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know 생수로 세수하기?
나는 주 5일 재택근무를 하는 풀재택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집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삶. 집 밖으로 나가봤자 갈 곳이 없는 작은 지역에 살고 있다. 이 작은 미국 동네에 살면서 나는 평일기준 하루 평균 걸음수를 300대로 유지하고 있다.
어제 갑자기 살고 있는 아파트로부터 메일이 하나 왔다.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수도 난방 관련 수리를 한다는 것이다. 그제 사람이 와서 화장실 물이 잘 나오는지 보고 가드만 뭔가 아파트 전체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수리를 하는 동안 물도 히터도 안된다 해서 집에 붙어있는 난 약간 불편함을 감수하기로 했다.
점심은 귀찮으니 물을 쓰지 않는 샌드위치를 해 먹기로 했다. 매일매일 집에서 점심을 해 먹다 보면 어쩔 때는 프로틴 셰이크만 먹고 건너뛰기도 한다. 이번엔 사놓은 트레이더조 식빵이 유통기한의 끝을 향해 달리고 있기 때문에 샌드위치를 먹기로 했다. 마침 코스트코에서 대용량으로 사둔 버섯도 빨리 해치워야 하기 때문에 버섯과 양파를 잔뜩 굽고 샌드위치로 만들었다. 점심메뉴는 보통 해치워야 하는 것들 위주로 조합해 먹게 된다.
빠르게 점심을 먹고 소파에서 멍을 좀 때리다 미팅시간이 되어 컴퓨터 앞에 앉았다. 커피도 내렸다. 역시 홈카페용 에스프레소 머신은 짱이다. 이번 미팅은 팀 전체가 보통 들어오는 미팅인데 오늘은 연말이라 반정도만 들어왔다. 아직 12월 반도 안 지났는데 연말이냐고? 내가 봤을 땐 보태보채 추수감사절부터 연말이라고 퉁 쳐버리는 것 같다.
나도 미팅에서 적당히 들으며 질문하고 내가 할 일도 몰래 끄적끄적했다. 미팅이 끝나고 요즘 달리고 있는 프로젝트 코딩을 한다. 팀에서 쓰는 코드를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연말이 사람들도 없고 변경사항도 적어 달리기 편하다. 요 근래 가장 코딩을 많이 하고 있다. 이전에 평소에는 100에 40 정도만 코딩하는 시간이었다면 요즘은 한 70 정도는 코딩만 한다. 그 외 시간은 실험 문서 쓰고, 실험 분석하고, 결과 문서 쓰고, 발표하고, 슬랙에서 답변하며 보낸다. 점점 좋은 영어를 구사하기보단 틀리더라도 빠르게 쓰는 쪽으로만 늘고 있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지고, 약속한 저녁 6시가 되었다. 남편이 오는 4-5시부턴 슬슬 쉬엄쉬엄한다. 저녁준비도 해야 하고, 점심 먹고 나서 퇴근하기까진 좀 달리는 편이라 5시쯤이면 피곤해진다. 6시가 되었건만 물이 나올 기미가 안 보인다. 이거 어떻게 하지.
일단 오늘 저녁엔 발레학원을 가기 때문에 둘 다 저녁을 대충 먹었다. 나는 프로틴 셰이크, 남편은 칙필레. 아 참고로 발레학원을 가기 위해선 차를 타야 하기 때문에 남편이 나를 학원까지 데려다준다. 애도 아니지만 역시 미국은 라이딩이 필수인 나라다. 나도 운전을 할 수는 있지만 이 시골 동네는 해가 지면 고속도로도 깜깜해서 야맹증이 심한 나는 운전하기가 어렵다.
발레가 끝나고 보니 오늘 밤에도 수도 난방을 못 쓴단다. 내일 아침에 다시 와서 수리를 시작한다고... 더 이상 물이 없는 우리는 집 근처에 있는 월마트에 가서 물을 사 오기로 했다. 마실물도 필요하고, 화장실에서 쓸 물도 필요했다. 3리터 물 3통을 사 왔다.
집에 와서는 대충대충 고양이 세수를 하고, 화장실 변기 물통에 물도 채웠다. 변기 물을 내리는데 그렇게 많은 물이 쓰이는 줄을 몰랐다... 금방 사온 물이 바닥이 났다. 이 닦는 데에도 은근 물이 많이 쓰였다. 물 부족 국가의 삶을 체험해 본 기분이었다.
내일 아침에 수리를 시작하면 금방 끝나겠지... 하는 마음으로 일찍 잠에 들었다.
아침이 되고 아파트 관리인으로부터 메일이 왔다. 2시쯤이면 끝날 것 같다고 말이다. 오 마이갓. 재택 근무자는 오늘 하루를 또 단수와 함께 지내야 한다. 아침에 남편이 다시 월마트에서 사 온 물로 세수를 하고 (이번엔 수도꼭지가 달린(?) 물통으로 사 왔다) 로봇청소기도 물 없이 진공청소만 돌렸다. 남편 아침은 또 물 없이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로 해주고, 나는 먼가 개운하지 않은 컨디션이라 가볍게 먹었다. 혹시 몰라 물을 아끼려다 보니 밥도 라면도 할 수가 없었다 ㅠㅠ
물이 부족해도 커피는 내려야 하는 법. 물을 소비해 커피를 내려 자리에 앉았다. 잠옷바지에 웃옷을 갈아입으면 그게 내 출근복이다. 오늘은 히터가 안 켜지므로 위에 플리스를 입는다. 집에서 일할 때 입는 건 싼 옷들이다. 이번 플리스는 코스트코에서 샀다. 점점 집에 옷들에 먼지만 쌓여간다.
오늘도 아침부터 밀린 답변도 하고, 지난밤 새 돌아간 것도 확인한다. 오늘은 미팅이 없는 날이라 마음 편하게 코딩을 마구마구 한다. 좀 중간중간 일어나야 하는데 말이다. 점심 메뉴를 고민하기 귀찮아 과자로 좀 때우고 나니 또 약속의 오후 두 시가 되었다. 나는 이미 싱크대 수도꼭지를 열어놨다. 물이 나오기만 해 봐라.
두시가 조금 지나고 드디어 사람이 왔다! 수리가 끝나서 밸브를 열어주러 왔단다!! 그간의 불편함보다 드디어 끝났다는 기쁨이 앞서 그 사람한테 짱 고맙다고 했다. 드디어 편하게 씻을 수 있어! 밥을 해 먹을 수 있어!
물이 틀어지고 난방도 켰다. 실내 온도가 71도였다. (섭씨 21도) 밀린 설거지도 헹궈서 식세기에 넣고 돌려버렸다. 샤워도 싹 했다. 아직 일하는 시간이지만 내 컨디션을 개운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드디어 살 것 같다.
개운한 마음으로 남은 일을 후다닥 하다 보니 남편 퇴근 시간이 다 되었다. 또 나도 슬슬 퇴근할 시간이다. 오늘 그래도 점심시간 없이 빠듯하게 일했으니 조금 빨리 쉬어줘야지. 신나는 마음으로 남편이랑 저녁밥을 해 먹는다. 밀린 세탁기도 돌린다.
한국이었으면 수도 공사 얘기도 며칠 전부터 미리미리 하고 이렇게 24시간이나 걸리지는 않았겠지..? 집에서만 있고 또 나갈 곳 없는 나에겐 정말 어려운 24시간이었다... 수도 끊겨서 일 못한다고 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일을 해낸 나 스스로에게 칭찬을 보낸다.
연말이 연휴가 다가온다. 나 조금만 더 힘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