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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동협 Jul 10. 2021

미국 평민을 홀린 영드 '다운튼 애비'

미국 신흥 귀족과 비교되는 영국 신사

한국 사람들이 미드에 열광하고 있는 현시점에, 미국에서는 때아닌 영국 드라마 열풍(이하 영드)이 불고 있다. 많은 미국인이 일요일 저녁 텔레비전 앞에 붙어 앉아 100여 년 전 영국의 한 상류층 집안의 흥망성쇠에 일희일비하고 있다.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요크셔 지방의 크롤리 백작 (극에서 로드 그랜썸이라고 불린다)의 집안에 딸만 셋이 있는데, 딸에게 작위와 재산을 물려줄 수 없어 먼 친척인 매튜 크롤리를 상속자로 데려와서 큰딸과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시키고, 둘째 딸은 늙은 귀족과 결혼하려다가 결혼식장에서 버림받고, 셋째 딸은 집안에서 부리던 운전사와 결혼을 하는 등의 파란만장한 생활을 그리고 있다. 흡사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의 영국 귀족판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결론이 김약국의 딸들만큼 비극적으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파란만장한 세 자매 ©PBS


미국의 공중파 네트워크 텔레비전 채널에서 외국에서 제작한 작품을 그대로 수입해서 방영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대체로 영국이나 유럽의 쇼를 수입해서 미국의 배우를 캐스팅해서 다시 만들어 방송한다. 네덜란드에서 빅브라더를 수입해서 미국식으로 다시 만든 것이 좋은 예이다.


자막 읽기를 싫어하는 문화 탓인지, 아니면 외국 문화의 생소함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대체로 배경이나 캐릭터를 번안해서 방송한다. 자막의 문제가 전혀 없는 영드 ‘오피스’ 조차도 미국의 펜실베니아주의 스크래튼으로 배경을 바꾸어 미드 ‘오피스’로 만든 것처럼 말이다. 사실 영드 오피스에 비해 재미가 떨어지는 미드 오피스를 보다 보면 왜 이걸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지만, 하여간 미국 사람들은 그렇게 리메이크하는 걸 좋아한다.


이런 경향과 달리, 리메이크 없이 수입한 그대로 당당하게 외국 프로그램, 특히 영국 프로그램들을 수입해서 별다른 편집 없이 보여주는 채널이 있었으니 바로 공영방송 채널인 PBS이다. 가끔 PBS를 보면 이게 미국 채널인지 아니면 영국 채널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영국에서 제작한 제인 오스틴, 토마스 하디, 찰스 디킨스의 작품을 기반으로 한 드라마는 말할 것도 없고 BBC의 셜록(Sherlock), 닥터 후(Doctor Who)를 비롯해 닥 마틴(Doc Martin) 같은 민영 ITV의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주말 PBS의 편성은 영국 방송이 없으면 불가능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그동안 PBS에서 영국 프로그램의 방영이 꾸준히 이루어졌던 것에 비해 시청률 자체는 그다지 높지 않은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저 PBS 방송의 주요 시청자들인 지식인이나 중상류층 노인들의 채널로 인식되었을 뿐이었다. 영드에 대한 미국 시청자가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를 반영하면서 1998년에 BBC America 채널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주류문화로 진입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차에 폭발적 인기를 누린 영드가 최근에 두 개나 등장했다. 하나는 한국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베네딕트 컴버베치가 주연한 셜록(Sherlock)이고, 다른 하나는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다운튼 애비(Downton Abbey)이다. 시즌 2 피날레는 무려 오백사십만 명의 시청자들이 보았다고 한다. 도대체 영국 귀족판 김약국의 딸들이 뭐라고 그렇게 많은 미국 시청자가 TV 앞에 모여 앉아있었던 걸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시청률과는 만리장성을 쌓아왔던 PBS가 이런 관심을 받게 된 일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기존의 시청자들만으로 이 시청률은 불가능한 것이었고, 이는 새로운 시청자가 유입됨으로써 가능한 수치였다. 여러 미국 뉴스 미디어의 분석에 따르면, 평소 PBS를 보지 않던 2~30대가 다운튼 애비를 보려고 평소에 채널을 잘 돌리지 않던 PBS로 몰려왔다.


일요일 저녁이 되면, 친구들과 함께 모여 드라마를 보기 위한 파티가 여기저기에서 열렸다. 월드컵 국가대표 축구 경기를 치킨과 맥주를 사다 놓고 친구와 모여 시청하듯이, 미국인들이 치즈와 와인을 앞에 두고 다운튼 애비의 희로애락에 몸과 마음을 던진 것이다.


한 신문 기사에 따르면 시애틀에서는 4~50대의 여성 팬들이 다운튼 애비의 캐릭터들의 스타일로 옷을 입고, 다시 말해 코스프레 비스름한 것을 하며 시즌 2를 단체 관람하기도 했다. 컬트 팬이 생겨났고, 에미상을 받는 등 대중적 인기도는 하늘 높이 치솟고 있다. 오죽하면 CBS 시트콤 빅뱅 이론(Big Bang Theory)의 쉘든 쿠퍼 박사마저 대사로 언급했겠는가! 영국에서는 이미 시즌 3가 끝났지만, 현재 미국에서는 시즌 3가 절찬리에 방영되고 있다.



