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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인환 Nov 16. 2020

오늘, 멘토와 일일강사

가볍게 고개를 끄떡이고 돌아설 계획이다. 내가 녹아내릴 것 같아서.

 한 달 전, 팀장님이 인턴 과제 주제를 선정해야 한다며 팀원들에게 제안해달라고 했다. 아무도 답장이 없었다. 나는 좋은 주제를 고민해 늦게 답장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사이 다른 팀원들이 몇 가지 주제를 던졌고, 팀장님은 고맙다며 그것 중에 고민해보겠다고 했다. 당황한 나는 조급해져 급히 생각나는 대로 주제를 던졌다.


 그리고 며칠 뒤, 업무 중 인턴과 관련된 메일이 보였다. 그저 전체 공지겠거니 하고 무심코 메일을 지우려다, 내용이 궁금해져서 열어보았다. 인턴들이 한 달간 과제를 하는데, 멘토를 선정해 진행한다고 했다. 멘토가 누굴까. 리스트를 보던 중, 내 이름을 발견했다. 혹시 잘못 본 것인지, 뚫어져라 바라보았지만 내 이름이다. 메일을 내려보니 내일까지 인턴들과 연락해 킥오프 웹 미팅을 진행하라고 적혀 있었다. 한동안 다른 일을 하지 못했다. 내가 멘토라니. 마침 지나가는 팀장님께 미리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지 않냐고 약하게 항변했지만, 주제를 낸 사람 중에 선정한다고 하지 않았냐며 웃고는 가버렸다.




 누구를 가르치거나 챙겨본 적 기억이 없다. 모임에서 분위기가 서먹하다면 그 고요를 즐길 수도 있는 역량을 갖췄다. 친밀감으로 먼저 말을 걸거나 따뜻한 말을 건네는 스스로를 상상할 수가 없다. '나'라는 정체성이 녹아 없어지는 기분이라서. 벌써부터 울렁증이 일지만 그럼에도 이곳은 회사이고, 내게 떨어진 일이기에 퇴근 즈음에 연락처를 저장하고 단체 카독 방을 열었다.


 첫마디로 "안녕하세요. 멘토인데요. 연락처를 체크해야 하니 한분씩 '네'라고만 대답해주세요."라고 카톡 했다. 곧이어 6명이 줄줄이 대답했는데 그 행렬이 병아리 같아서 귀여운 구석은 있었다. 내일 아침 10시에 웹 미팅을 하자고 말했고, 더는 카톡 하지 않았다. 셔틀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생각했다. 최대한 살가움 없이, 공정한 업무로만 대하자고.


 다음날 8시 30분에 출근해, 그 혼돈의 메일을 다시 읽어보며 할 일을 정리했다. 무려 주 2회 미팅을 해야 했다. 아무래도 학생들은 일정 개념이 잘 없을 것 같아서(나는 지금도 없다.) 평소 하지 않던, 한 달 간의 기간 동안 해야 할 프로세스와 스케줄을 표로 정리했다. 그리고 HR에서 공유받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그대로 옮겨 적어 웹 미팅 때 인턴들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먼저 표부터 보시면, 제가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고, 여러분이 제게 요청할 것과 하지 않아야 할 것들이에요." 화면 속 인턴들은 끄덕끄덕했다. 그렇게 인생 첫 멘토가 되었다.



    

 남의 프레젠테이션을 듣는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 두 시간 동안 여섯 명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탈진할 것 같다. 그럼에도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나의 경험과 지식으로 가이드를 제공해주는 과정이 꽤 즐거웠다. 생일 전날, 그들과의 오프라인 미팅을 마치고 터벅터벅 지하철을 타고 불 꺼진 집에 도착했다. 소파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내가 그들에게 말했던 것, 그리고 말하지 못해 아쉬웠던 가상의 대화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나는 수첩을 꺼내 다음 미팅에 해줄 얘기들을 적어두었고, 다음 프로세스에는 어떤 것이 필요할까, 카페에 앉아 생각해보게 되었다. 동시에 내가 도와주어선 안 되는 부분들을 상기하고, 그들에게 매길 공정한 점수를 고민했다. 


 점심시간에 식사를 하다 나도 모르게 선배님들에게 '여러분들'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웃으며 다시는 멘토를 시키면 안 되겠다고 말했고, 나중에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내가 무슨 말투로 어떤 말을 했는지 꼭 물어보겠다며 무척 궁금해했다.나로써도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 벌써 한 달이 지나갔고 얼마 전 최종 과제 발표까지 마쳤다. 그들에게 중요한 과제인 만큼 나 역시 여력을 쏟아 최선을 다했고 결과물도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그들이 발표하는 순간 나 역시 떨렸고, 조금은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그래서 평가자들 중 누군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했을 때 밤잠을 이루지 못했고 지금도 그 말이 떠오를 때면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그럼에도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들 중 누가 신입사원이 될지는 모른다. 한 달 뒤 회사에서 나의 멘티들을 문득 마주치게 된다면 무척 반가울 것 같다. 하지만 내색하진 않을 작정이다. 가볍게 "안녕하세요." 고개를 끄떡이고 돌아설 계획이다. 내가 녹아내릴 것 같아서.





 어제, 일요일 오전에는 학교 선배님의 부탁으로 대학생 3학년 수업 일일강사를 맡았다. 9년 차 현직 가전 디자이너로서 학생들의 과제를 보고 피드백을 해주는 역할이다. 만약 멘토를 하지 않았더라면 거절했을 일인데. 아침부터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등진 창문이 너무 밝아서 얼굴이 새까맣게 나온다. 급히 책상을 움직여 반대로 돌아앉았고, 책상에 물통 3병을 두었다.


 화면에 속속히 들어오는 17명의 학생들. 소개로 간단하게 내 이름과 학번 그리고 회사 연차를 말했다. 집에 마땅한 종이가 없어서, 전화영어 교재 출력물 뒷장에 펜으로 그들의 발표를 메모하며 피드백 거리를 적어나갔다. 그들에게 말할 거리가 꽤 많았고 오히려 프로젝트 초반에 피드백을 했더라면, 새로운 아이디어라던지 방향성을 제시해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까지 들었다. 예정된 한 시간을 훌쩍 넘었고 결국 2시간을 넘겨서야 끝이 났다. 선배는 고맙다고 했지만, 고마운 건 나였다. 즐거움과 재발견을 알려주어서. 그리고 멘티들에게도 고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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