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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YUC Jan 20. 2023

일이 힘들면 서로 비난하거나 아니면 단단해진다.

파면, 해임당한 나는 왜 '멋진'교수인가?

2007년에 행정법원에서 ‘의원면직소청심사결정취소’ 재판할 때 나는 친구와 후배들과 함께 사단법인을 만들어 활동했다. 500만 원씩 각출하여 법인을 만들고, 양재동에 사무실을 얻었다. 500만 원이 월급쟁이들에게 적은 돈은 아니었다.

    

특수교육으로 밥을 먹고살면서 무엇인가 보람된 일을 하자는 취지에 공감한 이들은 흔쾌히 500만 원씩 각출하였다. 일주일 만에 5천만 원이 넘게 모였다. 당시 교사였던 후배들은 지금은 대구대학교, 전남대학교, 공주대학교, 우석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법인을 유지하기 위해서 모두 엄청나게 노력했다. 할 수 있는 한 외주를 받았다. 직원을 두 명 고용했다. 직원 두 명과 사무실 유지비로 한 달에 500여만 원은 나갔다. 내가 상임이사를 맡았다.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수주에 능한 K가 지방자치단체의 장애 관련 프로젝트를 받아왔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프로젝트에 매달렸다. 간신히 급여와 월세, 그리고 수주에 참여한 인력 몇의 인건비가 충당되었다. 해임으로 수입이 없는 나에게도 약간의 숨통이 트였다.

      

1심에서 이긴 나는 2심에서는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았다. 1심에서 내가 선임한 변호사와 상대 변호사가 쓴 서면을 꼼꼼하게 읽었기에, 서면 쓰는 법에 대하여 자신이 생겼다. 알고 보니 재판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글로 하는 것이었다. 영화에서의 검사나 변호사의 멋진 변론은 현실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서면 쓰는 것과 논문 쓰는 것은 다르지 않았다. 전개하는 양식이 약간 다를 뿐이었다.

      

나 홀로 소송에 대한 지식을 익혔다. 2심은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렸다.


나는 여유가 있었다. 단순히 내가 1심에서 이겨서만은 아니었다.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갈 곳이 없는 나는 매일 양재동 사무실로 출근하였다. 프로젝트를 하면서 재판에 필요한 일들을 하였다. 내가 서면을 작성하면 직장에서 퇴근하고 온 친구들이 읽고 코멘트해 주었다. 나는 수정하고, 또 수정하였다. 15장의 완성된 서면이 나오기까지 대략 100여 장이 넘는 종이가 소비되었다.




내가 보기에 가장 서면을 잘 쓴 변호사는 학교가 새로 선임한 2심 변호사였다. 그는 서울대학교 법학과와 서울대학원 법학과를 졸업했다. 법원에서 나를 만났을 때는 자신을 서울대학원 동창회 간부라고 소개했다. 검색을 해 보니 나와 같은 시기에 대학을 졸업했다. 내 또래였다. 그는 미국의 변호사 자격도 취득하였다.


법정에서 만났을 때, 그의 말투는 어리바리해 보였다. 목소리가 또렷하지 않았다. 우물우물했다. 말투만 보면 그가 서울대 출신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글은 날카로웠고, 논리적이었고, 냉정했다. 상대인 나의 감정을 불편하게 자극했다. 나는 그가 작성한 서면을 읽으면서 분노하였다. 당장에라도 달려가 그의 머리통을 몽둥이로 내리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일류 변호사였다.  

    

하지만 그는 2심에서 나를 이기지 못하였다. 법률적으로 어차피 내가 유리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내게는 지극정성으로 나를 도와준 이 선생과 전 선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선생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고, 전 선생은 특수교육과를 졸업했다. 두 사람은 싹싹했고, 정직했고, 일머리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밝았다. 우리는 서로 농담도 잘했다. 이 선생은 서면 제출을 위해 나와 함께 법원에 자주 들락거렸다. 이 선생과 전 선생은 내가 일상을 잃었을 때, 내 일상이 되어준 친구였다.

     

우리는 도시락을 싸와서 양재천에서 함께 점심을 하기도 하였다. 가끔 자장면을 양재천으로 시키기도 하였다. 나는 항상 그들의 도시락을 뺏어 먹었다. 내 별명은 음식을 흡입하듯 먹는다고 해서 '진공청소기', 혹은 남김없이 싹싹 먹는다고 해서 '밥상 위의 하이에나'였다. 힘들었던 날은 지하에 있는 7080 주점에서 맥주를 시키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일이 힘들면 서로 비난하거나 아니면, 더욱 단단해진다. 나는 재판으로, 그 둘은 법인 유지로 힘들었다. 각자 힘들었던 우리는 서로 단단해지는 것을 택했다.

    

이 선생과 전 선생은 지방자치단체 용역, 현직 특수교사 해외 연수 사업, 장애 학생 1박 2일 프로그램, 장애인 고용 관련 업무 등등을 해냈다. 그 둘의 노력 덕분에 그때 만들었던 법인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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