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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호성 Feb 20. 2023

<결혼의 종말>

한중섭

  미국의 저명한 동기부여 작가인 사이먼 시넥의 ‘골든 서클’을 인상 깊게 본 적이 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지만 ‘골든 서클’에 의하면 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를 먼저 생각하라고 강조한다. 쉽게 말해 무엇을 - 어떻게-왜가 아니라 왜-어떻게-무엇을 순으로 문제에 접근하라는 말이다.


 나는 한중섭의 <결혼의 종말>을 읽고 결혼이라는 인생일대의 이벤트에 대해 많은 이들이 ‘왜’가 아니라 ‘어떻게’ 결혼을 해야 하는지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의 말 대로 사회적 압박에 억눌려 결혼이라는 장기 레이스에 무작정 진입하는 것이다. 기대수명이 길게는 100세까지 늘어난 지금, 30세에 결혼한 젊은 부부들이라면 무려 70년이라는 세월을 결혼생활을 유지하며 살아야 한다. 그 70년 이라는 시간 동안 대부분의 부부들은 잦은 다툼과, 불륜, 이혼(졸혼, 황혼이혼 포함)을 경험한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소위 말하는 ‘낭만 인플레이션' (우리 부부는 예외일 것이라고 사랑의 힘을 과신하는 착각)에 취해 70년이라는 세월을 낙천적으로만 바라보며 평생을 행복하게 잘 살 것이라는 희망을 가슴에 품고 서로에게 법적인 구속을 가하는 것. 그것이 결혼에 대한 우리 시대의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쓰며 결혼을 도대체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보고자 한다. 과거 인류에게 결혼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었다. 7만여년 전 인류가 원시 채집하던 시절에는 군혼제 방식을 통해 최대한 많은 건강한 자손들을 부족 단위에서 공동으로 번식시키고 부족의 크기를 키워야 했기 때문에 군혼제 방식이 꼭 필요했다. 1만 2천여년 전 농업혁명의 태동 이후에는 재물을 축적하기 시작한 세력들 사이에 대우혼이라는 개념이 생기며 세력 간의 동맹 혹은 협력을 위한 비즈니스적인 결혼이 성행했다. 정리하면 인류의 고대 사회에서 결혼은 생존을 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수단이었으며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일부일처제 방식의 사랑을 전제로 한 결혼과는 거리가 멀었다.


 17세기에 접어들며 비로소 남녀 간의 사랑을 기반으로 한 연애라는 개념이 탄생한다. 낭만을 뜻하는 로맨스가 'Roma+ance', 즉, ‘로마스러운’이라는 어원을 가졌다는 것이 놀랍다. 십자군 전쟁에 동원된 남편들과 장기간 떨어져 지낸 유럽의 부인들은 정조대를 차고 외로운 나날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부인들의 외로움을 로마어로 쓰인 아름다운 시로 채워주던 음유시인 ‘트루바두르’가 유럽의 귀부인들 사이에서 유행했고 바로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로맨스'의 시초다. 11-12세기 유럽에서 트루바두르는 주로 남성의 기사도 정신과 남녀 간의 애절하고 아름다운 관계에 대한 시를 썼다고 하니 이때부터 여성들은 아마 모든 것이 완벽한 ‘백마 탄 왕자’님에 대한 ‘로망’을 가지게 된 게 아닐까 싶다.


17세기 로맨스의 태동 이후에는 유럽을 기반으로 한 많은 작가들이 로맨스를 주제로 한 많은 문학 작품들을 선보였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오만과 편견, 제인 에어 등 서구권의 로맨스 작품들은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이 기발하고 새로운 트렌드에 집착했다. 당시 여성들은 집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로맨스 소설은 여성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남녀관계, 더 나아가 결혼생활에 대한 당시 현실과는 동떨어진 일종의 ‘환상’을 심어주기 시작했다. 이 시기 이전까지 그리고 18세기 까지도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였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는 여성을 ‘Angel in the House,’ 즉 ‘집안일을 하는 천사’로 공공연히 칭하며 여성의 외부적 활동을 엄격히 금하고 가정에 충실할 것을 암묵적으로 명령했다. 역사학자들은 17세기-18세기 로맨스 소설이 바로 지금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근간을 설정한 근원이라고 설명한다.  17-18세기 로맨스가 탄생했지만 이 시기까지도 결혼은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언급했다시피 사회적 구조 때문에 여성들은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일 수밖에 없었고 남성의 경제력에 의존하여 살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여성들에게는 경제력이 뛰어난 가문 출신의 남성과 결혼하는 것이 꼭 필요했으며 경제력이 뛰어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먹고살기 위해서 결혼이라는 것을 필요로 했다. 운이 좋다면 책에서 읽었던 멋진 매너를 가진 부유한 남성과 결혼할지도 모르고 말이다.


