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YUC Jan 14. 2023

잘 못 아낀 돈은 '아낀 것'이 아니다.

파면, 해임당한 나는 왜 '멋진' 교수인가?

내 전공은 특수교육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곧장 특수학교에서 4년을 근무하였다. 8번의 방학을 맞았다. 그런데 방학 초기에 계획했던 것은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개학을 맞았다. 나는 나 자신이 한심해 보였다. 무엇인가 도전이 필요했다. 그때 선배가 조교를 하면서 대학원에 다니지 않겠냐고 권유했다. 나는 십 분도 망설이지 않고 마음속으로 결정했다. 학교를 그해 2월 28일 자로 그만두었다. 3월 2일 자로 조교 생활을 시작했다. 사직서를 미리내서 날짜를 맞출 수 있었다.      


선배가 이왕이면 유학을 가라고 했다. 일본에 선배가 교수로 있다고 했다. 나도 아는 선배였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일본어를 몇 달 공부했다. 그러던 중 교수님이 찾으셨다. 2학기에 대학원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으셨다. 일본에 유학을 가려고 어학 준비를 한다고 말씀드렸다. 교수님은 특수교육은 미국에서 공부해야 한다고 하셨다. 미국으로 가라고 하셨다. 미국 대학에 있는 선배에게 편지를 해두겠다고 하셨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이런 과정 때문에 나는 교사를 그만둔 후 곧바로 대학원에 진학하지 못하였다. 당시 조교는 나를 포함해서 세 명이었다. 나는 교사 경력 때문에 실습실 조교를 맡았고, 두 명의 조교는 학과 행정조교를 맡았다. 실습실은 별로 일이 없었다.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부할 수 있었던 더욱 중요한 이유는, 두 명의 후배 조교들이 눈치를 주지 않고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나를 응원해 주는 평생의 은인이다.  

     

실습실에서는 하루 종일 AFKN을 틀어놓았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O. J. 심슨이라는 미국의 유명 미식축구 선수의 살인사건에 대한 뉴스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듣고 또 들으니 내용은 모르고, 대충 영상으로 사건의 느낌은 알 수 있었다. 토플 공부는 당시 대학을 돌면서 파는 불법 어학 카세트테이프로 하였다. 어학원에는 다니지 않았다. 가장으로서 경제적으로 가정에 도움도 주지 않으면서 돈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불찰이었다. 근시안적인 생각이었다. 투자가 적절해야 결과도 확실할 수 있다. 지금 돌이키면 가정에 약간의 경제적 어려움이 따른다고 하더라도, 그때 돈을 쓰고 실력향상을 위해서 어학원에 다니면서 공부했어야 했다. 돈보다 실력 향상이 훨씬 중요한 때에 돈 몇 푼 아끼겠다는 생각에 본질을 놓친 것이다. 돈은 아낄 때 아끼고 쓸 때 써야 한다는 것을 이때 경험으로 뼈저리게 느꼈다. 돈 사용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은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잘못 아낀 돈은 '아낀 것'이 아니었다.


혼자 공부하니 방법도 잘 모르고 무엇보다도 정보를 몰라서 헤맸다. 하지만 토플 시험은 쳤다. 당시엔 토플 점수 550점을 넘겨야 미국 대학원 지원이 가능했다. 첫 시험은 400점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 토플 시험장에 갔을 때는 토플 시험에 응모한 사람이 너무나 많아서 놀랐다. 리스닝에 좋은 시험 장소가 따로 있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토플에 나오는 문법 시험도 나름의 규칙이 있다는 것을 후에 알았다. 그 정보를 알고 교재를 구하여 영어의 구조를 좀 더 익히니, 문법 부분에서는 순식간에 성적이 올랐다. 문제는 리스닝이었다. 도무지 늘지를 않았다.

 

한 번은 긴장을 풀고자 음악을 들으면서 시험장에 갔다. 가수는 마로니에, 곡명은 칵테일 사랑이었다.

     

마음 울적한 날엔 거리를 걸어보고

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해도 보고

한 편의 시가 있는 전시회장도 가고

밤새도록 그리움에 편질 쓰고파     


경쾌하고 따라 부르기 좋은 노래였다. 문제는 그것 때문이었다. 리스닝 시험시간에 계속해서 노래 가사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토플 시험 결과는 뻔하였다.


반복해서 시험을 치면서 간신히 550점에 도달했다. 영어 공부를 시작한 지 1년 정도 지난 후, 교사를 그만두고 조교를 한 지 1년 반 정도 지난 후였다.     


유학원을 거치지 않고 직접 미국 대학에 편지를 썼다. 모르면 겁이 없거나 배짱이 커진다. 콩글리시로 장학금도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여러 대학 가운데 세 군데에서 답이 왔다. 한 군데에서는 장학금도 가능할 수 있다고 했다.

    

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은행잔고 증명서를 준비해야 했다. 돈이 없어서 선배들에게 꾸었다. 잔고 증명서를 떼는데 옆에서 어떤 사람이 깐족거리면서 어느 대학에 가고자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가 대학 교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일 대학이라고 뻥을 쳤다. 상대는 더 깐족거리지 않았다.


미국 비자를 받기 위해 대사관에 갔다. 사람이 엄청 많았다. 화가 났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힘이 없는지 그때 처음으로 실감했다. 간신히 인터뷰 날짜를 잡았다. 영사는 내게 교사를 하다가 그만두고 미국에서 공부하고자 하는 이유를 물었다. 미국이 선진국이고 교수님이 추천해 주었다는 식으로 엉터리 영어를 했다. 가족은 왜 함께 가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돈이 없어서 같이 가기 어렵다고 했다.


여권 뒤에 빨간 스탬프가 찍혔다. 리젝트였다. 비자는 물 건너갔다. 유학도 덩달아 물 건너갔다. 나는 교사를 그만두고 거의 2년 동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토플 점수 550점을 얻었을 뿐이었다.

    

미국 비자를 받는 것에 대한 문제가 심각하다는 뉴스가 나왔다. 공교롭게도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 중에 내가 화면에 나왔다.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초라한 군중들 속의 나를, 나는 알아보았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편한 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