적은 너무나 많다. 밤새 일해서 피곤해 죽겠는데 아침에 아이가 꾸물거리면 화가 난다. 아이니까 재빠르지 못한게 당연한건데, 나의 무너진 평정심에 아무 죄도 없는 아이에게 빨리 빨리 하라고 재촉한다.
어느 순간 주객이 전도된 느낌을 많이 받았다. 일을 위해 가정을 희생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가정을 위해 일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다. 완벽한 밸런스를 맞추기는 힘들지만, 그럭저럭 일과 가정의 비중이 왔다갔다,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유연하게 살고 싶었다.
작년 한해는 일에 비중을 많이 둔 채로 살았으니, 앞으로 한 몇 개월은 가정에 비중을 많이 둔 채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너무 압박감에 시달리며 살고 싶지 않다.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나를 증명하려고'만' 하는 방향으로 노력하고 싶지는 않다. 노력은 계속 할테지만, 좀더 나의 결에 맞고 마음이 끌리는 쪽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
평정심이 무너지면 불안해진다. 불안해지면 자꾸 이상한 선택을 하게 된다. 내 주관이 흔들리는 것이다. 남들이 하라는 것,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 겉보기에 좋은 것들에 자꾸 현혹된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하루 하루를 충실히 산다. 매일 매일 운동도 열심히 하고, 밥도 건강하게 잘 챙겨먹는다. 불안감에 휩싸이거나 압박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좋은 책을 읽고 틈틈이 산책도 한다. 나 혼자만의 시간도 충실히 갖는다. 핸드폰을 보는 시간을 줄이려고 노력한다. 의미없는 일에 나의 한정된 에너지를 사용해서 피곤해지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인다.
의미없는 모임보다는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서울에 살 때는 시간도 자유롭고 마음이 맞는다고 생각하여 자주 보던 지인들과의 만남도 어느 순간 공허해졌다. 왕복 4시간 거리에 사는 내게, 너무나 쉽게 한번 보자고(너가 이쪽으로 오라고) 하는걸 보면, 아 나도 서울 살 땐 저랬었나 싶다. 먼 거리를 오가는 수고로움과 기회비용을 모를 수 밖에. 하긴 나도 몰랐으니까.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한 나의 작은 노력들이다. 하루 하루의 일상이 내겐 너무나 소중하다. 길고 긴 시간을 돌고 돌아 겨우 찾은, 나의 소중한 일상을 오래 오래 평온하게 유지하고 싶다. 한정된 에너지와 시간을 소중한 일, 소중한 사람에게만 밀도 있게 쓰고싶다.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며 살아왔다. 쓸데없는 정보에, 인간관계에, 겉모습에, 남들 시선에.
계속 정리하고 가지치기를 하며 살다보면, 마지막에는 중요한 몇 가지만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휩쓸리지 않고, 묵묵히 하루 하루를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나가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소박하고 정겹게, 심플하게 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