 여기까지, 7만 년 전 ~ 1800년도까지 결혼은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제도였다. 다른 말로, 결혼하지 않으면 말 그대로 굶어 죽거나, 경쟁 세력에 의해 침탈당하거나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결혼은 인류가 생존하는 것과는 무관한 개념으로서 변질된다. 영국의 산업혁명에 의해 물자의 대량생산이 시작되었고 증기기관의 탄생과 의학의 발전으로 유럽 기준 많은 사람들이 보다 더 부유해지고 보다 더 오래 살게 되었다. ‘중산층’이 태동하게 되면서 안정적인 일자리가 확보되었고 결혼을 꼭 전제로 하지 않는 남녀 간의 ‘데이트’가 탄생했다.


 20세기 자본주의의 힘이 강해지면서 비로소 우리가 알고 있는 데이트와 연애결혼의 개념이 정립되었다. 남녀가 만나 눈이 맞고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여러 활동들을 통해 데이트를 즐기다가 서로 사랑한다는 명목 하에 평생을 함께 할 것을 만천하에 선언하는 것. 새로운 개념의 ‘결혼’이 탄생한 것은 바로 이 20세기부터이다. 이 새로운 개념의 '결혼'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결혼'이다. 약 120년간 견고하게 유지되었던 이 ‘결혼’에 대한 개념은 21세기에 접어든 지금 여러 가지 사회적, 경제적, 기술적인 요인에 의해 또다시 크게 흔들리고 있다.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결혼에 대한 사람들의 접근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언급한 대로 결혼은 이제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 과거처럼 결혼하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했던 시절은 지난 지 오래다. 21세기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주의가 정점을 찍고 있다. 소위 말하는 전 세계의 MZ세대들은 '나'의 행복이 타인의 행복보다 우선시 된다. 타인의 범주에는 애인이나 결혼상대도 포함되기 때문에 이들은 타인을 통해 고통받을 바에는 취미활동이나 자신만의 가치를 실현하며 홀로 사는 쪽을 더 가치 있게 평가한다. 또한 뛰어난 정보 습득력을 통해 이미 연애나 결혼에 대한 잠재적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으며 이 모든 문제를 함께 겪을만한 사람, 다시 말해 그럴 가치가 충분히 있는 사람, 이 아니고서야 내 시간과 자원을 들여 함께 고통받아야 할 이유를 체감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 부모님 세대까지(1980년도), 그리고 현재까지도(2020년도) 결혼제도가 주류로서 인정받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 이유가 바로 이들이 결혼이라는 개념이 바뀌고 있는 시대의 흐름 사이에 낀 세대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들의 부모도 결혼을 했고 자신들도 결혼을 했으니 사회적인 압박과 사회에서 주류로 혹은 (안정적으로) 인정받고 살기 위해 결혼은 꼭 해야 하는 것이라고 이들은 주장한다. 다시 말해 사회적으로 자리 잡고 살기 위해 필요한 일종의 사회적 장치로서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사회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삶의 과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급변하는 사회 흐름 속에서 이와 같은 생각은 점차 비주류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나는 결혼의 패러다임은 이미 바뀌었고 앞으로 결혼이라는 제도가 종말 할 것이라는 저자의 의견에 대부분 동의한다. 나에게 있어서 역시 때가 되면 학교에 가고 때가 되면 취업을 하는 것처럼 나에게 결혼은 그저 때가 되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학교에 가거나 취업을 하는 것과는 달리 결혼은 선택권이 있다. 내가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 먹고살기 위해서 일은 반드시 해야 하지만 말이다. 결혼하지 않아도 먹고사는데 큰 지장은 없다, 조금 외로울 순 있겠지만. 같은 맥락에서 자식을 낳거나 가정을 꾸리는 것 역시 있으면 나에게 큰 행복을 주겠지만 없어도 사는데 큰 지장은 없다.