김약국의 딸들과 엇비슷한 것 외에, 다운튼 애비는 과연 어떤 드라마일까? 이 드라마는 20세기 초반 영국의 요크셔 지방 귀족 집안을 배경으로 다룬 시대극이다. 미국 평민들이 텔레비전 앞에 모여서 때아닌 영국 귀족과 그 하인들의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100여 년 전 미국도 아닌 영국 지방의 머나먼 드라마가 무슨 매력이 있었을까. 고급 호텔을 연상하게 하는 웅장한 저택, 하루에도 몇 번이나 갈아입는 화려한 옷, 아침에 종만 흔들면 하인들이 방으로 가져다주는 아침, 이런 라이프 스타일에 미국 시청자들이 압도되어버린 걸까. 그것도 아니면 주인을 시중들며 고단한 하루를 보내는 하인들의 삶에 동화되어버린 걸까.


사실 불황기에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낭만적 작품이 많이 나오는 편이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면하기보다는 탈출해서 꿈이나 환상 속으로 숨고 싶은 욕망이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다.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 더불어 미국이 굉장한 불황기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런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드라마가 유행하는 일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미국 대공황기에 쇼비즈니스는 절망스러운 현실을 벗어나 꿈을 꾸게 했다. 2008년 불어닥친 경제 위기에서 아직도 회복하지 못한 미국인이 영국 과거로 도망가서 몇 시간 정도 노는 게 무슨 문제가 되겠나.


과거라고 해서 그냥 과거가 아니다. 다운튼 애비가 보여준 과거는 귀족과 하인이 조화를 이루는 삶이다. 다운튼 애비의 주인은 로버트 크롤리 백작인데 인자하기가 그지없다. 눈이 아픈 하인의 병도 고쳐주고, 법적 문제가 있는 하인에겐 변호사도 대주고, 다리를 저는 하인도 차별 없이 다 받아준다. 하인이 주인과 친구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자기 집에 들인 충성스러운 하인을 끝까지 책임져주는 인자한 주인님이다. 하인들에게 이보다 더 나은 고용주가 과연 있을까? 결코 다운튼 애비보다 낫다고 할 수 없는 작업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지 않나.


영국보다 계급사회 전통이 약한 미국에서 이 드라마가 부각을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지지를 받는 주장은 미국이 신계급 사회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가설이다. 빈부 격차가 점차 커지면서 상위 1%가 누리는 삶은 귀족적이라고 불릴 만큼 높아만 간다.


2008년 이후 중간층은 몰락하고 하위층은 늘어나면서 계급 갈등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월스트리트의 비도덕적인 현실만 보더라도 미국 상위 1% 중에서 크롤리 백작처럼 인자한 사람을 찾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만큼 어렵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불경기에 직장이 있는 게 어디냐며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참을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 다운트 애비의 고용주와 피고용주의 관계는 이상향과 다름이 없다. 인간적으로 대우해주며 복지까지 책임지는 의식 있는 귀족이었다. 현실에는 없지만 어디엔가 있을 법한 다운트 애비의 삶은 안식을 가져다주었을지 모를 일이다.


2012년에 있었던 미국 대통령 선거는 이러한 계급갈등이 낱낱이 드러났다. 월스트리트 금융가와 상류층을 대변하는 공화당 대선후보 미트 롬니는 현대판 귀족의 상징이 되었다. 부의 축적을 위해서라면 정리해고를 마다하지 않는 몰인정한 짓을 저지르는 상류층이 계급갈등을 더욱 부추겼다. 저소득층을 위한 의료보험제도와 각종 사회보장제도를 보호하려는 버락 오바마는 중간층 이하의 계급을 그나마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대선 이후에 이어진 상류층 증세와 조세 공평성 논쟁만 보더라도 오바마가 어디에 자리 잡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자신을 위해 돈을 물 쓰듯 쓰면서, 노조를 탄압하고, 사회보장제도를 공격하는 상류층의 이중성에 대한 심판이 대선 과정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도 이들의 분노와 사회정의에 대한 갈구의 목소리로 이해할 수 있다.


다운튼 애비가 보여준 삶이 비록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품위를 지킬 수 있는 사회상이었다. 다운튼 애비도 세계대전, 스페인 독감, 여권신장운동, 기술의 발전 등에 따라서 서서히 변하고 있다. 2013년의 미국 패권주의도 예전만 같지 못하고, 중국이라는 신흥 패권국을 견제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지구 온난화와 테러의 시대를 맞아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 모르는 시대가 되었다.


오바마 집권 2기가 빈부격차를 해소하고 사회갈등을 완화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점점 높아만 가는 사회불안과 하루가 멀다고 발생하는 총기사고도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다. 폭발할 것 같은 계급 갈등이 없는 다운튼애비의 시대의 부재를 그리워할 여유가 더는 없다. 밖으로 다른 나라와 싸워야 하고, 안으로 계급 갈등이 높아지고 있는 미국인들에게 잠시나마 평화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이 드라마, 묘하게 중독된다.


ㅍㅍㅅㅅ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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