 결혼을 하는 것은 반려견을 들이는 일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반려견이 반려인으로 바뀔 뿐이다. 함께 하면 행복하고 좋겠지만 없다고 해서 크게 괴로울 건 없다. 함께하면 든든하고 덜 외롭겠지만 그만큼 갈등이 생길 것이고 혼자라면 일어나지 않을 문제들이 생길 것이다. 이렇게 접근하고 나면 결혼이라는 것은 일종의 사치가 된다.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것. 사치를 부리고자 하는 사람은 결혼하면 될 것이고 사치를 부릴 여력이 없는 사람은 결혼하지 않으면 된다. 우리 모두에게 결혼하지 않을 권리가 있고 사회는 이를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혼하는 것은 이미 비주류가 됐다. 매년 초혼하는 인구수는 감소세에 접어들고 있으며 통계청 통계자료에 따르면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응답한 시민은 2008년 68%에서 2018년 48%로 20%가 급감했다. 2012년 33만 건에 달하던 연간 결혼건수는 2021년 19만 건으로 9년 만에 무려 42% 감소했다. 남녀의 초혼 연령은 날이 갈수록 늦어지고(남자 기준 33세), 1인 가구 수는 21년 기준 33%로 전체 대한민국 인구의 1/3이 혼자서 산다. 다시 말하지만 이제 곧 결혼하는 사람들의 수 보다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의 수가 더 많은 ‘결혼 비주류 현상이’ 명확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처럼, 결혼이 꼭 필요하지 않은 제도로 사람들에게 인식되면서 그리고 결혼이 초래하는 상상하지 못할 불행이나 잠재적 문제점들에 대한 정보를 쉽게 접하게 되면서 (TV에서 조차 이런 내용을 다루는 프로그램이 만연하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지금 ‘결혼’이라는 한때 필수적인 삶의 과정으로 인식했던 개념에 대해 근원적인 물음을 할 수밖에 없다. 최재천 교수는 인류 DNA에 생존과 번식이라는 욕망이 새겨져 있으며 개체의 생존이 번식보다 무조건적으로 우선시 된다고 말한다. 과거 결혼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얘기가 많이 다르다. 양극화되는 자본주의 시장 속에서 99%의 서민들은 1%의 자본가들 아래에서 노동력을 제공하며 비교적 궁핍하게 생활한다. 소득 대비 날이 갈수록 치솟는 물가와 부동산을 포함한 자산의 가격, 얻기 힘든 정규직 일자리, 갈수록 줄어드는 일자리 수, 노동자에 대해 미흡한 법적 보호제도 때문에 많은 대한민국 시민들은 결혼은커녕 연애조차 하지 못한다. 생존은 종의 번식보다 우선시된다. 우리는 교미를 하고 자기 자신을 먹이로 주는 수컷 사마귀가 아니다. 내가 먼저 살아야 연애 혹은 결혼도 있는 것이다.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자기 한 몸 건사하지 못하는 사람이 누군가와 가정을 이루고 그 가정을 행복하게 일꾸어 나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동화 속에나 나오는 환상이다. 자본주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경제력 없이는 결혼할 수 없다. 부부는 머지않은 미래 경제력의 부족으로 발생하는 많은 문제점들을 마주할 것이고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존본능 앞에 얼마나 연약한지 체감하게 될 것이다.


 정리하면 결혼은 사치가 됐기 때문에 이 사치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은 결혼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설사 사치를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지라도 결혼제도가 가져오는 경제적인 문제 이외의 잠재적인 문제들, 예를 들어, 부부관계의 악화, 자녀 교육 방식에 대한 이견, 불륜, 성격차이, 육아 스트레스, 산후 우울증, 고부갈등, 명절 스트레스, 투자에 대한 성향 차이 등.. 에 의해 괴로움에 시달리거나 종국에는 이혼을 고려하는 등 그다지 행복하지 못한 결혼생활을 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정리하면 우리나라 청년들 중 결혼하는 사람들은 가정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만큼의 충분한 경제력을 갖추고 결혼이 초래하는 수없이 많은 문제점들을 감수하고 책임지겠다는 대단한 용기를 가진 사람들일 것이다. 혹은 별다른 생각 없이 ‘낭만 인플레이션’ + ‘사회적 압박’에 의해 혼기가 찼으니 지금 내 옆에 있는 이성과 결혼을 하는 사람들 이거나. 나는 비혼주의도 결혼하자 주의도 아니다. 그러나 관습에 따라 누군가와 결혼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수가 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올바른 길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같이 살고 싶어서 결혼할 생각 역시 없다. 그런 감정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결혼은 겁쟁이도 할 수 있는 유일한 모험이다.' -볼테르-       


 결혼은 일종의 모험이다. 다만 혼자서 모험할 때 보다 어떤 면에서든 더 나은 모험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고서는 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누군가를 책임질 만큼의 경제력을 갖추어야 하고 결혼생활을 통해 발생할 수없이 많은 문제점들과 갈등을 현명하고 지혜롭게 헤쳐나갈 수 있도록 조력하는 상대방을 찾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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